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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애씨


#정애.

정애貞愛. 여자는 자고로 지조를 지키고 또 사랑스러워야 한다며 할아버지에게 이름을 받았다. 성품이 ‘올곧고’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줬었더라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 지조를 지키라고 하니 괜히 억한 마음이 들어 엇나갔고, 사랑스러워한다기에 도대체 누구에게 사랑받는 것이냐며 딴지를 걸었다. 그냥 누군가를 위해 내가 존재해야만 하는 것 같아 커가면서 내 이름이 더 싫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날 보며 이름과 다르다고 말하던 할아버지와 아빠가 제일 싫었지만.. 자라면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건 사랑스럽지 못한 행동이라는 말이었고 난 유난히 곧았다. 때론 부러질 정도로. 어릴 때 고집은 말할 것도 못되지만 커가면서 남학생들에게 사사건건 훈수 질을 했고 덜떨어진 아이들에게 동급생으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올바른 훈수 질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쟤가 하면 넘어가는 짓이 내가 하면 늘 딴지대상이 됐다. 난 그게 마음에 안 들고 억울했었을 뿐이다. ‘왜 쟤는 되냐’ 한마디 바락바락 대들다 한 대 맞고, ‘넌 왜 혼나고 있는데 옆에서 실실 쪼개냐’ 째려봐서 집에 가 할아버지 아빠에게 한 소리 또 듣고 이 악순환 속에서 난 굳세게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혼이 나도 꼿꼿하게 머리를 들이밀었고 간혹 싸우기도 했고 결국 난 우리 동네에서 가장 여성스럽지 않은, 가장 고집이 센 선머슴이 됐다. 딸 5에 아들 1명 정말 징글징글하던 육 남매 중에서 난 아주 어중간한 셋째 딸이었다.

그 보글거리는 방 안에서 콩고물이라도 하나 더 얻어먹으려면 더 악을 써야 했고 더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래야 그 빽빽대는 소리 때문에라도 날 한번 바라봐줬으니까. 

내 목소리는 허스키하다. 여자의 목소리도 남자의 목소리도 아닌 어중간한 음성. 그런데 난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들으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봐줬고 음성은 나만의 독창성이었으며 그래서 난 유일한, 내 특징인 것만 같은 목소리가 그냥 좋았던 것이다. 거울을 바라봤다. 억세게도 자리 잡은 주름들이 눈에 띈다. 조금 작은 코, 커다란 입, 정리되지 않았지만 봐줄 만한 눈썹, 잘 관리 못해 색소가 침착된 얼굴 위 얼룩들, 염색한 머리 사이로 또다시 확연히 존재를 부각하고 있는 흰머리 가닥들, 두꺼운 목 그리고 그 위 가로 주름들, 조금 노란빛의 피부, 눈 아래 작은 점. 

어릴 때 엄마는 내 눈 아래 점을 눈물점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매일 악을 쓰는 거라고. 점을 빼도 그 부분은 매일 다시 생겼다. 죽여도 매번 살아나는 좀비 같은 그 작은 점에게 난 큰 선심을 베풀기로 하고 고대로 남겨두었다. 더 이상 건들지 않았다. 그랬더니 기고만장하게 눈 아래서 조금 더 크기를 키워 자리를 잡아버렸다. 미관상 나쁘지는 않았고(내 생각에) 점 하나가 인상을 크게 좌우하는 건 아니라고 믿었던 나는 내 눈물점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눈물 점은 정말 눈물을 선물해 준다. 늘 감성이 풍만하게 해 주고 덕분에 가슴은 풍만하지 않아도 마음은 풍만한 사람이라고 자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눈물은 내 아픔을 해소시켜 줬고 때론 다시 일어나게 했으며 눈물로써 내가 억세지만은 않은 아줌마라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도 있었다. 

난 아직 소녀 같은 억센 아줌마. 눈물 점 때문에 눈물이 많은 70세 어느 언저리의 아줌마 박정애다.          

내가 사는 방법

난 누가 나에게 “할머니”라고 부르면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2년째 일하고 있는 건물 화장실 청소를 할 때도 그렇다. 힘차게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데 누가 “할머니”라고 부르면 대꾸를 안 한다. “ 저기요!! 할머니”라고 다시 부르면 째리면서 대답해 준다.

“대걸레 이렇게 힘차게 미는 할머니 봤냐 이것들아!” 

난 일을 할 때 기운이 넘친다. 노란빛 얼굴에 움푹 들어간 볼, 그리고 억센 주름들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여전히 생기가 넘친다. 삶에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 볼 수 있는 그런 환한 빛 같은 것 말이다. 아무리 관절 엉망이고 욱신거리는 팔다리로 연명하고 있더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살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온전히 존중받아야 할 일이다. 

사탕을 하나 혀로 돌돌 굴려가며 시크하게 말하는 나를 보고 민망해하는 애송이 같은 젊은이들을 향해 “ 손 닦고 나가 이것들아! ” 한 마디 더 해주면서 씩 웃어주면 내 이미지는 여기서도 굳건해진다. 한마디로 지조 있어진다. 굳세고, 또 억세고, 이상한 인물. 남성성도 여성성도 아닌 뭐라 규정하기 힘든 성(性)을 지닌 그런 인물. 그게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는데 여전히 청소일은 허드렛일이고 여전히 여자는 이래야 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지껄이고들 있고, 나이 먹으면 조용히 처박혀서 요양이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질이 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렇게 열심히 신실하게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하나님 부처님을 열심히 믿으면 세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거냐고.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거냐고....

세상은 원래 더럽고 치사하고 간사한 법이다. 그래서 더 강해야 한다.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란 말? 괜히 나온 말이 아니란 거다. 목소리가 커야 바라봐준다. 그래야 움찔한다. 아무리 따뜻한 사람이라도, ‘난 내면이 온화한 사람입니다.’라며 눈빛이며 행동으로 애를 써도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온화하게 먹히려면 능력이 있거나 돈이 있어야 하고 능력도 돈도 없다면 강해야 살아남는다. 너무나 치졸스러운 생존방식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다 보니 이것도 터득이라고 몸이 따라가는데.. 더 강해야 내가 산다.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목소리라도 강해야 내가 산다. 그것도 없다면 강한 척을 해서라도, 뒤에서 눈물을 훔치더라도 그렇게 거짓으로 버텨야 하는 것이다. 나만 그렇겠는가, 세상사람 다 가면 쓰고 살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나보다 이 모질이들이..

주야장천 일하고 청소를 하다 보니 아줌마가 됐다. 나 때만 해도 여자는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을 때었지만 난 아득바득 목소리를 높여가며 울어댔고 덕에 딸 중에 나만 유일하게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우는 놈에게 떡 하나 더 먹인 것이다. 그 떡을 야무지게 잘 받아 처먹고는 난 날름 입을 닦았다. 공부를 하다 사랑에 빠진 남자와 덜컥 결혼을 한다고 했고 어디서 여자가 외박부터 하고 찾아와 후 보고를 하고 나자빠진 거냐고 집안이 발칵 뒤집히던 날.. 나도 꼭지가 돌아 옷가지 몇 개만 들고 지금의 남편과 도망을 갔다. 아무리 딸 다섯 딸 중에 나만 교육을 받게 했을지언정, 날 사랑으로 키워준 걸 알고 있을지언정,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사랑만 보이던 철없는 청춘이었다. 아니 어쩌면 마음속 나만 아는 묘한 설움들을 다 분출한 복수극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뜨겁게 사랑했고 가족이란 이름을 잠시 잊고도 살 수 있을 만큼의 행복을 누렸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한 달이 지나서야 알게 됐을 때 난 그제야 깨달았다. 난 굳센 게 아니라 억센 년이라는 걸. 나쁜 년. 미친년. 못된 년. 돼먹지 못한 년. 사랑받지 못하는 년.. 그런 말들이 귀 안을 맴돌면서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겨우 눈을 뜨니 팔에 주삿바늘 하나가 꽂혀있다. 처음 맞아보는 수액이다. 처음 수액을 맞으며 병원침대에 누워있던 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우리 엄마는?”이었다. 

일 년 가까이를 땅굴을 파고 깊숙이도 숨어 들어간 두더지 같던 내가 염치없이 찾은 사람, 우리 엄마. 엄마는 내 옆에서 손을 잡아줬다. 얼굴은 야위었고 피부색은 칙칙했다. 그 옆에 언니 동생들이 서있었다. 여자 다섯이 날 보며 울고 있다. 날 미워하는 눈물이었을까. 날 원망하는 눈물이었을까. 날 불쌍하게 바라보는 눈물이었을까. 

살아보면서 그때의 눈물이 자주 떠올랐다. 그 눈물은 분명 날 불쌍하게 생각하는 측은함의 눈물이었다. 난 측은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고 측은한 삶을 살았다. 복선의 눈물이었던 것일까..

아버지의 죽음은 나와 가족의 간당간당하던 다리를 간신히 연결시켰고 피붙이라는 것의 힘은 실로 대단해서 일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일상 속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억세기만 한 정애가 아니라 단단한 정애가 돼서 우리 가족에게 상처 준 빚 하나하나 갚으며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날은 배속에 우리 아들 창욱이가 들어선 날이다. 그 다짐을 한 날, 기적같이 아이가 나에게 왔다.      

#창욱이 내 아들.

아들을 가져서 칭찬을 받았었다. 만약 딸을 임신했었다면 어떤 인사를 건네받았을까 잠깐 생각하고 몸서리쳤다. 누구나 뜨거운 연애기간이 십 년, 백 년 지속되지는 않듯이 우리의 결혼생활도 어느 순간 창욱이로 인해 굴러갔다. 남편은 새로 시작한 사업으로 얼굴 보기 힘들었고 그 중간중간 우리들에게 말하지 못할 갈등이 불어났고 그 갈등만큼이나 우리의 오해도 깊어갔고 더욱이 돈이 궁해지자 길이 안보였다. 돈벌이를 하는 남편이 일한다고 안 들어와도 할 말이 없었고 일하는 중이라며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음에도 아이를 돌봐야 하는 엄마였기에 제대로 된 일, 그러니까 누구나 말하는 월. 화. 수. 목. 금 일정한 시간에 나가서 늦게까지 일 할 수 있는 정규직 일을 얻을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힘들던 시절 미친년처럼 아득바득 우겨서 공부란 걸 한 내가 우기고 우겨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점점 예전 아득하고 무지해서 악만 쓰던 정애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일종의 퇴행일까? 

아이가 조금 크면 뭐라도 해서 가계에 보탬이 되겠다고 늘 마음을 먹었고 이를 악 물고 아이를 키웠다. 튼실한 아들 키운다며 이웃집 사람들에게 좋은 것도 많이 받아 먹이고 입히면서 때 아닌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이다. 창욱이가 천 기저귀에 오줌을 싸면 앞에만 젖는 게 신기했다. 어릴 때 봤던 여자동생들 기저귀는 늘 뒤에가 젖어 이불빨래까지 같이 깡그리 해야 한다고 볼멘소리 내던 기억을 문득 떠올렸던 것이다. 창욱이는 잘 먹었다. 나는 입이 짧아서 그렇게 혼이 났었는데.. 창욱이는 잘 웃었다. 난 사랑스러워야 할 ‘애’ 자를 가진 여자애인데 잘 웃지 않는다며 꾸중을 들었었는데..

창욱이를 키우면서 내 어린 시절이 자주 오버랩 됐다. 내가 딸이 아닌 아들로 태어났다면 구겨 버리고 싶은 내 이름의 의미가 아닌 조금 더 대찬 이름으로 불려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가끔 아들이라 교묘하게 혜택 받는 내 아들도 얄미울 때가 있었고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언니의 딸들에게 더 잘하곤 했다. 모든 딸이 내 어린 시절 같았고, 모든 아들에게도 내 어린 시절이 보였다. 무엇보다 우리 엄마가 느껴졌다. 한 번도 엄마의 삶을 이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엄마가 되니 엄마가 보인다. 그 시절에 딸만 다섯이나 낳았던(싸질렀다고들 했다) 우리 엄마. 마지막 낳은 아들에게는 몸이 허약해져 젖도 제대로 못 먹이고 아들에게 젖도 못 먹이는 모진 엄마로 낙인찍혀야 했던 엄마, 시아버님이며 시 아주버님 밥상까지 배부른 만삭의 몸으로 몇 번씩 차리고 치우며 결국 아기를 낳을 때도 신음소리만 끙끙거리며 진통을 견뎌냈던 엄마..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그 지옥 같은 수치심들을 견뎠던 것이었을까. 

창욱이를 낳으러 병원으로 갈 때 엄마는 덤덤히 한 마디 했다.

“ 정애야~ 소리 많이 질러도 된다이~ 참지 말고 질러라~ 이 앙 물지 말고 소리 질르라이~참지마라이~”

하얀 천 조각을 몇 개 모아 엮은 정체 모를 손수건을 돌돌 말아 손에 쥐어주며 이 상하면 늙어 고생한다고 손에 쥐어주고 날 들여보냈다. 건강한 이로 고기도 여태 신나게 뜯을 수 있고 껌이며 사탕이며 걱정 없이 먹어댈 수 있는 건 손수건을 말아 쥐어줬던 우리 엄마 덕이다. 다 엄마 덕이었던 것이다. 창욱이가 태어나고 정확히 3년 뒤 엄마는 돌아가셨다. 위에 암이 번졌었단다. 그때까지 엄마에게 좋은 약 한번 내밀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의 위가 곪고 터지고 손 쓸 수 없게 될 때까지 난 그렇게 나 하나 살기 위해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렸다. 내 가족, 창욱이와 남편만을 위해.

아빠도 떠났고 엄마도 아빠를 따라갔다. 언니 동생들도 있었지만 자주 보지 않으니 가족 같은 느낌이 왠지 덜 했고 중심이 무너지니 우리끼리 더 돈독해질 것도 같았지만 중심의 힘은 이토록 대단한 것이었다. 엄마아빠가 우리들을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누군가 하나 희생하고 늘 세심히 신경 쓰면서 아우르지 않는다면 절대 예전과 같은 가족의 향기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그 누군가가 되어야겠다. 상처 준 빚을 갚아야겠다. 내가 이 집안의 엄마가 되어야겠다...’

집안의 대소사에 늘 앞장서 돈을 냈다. 마음도 중요하지만 때론 마음보다 돈이 먼저일 때도 있는 법이니까. 입에 풀칠이 되어야 인심이라는 것도 생기고 끼니마다 배가 불러야 삶은 이어지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렇게 먹는 인간으로서의 삶의 소명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엄마의 위암은 분명 나도 못된 딸년으로서 한몫했을 것이라고 무작정 결론짓고 엄마가 내어줬던 맛은 아니지만 엄마처럼 요리를 해서 해 날랐고 엄마처럼 건강을 신경 썼고 엄마처럼 없는 돈을 돌돌 말아 가족들 주머니에 넣어줬다. 내 아들은 두 명의 엄마로 살고 있는 정애라는 사람과 함께 생각보다 의연하게, 예상보다 더 건강하게 잘 자라났다. 

이건 내 아이가 아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엄마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이었으리라.          

#22, 44

4라는 숫자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죽어도 4자는 싫다. 밥 먹으러 들어가 앉은 테이블 번호에 4자가 있어도 자리를 옮긴다. 전화번호에 4자가 있는 사람에게는 전화도 걸기 싫다. 그냥 안 걸고 만다. 신도 믿지 않는 이 굳센 정애가 숫자 4에 무너졌다.

40이 되면서 여기저기 몸이 아팠다. 닥치지 않고 일을 했고 일을 하려면 아이를 업고 해야 했기에 등이며 허리가 남들보다 많이 상한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 일을 많이 해 손가락 관절 부위가 붓고 구부러지면 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식당일을 하면서 그 손을 눈치챌까 안 보이게 몸을 돌려 스스로 펴주길 몇 십 번.. 잠을 잘 때는 관절이 마비된 사람처럼 펴지지 않는 주먹손으로 아이를 재우고 책을 읽히고 숙제도 봐주고 그랬다. 40이 되니 신체 곳곳이 나에게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쯧쯧.. 내가 너 이리될 줄 알았다 바보 등신아.’ 몸이 아파도 나이가 젊으니 참았고 몸이 고장 나도 병원비가 아까워 한 푼이라도 더 모아 두려는 심산으로 마음을 굳혔던 시간들이 이렇게 삐걱거리며 대놓고 나를 조롱하는 것이다. 

장성한 창욱이는 속 한 번 썩이지 않던 착한 아들 우리 창욱이는 그렇게 자기 말 안 듣고 일하며 돈 버는 엄마를 위해 자기도 보태겠다고 오토바이를 탔다. 그놈의 배달 오토바이는 창욱이가 짬을 내서 늦은 시간 할 수 있는 세 번째 아르바이트였다. 과외며 가게 알바며 다 마치고 늦은 저녁 누군가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빠르게 움직여 몇 푼을 벌었다. 그렇게 창욱이는 내달렸을 테다. 

“엄마, 엄마! 올해 나이가 정확히 몇이지?”

“ 43?”

“ 아~~~ 나이 좀 속이지 마라 엄마 44 거든? 아~~~ 44 이런 숫자 딱 싫어. 엄만 안 그래? 엄마, 우리 44 생일은 건너뛰고 43살 생일 한 번 더 할까? 아님 바로 넘어갈래? 45살로?”

“ 아이고~~ 그냥 해주는 김에 30살로 해줘라 나 이번엔 초 3개만 꽂으련다~ 어딜 봐서 내가 44살이니? 일을 그렇게 해도 안 보이는 뼈 나이나 휘청거리지 아직 얼굴은 꽃다워 네 엄마.”

“그래 우리 엄마 꽃이다 꽃. 어디 보자 우리 엄마 점박이 꽃 좀 봐보자~~~ 엄마!! 12시 되기 전에 우리 케이크는 하자!! 일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갈게. 오늘은 생일이니까 일 좀 얇실하게 해~”

창욱이는 내 얼굴에 낀 자잘한 기미들을 보고 점박이 ‘꽃’이라고 불렀다. 점박이가 아니라 ‘꽃’이라 기분이 좋았다. 아들에게 뭐든 꽃이라고 불려지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남편에게도 못 들어본 꽃이라는 음성을 우리 아들에게 들었으니 난 얼마나 복 받은 여자인가.

남편이 바람을 피우든 집에 잘 들어오지 않든 돈을 어디다 혼자 굴려먹든 난 개의치 않을 수 있었다. 날 꽃이라고 불러주는 창욱이가 있었으니까. 생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서져라 일을 해도 괜찮았다.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삶이 익숙해졌고 그래야만 하루가 굴러갔고 또 나에게는 날 응원해 주는 창욱이가 있었으니까.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려 받지 않았다. 연속해서 세 번이 더 오길래 뭔 일인가 싶어 나갔더니 모르는 번호다. 다시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드님이 임창욱 씨 맞느냐고 묻는다.

“무슨 일이에요?”

싸한 느낌이라는 게 사람의 근육을 얼마나 빨리 수축시키는가.. 몸속 내장들이 기능을 갑자기 상실하며 파업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헛기침을 수 십 번해야 겨우 목소리가 기어 나왔고 다리 근육은 이미 풀린 지 오래였다. 서있기가 힘들었다. 아직 아무 말도 듣지 못했는데..

“... 저.. 여기 병원인데요, 아드님이 지금 병원에...”

“ 왜요 어디가 뭔 일인데요! 다쳤어요? 얼마 나요!!!!!”

“...... 저.... 그러니까.... 아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우선 병원으로..”

기절했다. 4월 24일 10시 44분 44살 생일날 내 아들은 그렇게 날 떠나갔다. 사고로 온몸이 벌겋게 붓고 다치고 피가 난 아들의 휴대폰으로 문자하나가 도착해 반짝였다.          

예약하신 케이크 언제 찾아가실 수 있으신가요?

저희 문 닫을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연락이 없으셔서요.

44살이라고 하셨었죠? 초는 따로 넣어뒀어요~      

속 한번 썩이지 않던 착한 내 아들.. 이런 망할 내 아들... 내 아들은 22살, 내가 창욱이를 임신했던 그 청춘의 시간을 만끽해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갔다. 연애도.. 결혼도.. 뭐 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그 몇 푼 엄마에게 쥐어주는 낙이 삶의 전부인양 그렇게 갔다. 난 제정신일 수 없었고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해야만 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일했고 아픔을 잊기 위해 일했고 죽은 창욱이에게 죄스러워 일했고 몸을 움직여야만 내가 창욱이의 못다 한 삶도 연명해 주는 기분이 들어 1초도 쉴 수 없었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엄마는 몸을 부서지는 방법으로 남은 생을 연명하게 되는 것이었다. 엄마의 죽음과는 아빠의 죽음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아들의 죽음. 난 다시 태어났다. 더 억세고 더 강하고 더 독하고 더.... 더.......

굳센 정애는 숫자 4에 무너졌다. 4를 보면 창욱이가 떠오른다. 내 생일은 없다. 없어야 맞는 것이다. 난 이제 창욱이의 못다 한 생을 대신사는 대리인으로서 그리 살 것이다. 아들은 계속 살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난 일을.. 해야 한다. 우리 아들 창욱이가 보고 싶다. 일을 해야 한다. 몸을 혹사시켜야 한다. 그날 이후 나의 20년은 온전히 ‘일’을 위한 삶이었다. 남편 얼굴이 잊힐 만큼 난 일을 해야 했었으니까. 그래야만 했었으니까.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다른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래너희들은 그랬구나.

저녁까지 일을 하고 주말에 건물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몇 십 년 동안 여기저기서 이것저것 안 해본 것 없는 이 베테랑을 쉽게 모른척하기 어렵겠지.’ 일 잘하고 손 빠른 건 이 지역사람 다 아는 사실인데 나이 하나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잘 된 것이다. 

뼈가 아파 죽을 것 같아도 거긴 보이지 않는 곳이니 이리 일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 박정애 씨? 오셨어요? 잠시만요 오늘 잠시 들러달라고 부탁했죠? 서류가... 아 여기 있네요! 아.. 환갑이 한참 넘으신 분인데.......”

“나이가 얼굴로 보이요? 서류는 그냥 글씨 쪼가리지 일을 할 수 있냐 없냐가 나이 아니요? 다시 물어볼 거면 바쁜데 전화로 말한 나이 다시 물어 확인하려면 뭐 하러 사람을 불러 싸 불러 싸긴? 써보고 내쳐~ 일이라면 안 해본 게 없는 사람 앞에서 뭔 나이타령이여. 잔뼈 굵어서 젊은 사람 2명보다는 내가 더 잘할 거요! 어쩔 거야 그냥 나가?!”

“.... 아... 네.... 알죠.. 그럼요. 그렇죠 그럼.. 오늘부터 바로 해주실 수.. 있는..”

“ 됐고 화장실 위치나 정확히 불러 봐요. 어디 어디, 지금 바로 하면 되는가? 시간은 잘 지킬 것이고! 난 덜은 못해도 더는 혀! 일단 일주일만 지켜보고 다시 말을 하던가. 마음에 안 들면 일주일치 임금은 안 받을라니까 알겠소?!”

“아 네 네 네 네네네네네~~~~”

언제부터인가 내 말투는 이상해졌다. 분명 서울말을 쓰다 사투리를 쓰고 그러다 갑자기 어디서 주워들은 시장 통 할머니 말들도 섞어 쓰고.. 그만큼 내가 만나온 사람들이 많았었으리라 생각해 보지만 내가 들어도 내 말투는 할머니와 아줌마와 저기 산신령님의 말투가 뒤섞인 이상한 말투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밀고 가면 되는 사람이 있다. 나같이 말만 앞세우는 게 아니라 정말 말보다도 더 일을 잘해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무리 욕을 해대도 쉽게 내쳐내지 못하는 법이니까. 삶이 그렇다. 그래서 더 억척스러워지는 것이고.

그 건물에서 1년쯤 일을 했을 때 3개월 전부터 밤마다 화장실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남학생을 봤다. 키는 그리 크지 않은데 얼굴 여드름이며 표정과 눈깔이며.. 행동하는 분위기가 고등학생정도로 보였고 갑자기 잊으려 애쓰던 창욱이의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도 잘 붙이면서 매일 저녁 8시에 화장실에서 옷만 갈아입고 껄렁거리며 나오는 그 아이에게만큼은 말을 못 걸었다. 우리 창욱이가 살아왔나 싶어서. 엄마가 여태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걸 알면 속상할까 싶어서 곁눈질로만 봐왔던 것이다.

그 아이랑 처음 말을 섞게 된 건 그 아이가 떨어진 옷가지 때문이었다.

“ 어이~~ 저기 학생!! 학생!!”

대답 없이 눈빛으로 말을 하던 딱 고등학생 아들 짓이었다. 

“ 이거 떨어졌는데~~ 아구 어쩔까. 벌써 얼룩졌는가? 어쩔꼬”

“...... 고맙습니다.”

겉으로는 날 서보이고 눈빛은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제일 외롭고 가장 걱정 많은 어른과 아이, 그 어중간한 사이가 내 아들이 말하던 고등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눈빛으로 마음을 감추고 있다는 걸 난 알고 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자는 그런 눈빛이 보이는 법이다. 눈빛이 말을 해야 한다고 해야 할까..

“.... 그래, 학생 저녁은 먹었는가?”

“... 네? 네.”

“ 이거 받아 넣어~요 옆 건물 구내식당 쿠폰인디 나한테 너무 많아 다 못써~ 학생이 이거 다섯 장은 가져가 친구들이랑 같이 묵든지 혼자 묵든지. 그냥 주웠다 생각하고 써.”

“.. 어.. 엇.... 왜... 저한테 주세요, 이걸”

‘내 아들 같아서 그런다 이것아.’ 라고는 말하지 못하지. 암..

“말했잖아 이것아, 너무 많아서 다 못써. 늙은이가 너무 많이 먹어도 단명해. 오래 살라 하니까 어여어여 가지고 가라, 옷 단디 집어넣고. 곯지 않고 다녀야 되는 거야~”

“....... 고맙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같은 시간, 화장실에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는 그 학생은 나를 보며 인사한다. 눈빛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받은 나는 때때로 과일이며 내가 쓸 수 있는 식권을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굳이 기다려 내주기도 했다.  

“..... 저 그 식권 너무 감사했어요. 매일 화장실에서 옷만 갈아입고 나가는데 왜 안 물어보세요?”

“ 내가 뭐라고 물어봐? 사람 사는 게 다 사정이 있겠지. 옷은 갈아입을게 넉넉히 있는 것이고?”

“ 매일 빨아서 가지고 가서 하루 기다리면 마르긴 해요. 화장실 문 열려있는 곳이 여기뿐이에요. 그 시간에 여기 건물에 사람도 좀 없고.. 집을 나온다고 나왔는데 아무도 절 찾지 않아서 버틸 만큼 버티는 중이에요 사실.”

왜 안 찾겠나... 기다리는 것 일거다. 충분히 시간을 내어주고 속상함을 기어이 감추고 애써 참으며 아들을 기다리고 있을게 뻔했다. 

“ 집에서 아빠엄마가 때리디??”

“.. 아... 그런 건 아니에요.”

“ 그래 학대당할 나이도 아니고 그런 거 아니면 어서 들어가~ 아무리 그래도 집처럼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

“근데 이상한 게 다른 것 보다 밥 먹을 때 집 생각이 가장 많이 나요. 주신 식권으로 밥 먹는데 갑자기 엄마 밥이 생각났어요.”

“ 당연한 거야 이상한 게 아니라 끼니랑 끼니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있는지 배워 들어가겠고만 잘 됐다 야~ 하나라도 뭔가 느꼈으면 된 거야. 누구든 뭐로 인해 하나는 배우는 법이더라고. 어서 들어가 엄마한테 된장찌개 끓여달라고 해 이놈아.”

“........ 감사했습니다.”

‘감사합니다.’가 ‘감사했습니다.’로 바뀌었다. 연륜으로 느낌이 왔다. 이제 저 녀석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들을 잠시 추억할 수 있게 아들놈 창욱이가 저런 선물을 또 보내 준거다. 이 망할 자식... 된장찌개를 참 좋아했었던 내 아들 창욱이.

건물에는 학원이며, 병원, 카페까지 있어 유동인구가 상당하다. 그런데 몇 년을 일하다 보니 늘 보이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과는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하게 됐다는 거다. 이 수많은 사람 중에는 대걸레를 잡고 씩씩거리며 신들린 듯 청소하는 나에게 먼저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는 그런 인간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리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가 나왔다. 내 이름처럼, 사랑을 받는 기분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내 이름을 다시 곱씹었다. 내였다. 물론 술을 오지게도 쳐 먹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며 화장실을 들어가 조준 실패하는 양반들도 수두룩했고, 엉덩이가 다 보이는 옷을 입고 담배를 피워대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그럴 땐 술 작작 쳐 먹으라고 잔소리도 해대고 건강 챙기며 펴대라고 지지도 해준다. 나 때도 나름의 일탈이란 게 당연했었는데 지금이라고 하고 싶은 거 안 하며 참는 애들이 얼마나 되겠으며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할 의무가 나에게 과연 있나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내 옛날을 문들 떠올리기도 하고 막 나가던 나의 20대를 떠오르면 가족과 아픔, 아들이 자동반사적으로 그려져 힘들었다. 또 그런 추억놀음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이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은 일탈하는 모두가 나 같이 보여 모조리 응원하고 있나 보다. 

‘장하다 잘한다. 더 펴라, 더 마셔라 그래 그럴 수 있는 거다. 장하다 이것들아.’

매일 패스트푸드를 급하게 먹어치우고 도살장 끌려가는 표정으로 학원을 가는 남학생이 인사를 해줬고, 또각또각 용케도 잘 걷는 병원 간호사가 그리 인사를 잘해줬다. 엘리베이터가 망가질 때마다 늘 오는 22살, 딱 창욱이 정도로 보이던 그 기사청년도 활짝 웃으며 시원스럽게 인사를 해주는데 그런 인사를 받으면 기분 좋고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킬까 싶어 더 찰 지게 욕도 해줬다.

“ 그래 이것들아. 안녕해서 오늘도 닦는다. 똥 싸고 손 닦고 나가 이것들아~”

저녁 8시쯤 늘 건물 밖에서 서성이는 수상한 남자는 대리운전을 하는 두 딸아이의 아빠였고 가끔 그 사람에게 사무실에서 박카스를 하나 쓱 가져와 내밀곤 했다. 그냥 내 아들 같아서 그랬다. 모두 다 내 아들이 못다 한 삶을 소분해 살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름이 뭐냐 아가?”

“저요? 민석이요. 황민석.”

“ 패스트푸드 그만 쳐 먹어라, 아가~이거 가지고 가서 먹고 학원가라 알았니?”

“간호사 선생 이름이 뭐요?”

“ 호호 안녕하세요. 최지연입니다.”

명찰을 살짝 보여주며 웃는 그 지연이에게도 한 장.. 엘리베이터 기사청년에게도 한 장.. 이렇게 내가 이 건물에서 일하면서 떳떳하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식당쿠폰이었다.

‘이렇게라도 엄마노릇을 이어가야지..’

식당쿠폰을 가지고 간 이 몇 명은 매일 눈이 마주치게 되는, 어쩌면 가족과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으므로 각자의 고민이 수시로 들통나기도 했다. 전화를 하며 상황이 노출됐고, 걸음걸이에서 감정이 드러났다. 나는 또 연륜으로 때려 맞춰 은근슬쩍 그들에게 다가가 대걸레를 밀기도 했고 더 멀리 떨어져 청소를 하기도 했다. 

‘너희들은 그런 거였구나. 괜찮다 아가들아. 원래 그럴 수도 있는 법이여. 그럴 수 있는 거야.’          

#일만하는 여자

생각해 보면 엄마가 돌아가신 뒤 50년 가까이 일을 했다. 50년이란 세월을 말로 표현하기는 애매하지만 내 얼굴 형태가 무수히 많이 바뀐 시간적인 흐름이었고 내 키가 3센티미터 줄어든 힘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나 하나일리 없겠지만 50년 동안 24시간을 일만 하며 지낸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지 한 번 알아보고 싶기는 했다. 

창욱이가 어릴 때 아이를 작은 상 앞에다 앉혀놓고 일하다 정신없이 시간을 확인하고 밥때가 지나 밥을 차려 올려놓았다. 그때 그 어린 9살 아가가 나에게 물었다.

“ 엄마, 엄마는 왜 앉질 않아? 난 엄마 보면 목 아파.”

창욱이는 업혀서 안 보이는 엄마 얼굴을 보고 싶어 목을 빼며 컸고, 앉아서 등만 보이는 어미를 올려다보며 자랐다. 난 창욱이 얼굴을 매일 자주 본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에게는 늘 부족하고 굶주린 엄마 얼굴, 엄마냄새였을 것이다. 일만 하는 여자는 팔자가 일만 하게 된다고 엄마가 그랬었다. 잘해도 못하는 척해야 안 하게 되는 거라며 넌 공부도 시켜놨으니 주방 일 말고 공부하며 하고 싶은 일도 찾고 신여성처럼 살아가라고 유언처럼 말했었다. 그리고 주방일 애쓰지 말라고 유언하며 돌아가셨다. 하지만 난 어쩔 수 없이 일을 했다. 생활비를 보태야만 했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우아 떨며 고고하게 앉아만 있는다고 100원 하나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현실에서 뼈저리게 느꼈을 뿐이다. 팔자가 팔자를 만든 것인가. 그 눈물점이 또 한 번 동한 것인가. 

일을 하면서 돈을 만졌지만 창욱이 눈에서는 눈물이 잦았고 난 몸에 인이 박혀 일을 안 하면 몸이 쑤시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하루 쉬면 몸이 뻐근해서 못 견딘다고 하던데 이런 젠장 할, 나는 일하는 게 운동처럼 느껴졌으니 이건 하루도 거르지 못하는 일상이 된 것이다. 어쩌겠는가. 올곧은 정애는 또 고집스럽게 그리 시간을 보냈었을 수밖에. 주변 이웃이나 간간이 연락이 닿는 동창들 중에도 억척스럽게 일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일을 한다 싶으면 이혼을 했거나 아니면 남편이 시원치 않거나 해서 어쩔 수없이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거라고 다들 수군거렸다. 이웃에게는 어쩔 수 없이 보여지는 생활이지만 동창에게 굳이 내 일들을 나열하고 싶지는 않아 나는 ‘나는 아닌 척’ 고개를 같이 끄덕였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여자가 나가서 일하는 건 억척스러운 것이고, 집안에서 동동거리며 밥하고 걸레질하고 빨래하는 건 고고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곱게 살다 죽으면 뭐 그렇게 좋은 것인가. 쓰라고 있는 몸, 부서질 정도로 애쓰며 사는 게 뭐 그리 억척스럽다고만 할 일인가. 상황이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노동력이 동반된다는 것은 참으로 애잔하고 위로받아야 할 일인데 가타부타 타인의 노동을 평가하는 모질이들이 여기저기 산발해 있다는 것이 참 웃겼다. 

‘남편의 승진이 뭐.. 아들의 대기업 취업이 뭐.. 그것이 뭐?’

나 정애는, 아들보다도 남편보다도 내 몸으로 뭔가를 하는 그런 독한 년이다. 그래! 올곧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난 박정애니까. 

처음에는 사실 빚 갚는 심정으로 일하며 돈을 가져다 바쳤다. 언니들에게 동생들에게. 나도 사람인지라 받는 게 당연해지는 남 같은 가족의 야박함에 질려버릴 때도 있었고 그래서 합리화를 시키며 나 살길 바쁘단 핑계를 대며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래도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무언의 의지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다시 내 위치로 회귀했다. 그런 복잡한 내 마음을 창욱이는 알았었나 보다. 장학금 주는 대학가겠다고 그 좋은 대학들을 죄다 포기했고 빨리 돈을 벌겠다고 취업준비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에 매달렸으니.. 어쩌면 내 아들 팔자를 내가 조정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창욱아. 

“ 어이~ 여기 국밥 하나요!”

“ 이모님~ 이거 얼마예요?”

“ 아줌마 여기 닦아주세요.”

“ 할머니! 지금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 박정애 씨~ 여기 여기 시급이요.”


부르자마자 총알처럼 몸을 움직이는 걸 창욱이는 싫어했고 몸을 좀 느긋하게 내버려 두라고 잔소리를 했다. 빠른 건 내가 해보겠다고. 그래서 오토바이를 선택했었나 보다 그놈이.

느긋해지려고도 해 봤지 안 해봤겠는가. 한길만 죽어라 판 놈은 다른 길이 있는지도 모르는 법인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 배웠다고 배운 공부를 깊이 팠으면 아마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아버지의 죽음은 변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분명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었을 것이었다. 난 박정애니까. 아들도 그런 엄마를 알았을 게다. 그러니 잔소리를 하면서도 파스며 영양제며 수시로 챙겨 붙여주고 넣어줬겠지. 무심한 아빠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더 잘하겠다고, 남편 몫이며 아들 몫 다 해냈었던 것이겠지. 일만 하는 엄마도 여자였단다. 일이란 걸 모르던 순박한 처녀였단다. 땅따먹기 하고 고무줄놀이하며 엄마가 해주는 따순밥 자기 입으로만 욱여넣는 그런 철딱서니 없던 아이 었단다. 엄마가 되어봐야 아는 것들이라 우리 아들, 창욱이는 알기 힘든 것들일 수 있었겠지만 딸을 하나 낳았더라면 그 감정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서 보여주고 싶었다. 엄마도 이렇게 하고 싶어서 일만 하게 된 건 아니라고.. 그러니 엄마 팔자 측은하다고 그리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 달라고 딸에게 말했을 것이다.            

#일해야사는 여자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법이다. 각자의 이유대로 각자의 상황에 맞게.

난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여자다. 그렇게 태어난 여자. 몸이 부서져라 일해야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감각이 타고난 사람. 그래서 그렇게 고생스러운 일을 50년 넘게 해내도 죽을 듯 다시 살아나고 죽을 듯 살아나며 들풀처럼 억세 졌다. 그 억센 사람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내가 강하고 억세게 올곧게 살아가겠다는데 어느 누가 나에게 감히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식당일은 고귀한 일이었다. 화장실 청소는 아름다운 일이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은 따듯한 일이었다. 아이 돌보는 일은 눈물 나게 행복한 일이었다. 폐지 줍고 빈병모아 돈 모으는 일은 얼마나 겸허한 일인지 당신네들이 알기는 하는가. 

모든 일은 다 귀한 일이었다. 묻고 싶다. 거의 다 사라져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은 전통시장 앞에서 자리를 차고앉아 손톱에 까만 흙을 가득 달고 쪽파를 다듬는 내가 우스워들 보이는지. 진정으로 그 모습이 짠하기만 하고 우스워만 보이는지. 한 바구니 가득 쌓인 달래를 팔면서 만원을 받고 구천 원을 내어주는 내가 한심해 보이냐고 묻고 싶다. 

그러지들 말게나. 그렇게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말게들. 난 굳센 것뿐이라네. 

나는 단지, 나라는 사람 박정애는 이렇게 일을 하고 내 몸뚱이 힘들어야 숨 쉴 수 있는 그런 독한 사람이라네. 뭔가 사연이 있어야만 일하는 건 아니라네, 양반들아. 

마음에 열정으로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일을 하며 고되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나도 처음엔 내가 왜 이리 등신 같이만 살다 인생 막바지까지 왔나 눈물이 터질 때 있었지. 왜 없었겠나. 아이 업고 일을 하며 온갖 수모 다 당해도, 남편이 벌어오는 많지 않은 돈으로도 살 수는 있었는데도 이 빚 갚는 심정으로 일을 하다 보니 정말 우리 집 빚도 갚고 있더라고. 빚을 갚으니 일이 손에 익더라고. 손에 일이 익으니 또 다른 일을 찾고 있더라고 내가. 밖에서 일을 했으니 집에서는 좀 쉬려나 해도 나에게 주어진 수많은 일을 멈출 수 없었다네. 난 엄마 아니던가. 그래서 계속 일을 했다네. 일을 해야만 살 수 있었다네. 

올해 84살 내 생일은 4가 들어가서 그냥 생수 한잔 들이켜고 넘어가려고. 내년엔 남편에게 미역국 한 번 끓여달라고 해봐야지. 60년 동안 안 끓여준 미역국을 이제 살 날 얼마 안 남았다고 이실직고하면 끓여 줄까. 미역국 한 그릇 안 먹고 가면 뭐 어떤가. 우리 창욱이 몫까지 열심히 일하다 가는 건데. 떳떳하게 가는 건데. 

아들이 왜 이리 일만 하다 왔냐고 울어재끼면 엄마가 행복해서 그런 거라고, 그래야만 했다고 그때 말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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