[1-4화]
1.
경신은 40년 동안이나 하얀색 와이셔츠를 고집했다. 덕분에 경신이 아내는 누렇게 바랜 목 때를 벗겨내는 수고로운 시간을 버텨내야 했다. 경신이 바짝 깃을 세워 다리는 것은 자신이 더 잘한다며 도맡지 않았더라면 40년 내내 빳빳하고 깨끗한 흰 셔츠를 입을 수 있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복숭아 위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을 있는 힘껏 끌어올려 신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의 이름은 황경신. 그의 얼굴은 한 번 보면 쉽게 잊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왼쪽 광대가 오른쪽 광대보다 조금 더 도드라져 보이고 볼은 움푹 파여 있다. 나이가 들어 볼에 지방이 빠지자 신기하게 광대에 살이 붙은 것 마냥 얼굴이 점점 역삼각형으로 변해가는 게 그는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흰 셔츠가 잘 안 어울리는군.’ 생각할 때 즈음 경신은 정년퇴임했다.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장소이자 시간이었기에 담담한 척하려 해도 가슴 한쪽에 막히지 않는 구멍하나가 생긴 기분이었다.
임원까지 굳건하게 버텨낸 40년 직장생활에서 경신이 배운 것은 ‘버티는 힘이 가장 강하다’였다. 그 버팀이 곧 책임감이고 그 버팀이 곧 경력이 되며, 그 버팀으로 너희들 다 대학 보냈다는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는 사실 맞는 말이었다. 경신은 회사에 취업해 9개월 만에 성격에 맞지 않는다고 그만둔 아들에게 ‘사내 녀석이 버티는 힘이 없어서야 어떻게 하려고’ 하면서 소주 한 병을 마셨다. 요즘은 이직이 자유롭다는 철원의 말에 경신은 얇은 입술을 앙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소주를 잔에 따르는 철원을 향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만큼은 버텨보는 것도 능력이다.라고 묵직하게 말했다.
경신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철원도 일을 그만 두니 사이좋은 백수가 여기 있었다. 아내 경실은 알바라도 하며 네일 값은 내가 벌겠다고 근처 마트 캐셔로 취업을 했다. 몇십 년 주방에서 밥 해먹인 손 이제 곱게 다루겠다며 얼마 전부터 네일숍에서 손톱 위에 알록달록한 색을 바르고 왔다. 4만 원 남짓, 꽤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경실은 눈 꼭 감고 다른 사람에게 두꺼워진 손을 내밀었다. 점점 화려해지는 아내의 손을 볼 때 경신은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툼하게 튀어나온 관절이 알록달록한 색과 대비되면서 아내의 손이 더 거칠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신은 솔직한 마음을 숨기고 색이 올라가니 손이 처녀 때 같다고 말해주었다.
캐셔 일은 손님이 몰릴 때 서있는 것 빼고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응대보다 컴퓨터에 있는 작은 글씨들을 찾느라 고생했고, 실수라도 하면 다시 계산을 할 때 머리가 하얘질 듯 긴장되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귀신같이 밥에 적당히 물을 맞추고 나물 반찬에 간을 하는 것처럼 이 일도 시간이 가니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경실은 동네 작은 마트에서 계산을 하는 것이 행복했다. 적당한 가격들의 바코드를 찍으면서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저녁 반찬을 그려보고 위로받았다. 숫자에 동그라미가 많으면 머리가 아프다며 웃던 경실, 경실은 지금 일 하는 마트가 자신에게 자존감을 높여주고 삶에 활력도 생기게 하는 최적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 당신에게는 명품 매장이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경신의 장난스러운 말에 경실은 이내 깔깔 웃으며 누아바통으로 갈까요, 구짜로 갈까요 말했다.
직장생활 내내 짧고 단정한 머리를 고수하던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 힘없이 많이도 빠져나갔다. 때론 늙어가는 모근에서 힘없이 빠져버리는 머리털이 아쉬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다린 셔츠를 입고 복숭아뼈까지 양말을 힘 있게 올릴 오전시간이 사라진 것도 아쉬웠다. 아직 힘은 펄펄 남아도는데 잠자리에서 철벽 방어하는 아내도 아쉬웠고, 눈치 없이 넘쳐 도는 에너지도 야속했다. 힘없이 빠져버리는 머리털처럼 힘도 쭉 빠지면 좋으련만 아직 마음도 이팔청춘, 체력도 청년 같으니 더 서글픈 것이었다. 흘러가버리기만 하는 시간이 야속해 그는 아직 넉넉히 남아도는 에너지를 소진할 일터를 다시 찾아 나섰다. 그러다 지금의 직장과 연이 닿았다. 산책길 동네 단지를 크게 돌다 우연히 관리소 안내 전단지를 발견했다. 관리소를 들어가 물어보니 누런 이력서 종이 한 장을 주며 작성해 내란다. “ 여기서 작성해도 되나요?”라고 물었고 관리소장은 사진은 필요 없으니 시간이 된다면 작성하고 가라 말했다. 경신은 멋들어진 필체로 한 글자 한 글자 이름을 써 내려갔고 얼마 전 퇴직 한 회사의 경력을 긴 호흡으로 적어 내려갔다.
“ 여기다 제출하면 되지요?.”
이력서를 훑어보던 소장이 얼굴을 들어 경신을 보더니 한 마디 한다.
“ 얼마 전까지 일을 하셨는데 자유 시간 좀 가지시지 그러세요.”
“ 쉬는 법을 몰라 쉬는 게 어렵군요.”
옆에서 믹스커피 봉지로 커피를 휙휙 젓고 있던 두 명의 근로노동자가 나도 그 마음 백번 이해한다고 웃어 보인다. 돈 때문은 아니다. 아이들도 자기 밥벌이 정도는 하고 있고 주공아파트이긴 하지만 재개발도 결정됐으니 노후가 불안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경신은 솔직히 넉넉한 시간이 불편했다.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남을 위해 시간을 쓰는 시간이 그에게는 더 익숙했다. 단조로운 면접 후 바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근무 시 착용해야 하는 옷을 받았다. 남색 바탕에 주머니 단추가 금색으로 박혀있었다.
“ 세탁은 개인적으로 하고 입으시면 됩니다.”
경신은 받아온 옷을 깨끗하게 빨아 바지의 각을 살려 다림질을 한 번, 남색 셔츠의 각을 살려 다림질을 한 번 하고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 이제 내가 바깥에서 일하고 당신이 집안일 좀 하나 싶었더니만 그새를 못 참고 일터로 나가시는 양반... 아이고. 내일 출근 전 드실 미역국 끓여놨어요. 나도 내일은 오전 출근이니 당신이 알아서 챙겨 드시고 나가요.”
경신의 새 일터 출근시간은 예전 회사 출근시간과 똑같았다. 9시까지 출근.
하지만 경신은 늘 한 시간 먼저 도착해 한 시간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아 여유를 부릴 수 있었지만 경신은 잘 다려진 옷을 입고 일찍 출근을 했다. 갑작스럽게 season2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경신이 배정받은 구역은 11단지 B동 2호 라인이다. 작은 경비실에는 이전 직원이 쓰던 자잘한 생활도구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작은 라디오와 의자 등받이에 올려진 고동색 쿠션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 1평 남짓한 공간에서 누군가 인터폰을 받고 반품될 택배를 정리하고 비가 오면 계단까지 헝겊을 깔아 놨을 테지.
딩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민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내렸다. 경신과 눈이 마주쳤고 경신은 “ 안녕하세요. 새로 온 경비입니다.”라고 먼저 인사를 했다.
출근을 서두르던 한 남자는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고 자동차 키 버튼을 눌렀다.
눈이 마주치면 자동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경신에게 인사를 했을 수많은 직원들이 떠올랐고 경신은 당연하게만 받기만 하던 삶을 당연하게 주면서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름의 자기반성이었다.
곱씹으니 좋은 말이다. 안녕하세요. 그 인사로 경신의 인생 2막에 경쾌한 종이 울렸다. 월급은 예전에 비해 줄었지만 일하는 시간 역시 줄어 힘든 일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앉아있던 시간이 줄었다는 것. 동네를 돌며 소소한 일들을 신경 써야 한다. 주차 관련 실랑이를 해결하거나 차를 빼려고 차를 밀고 있는 주민들 도와주기, 주민의 차가 아닌데 세워진 경우 딱지를 붙이는 일. 분리수거를 확인하고 제대로 되지 않은 분리수거용품을 다시 분류하는 일, 비가 오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장판도 깔아야 할 것이다. 얼씨구! 몸에 잔 근육도 더 생기겠군. 경신은 생각했다. 웃음이 나왔다.
2.
경신의 아내는 여성스럽고 남성스럽다. 그녀는 늘 엄마라는 제3의 성에 대하여 열변을 토한다. 폐경 후 남편보다 테스토스테론이 더 많이 나오니 이제 우리 집에는 남자 셋, 여자 한 명이 사는 것이라고 말할 때면 딸 연신은 고개를 저으며 질색을 했다. 이렇게 씩씩해지기까지 얼마나 파란만장했을까. 끝나지 않는 가사로 손가락이 틀어지며 퇴행성관절염으로 고통받은 시간 10년. 폐경 우울증으로 슬퍼하던 시간 3년. 우울증이 끝나자 호르몬 변화로 온갖 신체변화를 이겨낸 시간 10년.
그 시간의 합이 경신이 일터에서 버텨낸 시간의 합보다 덜 가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경실도 버텼다. 죽어라 버텼다. 경신이 사회생활을 한다며 에너지를 발산하며 버텨냈다면 경실은 가정을 지키며 응축의 버팀 시간을 묵묵히 이겨냈다. 밤마다 튀어나온 관절이 아파 왼손으론 오른손을 주무르고 오른손으로는 왼손을 주물렀다. 보수 없는 노동은 사라져야 한다며 진지하게 말했지만 긴 시간 보수 없는 노동의 시간은 끝날 줄 몰랐다.
- 엄마 오늘 퇴근 후 잠깐 들를게요.
“ 벌써 오늘 두 번째 수요일이구나. 그래 – ”
간단하게 답문을 보내고 주방으로 가 빠르게 김치를 썰어 찌개를 끓였다.
철원은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들른다. 주말까지 업무로 바쁘니 여유롭게 집에 올 날이 많지는 않지만 야간근무가 있는 날이면 그래도 한두 시간 집에 들러 밥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두 번째 네 번째 수요일은 철원의 야근근무로 저녁식사시간이 애매하단 걸 경실은 알고 있었다.
“ 내일도 지원이 새벽에 출근하지? 어서 와 집에서 저녁 먹고 조용히 들어가. 가서 우당탕거리지 말고.”
저녁까지 못 먹고 늦게 퇴근하는 아들 저녁을 내가 챙겨 주는 게 맞냐 물으면서도 일찍 일하러 나가는 아내 잠 설치게 하는 것보다야 낫다 대신 대답하며 김치찌개를 끓여 내어 준다. 그러면서 장가 후 얼굴 볼 일 뜸한 아들의 얼굴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경신은 아빠와 소주 한 잔 마시고 이직을 보류한 아들에게 늘 잘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갑자기 불꽃이 남아있는 심지에 자신이 기름이라도 부어버리는 격이 될까 봐 괜히 눈치를 보게 되기도 했다.
첫 아이는 철원에서 생겼다. 그래서 철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면 철원은 견고할 ‘철’, 으뜸 ‘원’의 멋진 이름이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철원에서 생겨 만들어진 격하게도 일차원적이 이름이었다. 둘째 딸은 철원이 태어난 후 3년 뒤 생긴 축복이다. 그녀의 이름은 한연신. 연신의 이름을 따로 설명할 필요가 더 있을까. 맞다. 그녀는 연신내에서 생긴 축복이다. 왜인지 그는 연신을 이야기할 때는 솔직하게 둘째 아이는 연신내에서 만들어진 딸 아닌가! 라며 말하곤 했는데 연신은 그 설명을 들을 때마다 황당하고 민망했다.
“ 애 만든 곳을 이름으로 해버리는 부모가 세상 어디 있음?!”
하고 물으면 경신은 “여기 지.” 하고 맞받아쳤다. 아내 경실은 그런 연신이 연신 귀여운지 “ 뭐 어떠니 나중에 연신이 자기소개할 때 임팩트 있게 이런 얘기 딱 해버려. 이게 뭐 흠이니.” 한동안 연신은 자기도 오빠처럼 뭔가 의미라도 만들어 달라며 한자사전을 찾아 맥락이 대충 맞아 보이는 뜻을 적어 보여주기도 했다.
“ 아빠 엄마! 나도 연신내의 ‘연신’ 말고 연결할 ‘연’ 익을 ‘실’ 같은 걸로 말해줘. 응?” 부부는 연신의 말에 알았다며 웃어넘겼다. 살아보니 이름, 이름의 뜻 같은 건 사실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아빠엄마를 연신은 어이가 없게 바라봤다.
‘ 그 판단을 왜 아빠 엄마 둘이만 정하냐고...’
물론 흠은 아니었지만 연신에게는 자신의 탄생지가 곧 이름이고 이름이 곧 탄생지라는 사실을 자동반사적으로 평생 떠올려야 했으니 어쩌면 부모는 연신에게 작은 짐을 지어준 셈이다. 연신은 나이가 들면서 이름으로 누군가와 더 친해질 기회를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연신은 정말 연신내에서 태어나 만들어진 연신이라는 이름을 사용(영리하게 활용)했고 지친 면접관들의 얼굴을 잠시지만 웃음지게 만들기도 했다. 경실은 연신이 합격한 것이 다 이름 덕이라고 웃으며 말했고 사실 연신도 분위기상 자기소개 설명에서 반은 먹고 간 것이 사실이라 생각했다. 아니라며, 뭔 말이냐며 아득바득 우기긴 했지만..
아이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옛이야기가 어디서든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경실은 참기름집주인의 소개로 황경신을 만났다. 가까운 이웃은 아니었지만 5일장이 열리면 시장에서 한두 번쯤은 마주쳤을 만한 어중간한 인연이었다. 경실은 지역 농협은행에서 일을 하다 얼떨결에 시장에서 떡을 팔게 됐는데 경실의 엄마가 달려오는 자전거에 부딪혀 다리가 부러지면서 어쩔 수 없이 돕게 된 일이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게를 100퍼센트 떠맡게 된 것이다. 떡 장사는 생각보다 잘 됐다. 은행보다 돈벌이가 되니 그만 둘 이유가 없었다. 경신은 오일장이 열리면 시장에 들러 찹쌀가루를 빻아갔고 나중에야 경실을 보기 위해 떡집에 들렀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안정적인 회사에 취업하세요. 그래야 장가가죠.”
곱게 빻은 찹쌀가루를 봉지에 담아 야무지게 묶어 내어 주며 말하는 경실의 말 한마디에 경신은 정말 회사에 취업했다. 가장 안정적으로 일 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기업에. 처음 참기름집 사장님은 괜찮은 남자가 한 명 있다며 경실에게 황경신 사진을 보여줬다. 광대가 툭 튀어나온 게 성깔이 있어 보인다고 말하자 몸도 탄탄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하다고 칭찬을 했다. 경신은 다른 말보다도 ‘ 건강하다’는 단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건강하지 않아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와, 다리가 부러졌는데 면역력이 급격히 나빠져 뼈가 다 붙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유 없이 열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은 6살 차이 나던 남동생을 떠올리면 경실에게 어쩌면 건강이라는 한마디는 생명줄처럼 가장 중요한 무언 가였다. 그 뒤로 경신이 가게에 들르면 괜히 신경 쓰였다. 그쪽도 소개를 받아 이쪽으로 슬쩍 발길을 돌린 게 뻔히 보이는지라 더 민망했다. 어색함을 감추려 꺼낸 말이 취업, 결혼이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결국 경신은 취업을 하고 경실은 경신을 만나 부부가 됐으니 이 부부의 연은 참기름집 사장님과 경실의 추진력이라고 정리하자.
경신은 경실을 처음 만난 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살아서 파닥거리는 작은 빙어를 나무젓가락으로 꽉 집어 입에 넣고 우걱 거리던 모습은 마치....”
“포세이돈? 크크.” 연신이 웃었다.
“ 말 마라. 포세이돈보다 더 센 놈은 없나? 너희 엄마 첫인상은 엄청 강렬했지.”
“ 어머 왜 이래? 그 맛있는 게 앞에서 파닥거리는데 어떻게 안 먹고 있어?”
“ 허허 난 그리 살아있는 걸 맛있게 먹는 사람을 처음 봤어.”
“ 여보. 빙어 회는 진짜 맛있는 거야.”
“ 오늘 빙어회 한 접시 먹어?”
“ 이제 늙어서 한 번에 안 씹혀요 할아버지!”
경신과 경실은 이름도 비슷했고 성격도 비슷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해 때론 귀가 떨어질 것 같고 때론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시장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둘은 서로가 쿵짝이 잘 맞는다고 표현했다. “싸움도, 사랑도 쿵짝이 잘 맞으니 아직까지 둘이 하하 호호 웃으면서 손잡고 산책하는 거지.” 남과 남이 만나 한 쌍의 부부가 되기까지 중요한 부분이 얼마나 많겠냐 만은 경신은 자신의 부부 생활을 짚어볼 때 쿵! 과 짝! 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쿵은 말이고 짝은 대꾸다. 어떤 말을 해도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 바로 부부에게 가장 중요한 쿵! 짝!이라는 것이다.
딸 연신은 아빠가 말하는 그런 쿵짝의 상대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37살! 비혼 주의 선언을 했다. 그녀의 선택에 놀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 취업도 했겠다.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음 그걸로 된 거지.”
비혼 주의자지만 연애만은 쉼 없이 하는 연신을 보고 연애라도 하니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덜컥 임신이라도 해서 가족 놀라게 하지 말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한 스푼 담아 잔소리했다. 연신은 문득 궁금했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와 연애는 하지만 결혼에 속박되고 싶지 않아 하는 남녀의 마음에 대해. 문득 결혼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일부러 지우개로 박박 지워버리는 자신의 태도는 어떤 심리인지 궁금했다.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연신은 자신이 ‘진짜 어른’에 가까운 사람인지, 그런 나이인지 알 수 없었다.
3.
“ 안전검사에서 최하위 등급 확정! 축하합니다.”
출근할 때마다 커다란 현수막이 펄럭거렸다. 커다란 고딕체 글자를 볼 때마다 경신은 웃음이 나왔다. 최하위는 심지어 빨간색으로 강조해 놨는데 하위 등급을 축하하는 건 이 나라 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경신 역시 주공아파트에서 오래 살았다. 경실이 무리해 계약을 하자 조른 아파트였다. 경신은 적은 월급으로 이자 내기도 빠듯하다며 끝까지 고민했고 경실은 경신 몰래 도장을 찍고 아파트 계약을 해버렸다. 경신은 무모하게 일단 저지르다 집안 풍비박산 나는 거 한 순간이라며 아직까지 그 일화를 떠올렸다. 25평 좁은 아파트에서 네 식구가 옹기종기 행복하게도 살았다. 미안하고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좁은 방에 불평하지 않으며 컸다. 방을 바꾸라면 바꾸고, 침대가 못 들어갈 것 같다고 하면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잤다. 더운 날이면 거실에 나와한 명은 소파에서, 한 명은 바닥에서 대자로 누워 잤다. 그런 아이들 덕분에 다른 곳으로 이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40년 묵묵히 회사에 다닌 것처럼 좁은 그 공간에서도 묵묵히 살았는지 모른다. 재개발만 바라고 산 아파트는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 공사가 시작되면 조합원으로 새집에 들어가니 노년에는 좋은 집에 들어가겠구나 싶었다. 새집이구나 하는 얄팍한 마음과 최하위 등급에 박수를 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모습은 참으로 모순적인 태도였지만 어쩌겠는가.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누군가 짐을 싸게 될 때, 팀 하나가 사라질 위기에서.. 경신은 남은 자로서 안도하며 ‘이번 기회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잘해보자’ 생각했다. 경신의 첫 업무는 재건축 관련 서류에 도장을 받는 것이었다. 사인을 하지 않은 세대에 찾아가 관리소에서 제작한 재건축 관련 안내서류를 설명하고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야 했다.
어느 집에선 김치찌개 냄새가, 어느 집에선 조기 굽는 냄새가 솔솔 났다.
아이가 어린 집은 정신없이 행복했고, 고요한 집은 평온하게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경신은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며 세상을 배우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주민을 만날 때면 팀장으로서 팀원들을 다독이던 리더십을 발휘했다. 물 한잔 내어주는 따뜻한 주민을 만나면 감사한 마음을 기억했다 보답했다. 할 일이 많지 않았지만 반대로 그들을 위해 할 일을 찾으니 주변에 일이 널려있었다.
복도식 아파트라 ‘소음’에 대한 민원이 자주 있었고 비가 많이 오면 복도에 비가 다 들이쳐 물이 웅덩이처럼 고이기 일쑤였다. 몇 개월 근무하다 보니 인터폰을 받고 제대로 응답해 주는 일의 비중이 가장 많다는 점, 분리수거를 하면서 손이 다칠 수 있으니 목장갑이 필수라는 것을 알았다. 깨진 유리를 플라스틱 분류함에 넣은 주민 때문에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를 크게 다친 뒤 한 동안 붕대를 감고 다녔는데 아파도 일은 해야 하니 스스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 밥 주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한다는 아파트 관리실 통보 때문에 매일 아침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1202호 아주머니와 반복되는 실랑이도 지혜롭게 견뎌내야 했다.
뻔히 살아있는 생명한테 사비 털어 밥을 주는 것도 못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냐고 소리를 높이면 경신은 자신도 개. 고양이. 하마. 코끼리 다 좋아하지만 관리실에서 전체 공문이 내려왔으니 규칙을 지키게 돕는 것이 자신의 업무라고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회사를 다닐 때 근처에 고양이 아지트가 있었다. 한 직원이 조용히 고양이에게 밥을 주었는데 그 뒤로 그곳이 고양이들의 성지로 변하는 바람에 대대적으로 고양이 소탕작전이 일어났다. 더운 계절은 그렇다 치더라도 바람이 쌀쌀해지는 겨울이 다가오면서 근처 고양이들은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 보닛에 들어가기도 하고 건물 지하로 몸을 파고들기도 했다. 문제는 추위를 피해 몸을 녹이는 과정에 전선이 뒤엉키거나, 감전을 하면서 건물 전체 정전까지 발생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건물에 피해가 막대하다며 고양이에게 최초로 밥을 준 사람을 색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회사 블라인드 게시판에는 실명까지 거론되며 ‘고양이’ 밥을 주는 ‘성격파탄자’라는 제목으로 한 사람이 처참하게 마녀 사냥 됐다. 1202호 아줌마를 볼 때마다 회사에 다녔을 그 누군가가 떠올랐다. 잘못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니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하기도 뭣한 상황.
경신은 대치상황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몸을 움직이며 일을 하면서 맑아졌던 정신이 사람들과 실랑이를 하면서 두 배로 퇴색되는 것 같았다.
“ 오늘은 매미 때문에 한 바탕 소동이 있었다는 거 아니야?”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거실에 앉아 시원한 콩국물 한잔을 들이켜니 온도가 정상으로 맞춰지는 것 같았다. 작은 선풍기 한 대로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더위다.
“ 매미는 왜요?”
“밤마다 두세 명이 손전등을 들고 아파트 단지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거리기에 나가서 누구냐고 물었더니만 뭐 이것저것 설명하는데 말투가 한국 사람은 아닌 거지. 그래서 이 늦은 시간에 뭐 하시냐. 다시 물었더니만 간식을 찾아다닌다고 하더라고. 배가 곯아 그런가 싶어 몰골을 살폈다만 볼도 통통하고 배도 퉁퉁하니 그건 아닌 것 같고 휴대폰으로 사진 하나를 보여주는 거야. 매미 튀김이랑 매미 유충구이라고. 맛있어서 그거 찾으러 다닌다고 플라스틱 통을 2개 딱 들어 보여주는데 내가 나이 70 먹고 소리를 질렀다는 거 아냐. 얼마나 놀랐는지 손전등 위에 얼굴이 갑자기 귀신같이 보이고, 통 안에 잡힌 매미들이 득실거리는데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사람 같더라니까.”
“ 세상에나. 그걸 왜 잡아. 그거 불법 아니 예요?”
“ 요즘 세상 흉흉한데 그렇게 두셋 몰려다니면서 땅 파고 있으면 주민들은 무섭지. 안 되겠다 싶어서 여기서는 절대 매미 잡으면 안 된다니까. 다른 동네도 자기들이 다 섭렵했대. 참나 기가 차서. 불법 아닌데 왜 매미를 못 잡게 하네. 매미가 아저씨 거냐고 되묻기에. 내가 이 구역 매미 아빠라고 소리를 질러버렸네?”
“ 참나 세상 사람들도... 먹을게 천진데 뭘 매미까지 다 잡아먹으려고 그 난리래. 돈이 되니 그러는 건가? 사는 사람 있으니 그 새벽에 손전등까지 켜서 돌아다니지. 그래서 어찌 됐어?”
“ 뭘 어찌 돼. 새벽에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니 돌아가시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표정이 섬뜩하게 변하 길래 경찰에 신고했지.”
“ 아휴 진짜. 여보, 요즘 묻지 마 폭행이다 살인이다 신문에 도배가 되는데 무서운 줄 모르고 다 늙은 노인네가!! 당신 어디서 일하는 지도 다 알 거 아냐.”
“ 만약에 진짜 미친놈이면 초장에 잡아 쳐 넣어야지. 그게 내 임무 중 하나 아닌가.”
“ 어이가 없네 이 양반. 당신이 뭐 아이언 맨이야 스파이더맨이야.”
“ 매미 아빠다. 다시 생각해도 불쌍해 죽겠어. 그 잡힌 것들 다 털어 날려 보내주고 싶었는데 그걸 못해 화가 나네.”
“ 그래 잘했어. 아파트 단지를 지켜주는 매미맨 등장하셨네. 몸 사려 진짜. 저번에 고양이 막대기로 때리던 아이 부모 라이도 잘 해결된 거 맞지?”
“ 아! 그렇지 그건 다 해결됐지.”
하교 후 긴 나무 막대기 하나로 동네 고양이를 쫓아다니며 때리던 5학년 남자 학생을 불러 세운 적이 있었다. 경신이 아이에게 동물을 그렇게 때리면 안 된다고 하니 뒤에서 쫓아오던 아이의 엄마는 장난으로 그런 걸 길거리에 세워놓고 민망하게 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동 근처도 아닌데 뭘 그렇게 간섭하면서 애한테 훈수를 두냐는 말에 경신은 꼿꼿한 자세로 일러주었다. 당신의 자녀 생명은 귀하고 말 못 하는 동물 생명은 하찮은 게 맞냐고 되묻기도 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엄마는 아이 머리통을 한 대 세게 치더니 동네에서 쪽팔리게 이런 짓 하지 말라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고양이는 한두 번 맞은 게 아니었다. 1202호 아줌마의 귀띔이 없었다면 알지 못했던 일이었겠지만 관심을 가지니 보이는 일들이 꽤나 많았다. 하교 후 일정한 시간에 고양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긴 막대기로 구멍을 쑤시고 고양이들이 햇볕에 누워 몸을 길게 늘어뜨려 기지개를 켠 뒤 낮잠이라도 청하려 하면 막대기로 세 개 내리쳐 고양이를 때려 상처 입게 했다. 작은 진동에도 예민한 녀석들이었지만 몇 명이 막대기를 휘갈기며 달려들 때에는 그 빠른 고양이도 속수무책이 됐다. 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근처 경비원들과 힘을 합치기도 했지만 하교하는 아이들까지 사사롭게 신경 쓰며 동네를 지키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경신은 어쩔 수 없이 점심을 간단히 먹고 자신의 동네 근처를 보안관처럼 산책하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작은 관심만으로도 분위기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
‘내가 생각보다 정의로운 사람인가.’ 경신은 처음 그런 생각을 했다. 스스로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고, 정장을 입고 고개에 힘을 주고 다니던 옛 시간보다 지금이 더 괜찮은 하루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근처 파출소에 찾아가 매미 잡는 사람들의 동선을 일러주고, 시커먼 옷을 입고 땅을 파는 모습에 늦은 시간 귀가하는 주민들이 놀란 정황을 알렸다. 덕분에 매미 소동은 생각보다 빨리 안정적으로 마무리됐다. 우렁찬 매미소리가 들려 귀가 윙윙 거리는 계절도 곧 끝나겠구나 생각하니 나무에 악착같이 붙어 있는 매미들이 한없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 그래도 세상구경 잘하고 간다 생각하거라. 좋은 날이었다 기억하면서.’
제일 부지런한 경비원 할아버지, 할 일 찾아 하는 할아버지, 분리수거 끝판 왕 할아버지, 우리 동네 보안관 할아버지 등 아파트 단지 카페에는 황경신 님을 칭찬합니다.라는 익명의 글들이 자주 올라왔다. 경신은 세탁된 옷을 더 빳빳하게 다리고 아침도 더 든든하게 먹었다.
4.
일주일 한 번 휴무, 요일은 주마다 다르다. 한 달 근무표가 나온 뒤 일정을 부득이하게 변경해야 하면 적어도 2주 전까지 보고를 해야 한다. 경신의 동에는 2명의 경비 근로인과 한 달 한 번 전체 청소를 전담하는 청소노동자 한 분이 팀처럼 움직였다. 청소노동자 복희 씨는 청소 당일만 와서 오전과 점심 나눠 청소를 하니 얼굴을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성격이 화통해 한 달에 한 번 본 사이가 아니라 몇 년 안 사이처럼 친근했다. 작은 열쇠로 청소 호스를 어깨에 둘러메고 계단을 올라갈 때 도와주려 하면 “ 이건 내 업무이니 손댈 생각 하지 마쇼!” 하고 웃어 보였다.
140센티미터를 간신히 넘긴 아담한 체구에 어깨에 호스를 메고 15층까지 계단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다 코어 힘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두툼한 허리춤에 초록색 가방이 늘 그녀와 함께했다.
“ 우리 손녀가 가끔 노래를 불러주는데 청소할 때 그 노랫소리 들으면서 계단 닦으면 때가 그리 잘 벗겨져요~” “커피사탕이 좋으셔 박하사탕이 좋으셔?”
“ 떨이로 산 홍삼캔디는 오늘 기분이다! 내가 쏠게 드슈!” 복희 여사님의 장점은 늘 공간의 분위기를 반 음 정도 높게 만들어 경쾌하게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주 수요일 청소를 하는 날은 복희여사님의 노랫소리가 복도에 가득 찬다.
복희 씨에게는 25살 딸 한 명이 있다고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취업준비로 한창 바쁘게 지낼 나이인데.. 복희는 늘 말끝을 흐렸다. 경신은 25살이면 한창 바쁘겠다고 말했고 복희 씨는 서로 밖으로만 나돌아서 서로 얼굴 보기가 힘들다 하며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밝은 사람이 자식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그늘이 생기는 모습을 보고 그녀 삶에서 가장 약하고 말랑한 부분은 아마 자식일 것이라 경신은 추측했다. 경신에게 철호라는 이름이 아물지 않는 상처 같은 것처럼.
철호는 경신의 회사 동기였다. 회사를 다니다 자신은 회사가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어느 날 갑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말하는 철호와 삼겹살에 소주를 한 잔 마셨다.
철호는 경신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모두의 안위를 지키는 것인가 물었다.
“ 뭔 일 있어?” 경신의 반복되는 물음에 철호는 아무 대답 하지 않고 소주를 들이켰지만 사실 경신도 알고 있었다. 회사 내부 비리 고발자 K 씨가 김철호, 철호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삶이 뭔 의미냐는 철호의 눈빛이, 철호의 탄식이 경신은 두려웠다. 내부 자료를 기사에게 넘겨 고발한 뒤 철호는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을 받았다. 정부 몇몇 기관과 장관의 이름까지 거론된 회계자료는 생각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고 철호의 주변인까지 모두 회사에서 특별감시대상이 됐다. 경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호에게 연락을 받은 날 윗 상사는 경신을 따로 불러 어떤 연락이 왔는지 물었다. 자신도 윗선에 보고를 해야 하니 일거수일투족을 다 말하라는 거였다. 내부 사찰은 그 자체가 문제 되는 일이었지만 회사 내에서 ‘다수’를 지키기 위해서는 엄연히 행해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절차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경신은 상사의 지시를 받고 저녁약속을 잡았다. 김 과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만 넌지시 알아오면 되니 부담 없이 술 한 잔 하라는 그 말의 무게를 경신은 알고 있었다.
경신은 외치고 싶었다.
“ 도대체 다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일개 월급쟁이 한 명의 바른 소리에 휘청할 정도의 파장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 네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그들의 계획에 동조한 공범이 되었다. 경신이 소주 한 잔을 마실 때 철호는 연거푸 소주 세 잔을 마셨다. 이러다 취하겠다는 만류에 철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경신을 바라봤다.
“ 경신이 이 자식. 난 너 안다 이 자식아. 난 내 길을 가고, 넌 너의 길을 가면 되는 거야!”
“ 뭐라는 거야. 너 그 소문 때문에 그러는 것 같은데 별일 없을 테니까...”
“ 별일이 있어도 그냥 모른 척 살 수는 없지. 자폭이라도 해야지. 그게 사는 길이지.”
마른 얼굴을 손으로 몇 번이나 비벼대는 철호가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것인지, 잊고 싶은 무언가를 지우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난 회사를 그만둘 거야. 씨발 다니지도 못하지 뭐. 가만 두겠어? 그런데 말이야.
어떤 생명은 길가에 개미만도 못하고 어떤 놈의 것은 아무도 못 건드리는 성역이란 말이지. 그게 좆같지 않냐는 거지. 난. 우리가 누구냐. 대한민국 국민 아니냐. 똑같이 세금 내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살아있는.”
“ 황경신 너 세금 내지?”
“ 이 새끼...”
“ 그런데 왜 죄지은 새끼들은 더 당당하고 법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조아려야 하냐 이거지.”
“ 야야 그만해라. 너 오늘 많이 취했다.”
“ 황경신 너도 이 새끼야 조심해. 문서 다 조작했다고 독박 쓰고 협박받는 거 한 순간이라고. 내가 왜 기사한테 다 꼬발랐는지 알아? 끝도 없어 끝도. 이게 내가 고발한다고 끝나지 않을 문제 란거 다 알거든? 근데 어떻게 해 내가 알아버렸는데. 그걸 그냥 눈 감고 있어? 네네. 하면서 그냥 주인한테 딸랑대는 개새끼처럼 그냥 밥 주고 돈 주면 조용히 있어야 해? 곪아 썩어 문드러진 정황이 너무 명확하게 대놓고 드러나는데 한 사람도 말을 못 해. 말을 안 해. 왜 잘못됐는데 나도 잘못한 죄인처럼 살아야 하냐 이거지. 그걸 말을 했다? 그럼 죽어야 한다? 이 논리는 말도 안 된다는 거지 경신아.”
“ 야 철호야. 소리 낮추고 누가 듣겠어.”
“ 넌 사랑하는 와이프도 있고 귀여운 아들딸도 있으니 몸 잘 사려. 그래 맹견보다는 반려견이 주인에게도 오래 사랑받을 수 있어. 잊지 마라 황경신. 잘 지켜 가족을. 나처럼 자폭하지 말고.”
“ 이혼이 흠이냐. 갑자기 무슨.”
“ 그 이혼 때문에 내가 용기가 어디서 솟았나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 지금 크크크 지켜야 할 가족이 있으면 내가 이렇게 잔다르크가... 안 됐지 않을까 하는 거지. 크......
김. 철. 호. 졸라 멋지다. 난 회사를 때려치운다!!!”
철호는 알고 있었다. 경신의 상황과 회사 모두의 상황을. 경신이 한 마디도 못하게 혼자 거하게 떠들어대고 유서 한 장 남긴 채 다음 날 차에서 시신으로 발견했다.
지금도 경신은 철호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검찰 출석을 앞둔 상황이었고,
다음날 미국에서 아내와 살고 있는 딸아이 경화와 오랜만에 영상통화를 한다고.
딸아이 얼굴 보고 힘내서 내가 어떻게든 버텨낸다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설픈 유서 한 줄과, 어설픈 번개탄 흔적은 어떻게 봐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잠시 타오르는 불처럼 떠들썩했을 뿐 철호의 존재는 쉽게 잊혔다. 그리고 경신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위해 버티고 또 버텼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자신 역시 철호를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죄책감이었다. 뉴스에서 신문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경신의 마음은 쿵 내려앉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죽음도 경신을 사지로 내몰곤 했다. 아직 경신의 책장에는 누렇게 바랜 헤밍웨이의 책이 굳건하게 꽂혀있다. 철호는 경신에게 헤밍웨이의 책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방법은 문학이라고. 자신은 음악보다 문학에 더 가까운 정적이고 고루한 인간 같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바쁘다면서 언제 시간을 내서 책을 다 읽고. “
” 무용한 독서가 원래 가장 가치 있는 법이지. “
경신은 산더미 같은 업무를 하루하루 해내야 하는 버거움을 곁에 두고 너른 하게 책을 읽는 마음의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지가 궁금했다. 철호는 점심을 먹고 남은 자투리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다른 사람이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장이 꽤 된다는 말과 함께.
” 좀 쉬지 “
” 이게 쉬는 거야. 지금은 글자가 필요한 순간이야. “
” 읽으면 뭐 좀 나아지나 “
경신은 물었다.
” 무용한 독서로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지. 윗사람한테 아양 떠는 시간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지 않겠어. “
” 야 또 그런다. 누가 들을라. “ 경신은
” 들으라지. 이리 까이나 저리 까이나 까이는 건 다 똑같은데 크크“
” 저 자식 정말. “
회사 사람들은 그런 철호를 때론 경이롭게 때론 경멸스럽게 바라봤다. 경신은 경이로운 날이 더 많았다. 철호의 눈빛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빛과는 뭔가 다른 정확히 표현하기 힘든 힘이 있었다.
경신은 철호에게 받은 책을 다시 돌려주지 못했다. 노인과 바닷속 청새치와 사투하는 노인이 마치 경신 본인처럼 느껴진 왜 때문인지 경신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지우려는 사투. 어떻게든 싸우려는 사투. 어떻게든 버티려는 사투 끝에도 결국 철호의 무거운 존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화 -9화 조금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