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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2]

5-10화 [종결]


5.

한바탕 시끄러운 소동이 있었다. 누구랑 대거리하는 거랑은 거리가 먼 복희여사님이 단단히 화가 났다. 경신은 인터폰을 듣고 부리나케 4층으로 올라갔다.

" 무슨 일이세요. 아고 아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

한 여자는 복희 씨의 머리채를 잡고 놓을 생각이 없었다.

" 아저씨 저희 엄마 좀 어떻게... "

인터폰을 한 406호 딸은 민망함에 눈물을 흘리며 경신에게 부탁했고 복희 씨는 체념한 듯 ”그래 나 죽여라 나 죽여 망할 것아 “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청소하는 년 주제에 이래라저래라 훈계질이야. 한 번만 내가 더 그딴 얘기하면 가만히 안 둔다고 했어 안 했어. 돼먹지 못한 년이 남의 딸한테 지랄도 분수가 있지. "

406호 딸이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건 한 달 전 즈음이었다. 한 달 전 저녁에 경찰차까지 출동해 4층에는 어쩔 수없이 상황이 노출됐고 당직이던 경신도 상황을 알게 됐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해소동. 손목을 커다란 수건으로 동여 묶고 구급대원과 함께 들것에 실려 나가는 딸의 얼굴빛은 이미 세상을 등진 표정이었다. 문득 경신은 철호가 떠올랐다. 마지막 소주 한 잔을 함께하던 그 표정..

" 아고 아주머니. 그렇다고 사람 머리채를 이렇게... "

" 아니 아저씨 상황을 앞뒤 따져보고 뭐라 마라 해야죠. 지금 이 여편네 때문에 얼마나 제가 황당한지 알아요? "

"아니 무슨 일... "

"아저씨 별거 아녜요. 엄마 좀 그만해 이제. "

"넌 빨리 들어가. 이런 여자랑은 한 마디도 섞지 마. 그지 같은 년. "

몸이 접힌 박스처럼 90도나 접힌 것 같은 복희. 더 작고 더 구겨진 모습을 보니 복희의 인생까지 구겨지는 느낌이 들어 경신은 힘으로 406호 주민을 제압했다.

"놓으세요!! "

" 아니 이 아저씨 봐! 어디서 손을 잡아요? 성추행으로 신고당하고 싶어?!!! "

말로 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경신은 알고 있다. 이 사람과는 어떤 논리로도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구렁텅이에 빠져있는 복희 씨를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지 같은 년의 그지 같은 인생이지. 참 맞는 말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알려줘서. 그지 같은 년이 이렇게 청소도 해주고, 복도도 쓸어주고, 따님에게 인생 조언도 해주는데 뭘 그렇게 화가 치밀어 욕지거리를 하고 손찌검까지 하는지..

잘 생각해 보시오. 누가 정말 그지 같은 인생인지. 난지 그쪽인지. "

"뭐?!!!!! "

경신은 재빨리 복희 씨를 복도 계단으로 밀어 내려가라고 손짓했다.

" 이러다 경찰 옵니다. 소음 신고 들어가요. 얼굴 한 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하면 나중에 서로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십니까. "

"내가 저년 다신 일 못하게 해 두고 봐! "

문을 쾅 닫고 들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표정은 말 그대로 소나기가 내리기 직전 하늘 같았다.

"죄송해요 "

"아녜요. 죄송은요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요. "

"이모님이.. 가끔 저 괜찮나 물어보시곤 했거든요. 엄마가 싫어하세요. 자꾸 그때 일 기억하게 하는 거라고. 왜 남의 인생에 안 좋은 기억 떠올리게 만드냐고... 오늘 복도 물청소가 있는데 밖에 짐이 나와 있어서.. 벨을 누르셨어요. 아무도 없어서 제가 나갔고..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고.. 몸이 최고라고 이런저런 말해주시면서 손목을 한 번 만지시더라고요.. 그때 엄마가 오시면서 보고.... "

" 나쁜 뜻은 아니란 거 아가씨도 다 알죠? "

” 네... 그럼요.. 이모님 따님이 저랑 같이 손목에... 상처를 내고... 결국 잘못됐다고 하셨어요. 절 보면 딸 생각이 나서 마음이 먹먹하고 도와주고 싶다고... 엄만 아직 그 얘기 모르고요.. “

"하..... "

경신은 복실이 왜 딸 이야기를 할 때 그런 표정이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떠났지만 떠나보낼 수 없는 딸이라 복희는 그 얘기를 멈출 수도 없었고,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리움이 사무쳐 표정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아무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어떤 하찮은 일도 ‘아무’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에.

1층에서 연결된 계단을 반 층 내려가면 복희의 쉼터 지하방이 나온다. 지하 방이라기보다 복도의 여분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복희는 휴대폰으로 유튜브도 보고 때론 믹스 커피도 마셨다. 잘 빨아 널어놓은 목장갑과 낡은 티셔츠는 눅눅한 냄새를 머금고 바짝 마르는 일이 없었다. 경신의 아내는 집에서 놀고 있는 작은 제습기 하나를 경신을 통해 보냈다. 경신은 다른 사람의 삶을 내 삶처럼 보듬으려 애쓰는 아내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감사했다.

"손이 그리 망가져서 어떻게. "

언젠가 경실은 경신에게 복희의 손을 말한 적이 있다. 작은 키에 비해 유난히 큰 손은 복희가 얼마나 많은 일에 단련됐는지 알 수 있었다. 왼손 관절 하나가 유난히 툭 튀어나와 멀리서 보면 육손인 것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넘어져 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하게 다쳤는데 제때 병원을 가지 않아 손이 휘면서 저리 됐다는 것을 듣게 됐다. 경신의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경실의 눈에 보였다.

"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봤대? "

"여자는 가장 먼저 손을 봐. 손을 보면 그 사람 인생이 보여. 너무 사치스러워도 그렇지만 너무 망가져도 슬프지. 일하면서 나이 든 여자분 들의 손을 봐 얼마나 강하게 크고 불어나 있는지. "

" 허허 또 남자 여자 편을 가르시나. 남자 손도 그렇지. "

"행간의 의미를 파악하세요 할아버지. "

경신은 복희가 머리를 뜯긴 날 지하방으로 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경실과 드라마를 함께 보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냈고 경실은 눈물을 흘렸다.

"무심한 양반. 나쁜 인간. 모진 인간. 불쌍한.... "

경실이 드라마를 보며 내뱉는 말인지, 경신을 향해 내뱉는 말인지 알 수 없어 경실 쪽으로 얼굴을 돌렸고 경실은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한 채 울고 있었다.

다음 날 경신은 경실이 시키는 대로 작은 연고 하나와 과일을 챙겨 지하방에 놔두었다. 경실은 작은 메모를 남겼다.

세상이 참 징글징글하지요.

그래도 이리 맛있는 것들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406호는 수시로 청소하는 업체를 바꾸든 사람을 바꾸라고 소리를 질렀고 경신은 소음 때문에 나와 상황을 살피는 주민들에게 대신 죄송하다 사과를 해야 했다.

민원이 들어갔고, 경신은 복희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경찰관에게 사실을 전달했으며 경찰관은 406호 주민에게 소음민원이 더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했다. 그 일 이후 경신과 복희는 406호의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406호는 경신과 복희가 내연관계라는 소문을 퍼트렸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경실조차 웃고 넘어갈 소리였다. 딸을 잃은 한 맺힌 엄마와, 자신의 일터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에게 ‘불륜’이란 단어는 ‘내연관계’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복희는 대거리를 하다 난 상처에 뽀로로 대일밴드를 붙이고 또다시 노래를 흥얼거리며 호스를 이고 올랐다. 4층은 더 박박 문질렀다. 딸과 마주하면 여전히 햇빛이 좋으니 산책을 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레모나 한 포를 건네주기도 했다.

딸은 그런 복희 이모에게 다시 딸을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이렇게 딸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돌아올 수만 있다면 제발 곁으로 다시 와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세상과 등질 뻔하고 다시 어수선한 세상으로 돌아온 딸은 아무리 혼란스럽고 어지러워도 눈감은 고요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이 이제야, 이제야 든 것이다. 경신은 딸의 눈빛에서 달라진 활기를 느꼈다. 경신을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을 놓쳐봤던 사람이기에 이제는 영민하게 그 눈빛을 잡아낼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

경신의 인사에 ” 안녕하세요 “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으니 이제 한 청춘의 인생은 시들지 않을 것이다. 아니, 시들 수 없을 것이다. 마음으로 응원하고, 온 힘 다해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이렇게나 많으니.. 경신은 생각했다.

"사장님, 사모님께 고맙다고 꼭 전해주세요. 제가 보답할 게 이것뿐이라... "

복희는 박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서로 이해하고, 보듬고 하는 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날 일은 너무 마음에 담지 마세요. "

" 제가 너무 오지랖을... 딸이 생각나 그냥 지나쳐도 되는 걸 이리... "

"딸 마냥 생각해 주는 마음 누가 모를까요. 그 학생도 알고 있을 거예요. 저도 이제 406호 공공의 적이 됐으니 동지도 있고 한결 든든하시죠?! "

"이래저래 고맙습니다... "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고맙다는 말이 더 듣기 좋은 법이다.


6.

참으로 신기하다. 소문이란 것이 아니, 인간의 호기심이라는 것이, 아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경신은 대기업에 다니며 억대 연봉을 받던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소문의 근원지는 늘 정확히 알 수 없다. 떠도는 먼지처럼 어딘가에 무심히 내려앉아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뿌리를 내리는 법이니까. 복희는 이혼을 한 여자로, 경신은 대기업을 다니는 억대연봉인데 취미 삼아 일하는 사람으로, 옆 라인 심정호 경비원은 교수직을 그만 둔지 얼마 되지 않아 교수말투가 아직 남아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집에 들어가는 길, 아직 일하고 있을 경신을 만나러 들른 날 연신이 건넨 음료수 한 캔 때문에 경신의 딸이 **그룹 영업사원이었다고 말이 돌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분리수거를 하면서 주민과 대화하는 것이 와전돼 경신의 아들은 어디 한쪽에 안착하지 못하는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혀버리기도 했다. 소문이란 무섭고도 치밀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삽시간에 사실로 둔갑시켰다. 경신은 세상사람 참 신기하고만 하고 넘어갔다. 복희와 경신의 사이가 내연관계라는 소문이 났을 때처럼.

생각해 보니 어디에서든 늘 작고 큰 소문들이 존재했다. 경실은 드라마를 보다가 늘

"김하나가 그 누구야... 그 머리숱 많은...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난다면서 "

" 일하다 들으니 마트 직원 몸이 안 좋은지 암 인가 봐. " 같은 말들을 하곤 했다.

경신이 그 머리숱 많은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나는 그다음은 뭐냐고 물으면 경실은 나도 그냥 오며 가며 들은 거라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다.

몸이 안 좋아 병가를 내면 코로나는 암으로 와전되는 것이 이상한 세상이다. 정확하지 않은 말들이 오며 가며 단단해지고 어디선가 기정사실화되면 누군가는 고군분투하며 사실이 아닌 것을 설명하려 애쓰게 되겠지. 경신은 생각했다. 철호에 대한 숱한 소문들. 내부 비리를 기자에게 제보 한 이후 철호는 줄곧 사실이 아닌 일들로 시달려야 했다. 회사에 문제가 생기면 모두 철호에게 화살이 돌아갔고 그때마다 철호에게 이 분위기에서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냐고 몰아세웠다. 예전부터 그랬다. 철호는 늘 고통이 더 많은 쪽을 향해 걸었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갖춰져도 늘 철호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타인의 고통에 힘을 실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주 드문 사람.

" 그만큼의 연봉을 받고 정부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일한다는 사람들이 적어도 양심은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 경신아. 나보다 더 잘 난 저 많은 사람들 그래 모두 선망의 대상이지. 알아 나도. 그런데 모두 존경받을 사람들은 못 된다는 걸 내가 아는 이상 어떻게 눈 감고 귀 닫고 얼음처럼 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나도 날 참 모르겠다 경신아. 아무리 권력이 두려워도 맞설 수 있을 정도의 깡다구는 있으니 걱정 말아. "

철호는 다양한 언론사에 내부 비리를 고발했지만 단 한 언론사만 철호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을 뿐이었다. 작은 언론사는 철호의 자료를 연신 수면 위로 드러내며 안간힘을 썼지만 잠시 떠있다 다시 가라앉고, 뜨고 가라앉고 가 수백 번 반복되며 서서히 잊혀가는 것 같았다. 작은 언론사의 힘보다 다른 쪽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했으니까. 하지만 다가오는 권력에도 굴하지 않은 박영혼 기자가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꼬르륵 거리며 물속으로 가라앉으려고 하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옆에서 온갖 방해공작을 하면서 그를 다시 물아래로 밀어 쳐 넣어도 악다구리를 부리며 콧구멍을 물 위로 내밀었다. 공기업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로비사건, 청탁과 정부인사의 연결고리는 영혼까지 갈아 넣어 철호의 이야기에 귀 기울 여준 박영혼 기자 덕분에 간신히, 아주 간신히 잊혀지지 않은 것이다. 진실을 향한 절규와 몸부림에 사람들의 마음과 눈길이 그쪽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철저한 무시가 아닌 작은 틈으로도 빛이 들어와 새싹을 틔울 수 있다는 희망.

경신은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철거농성에 참여한 적이 있다. 친구의 소개로 2번만 한다는 조건이었고, 일당이 두둑해서 솔깃했던 일이었다. 한 건당 10만 원을 받을 수 있으니 당시 경신에게 그 돈은 큰돈이었고 설명을 들어보면 무더기로 서 있다가 겁을 주거나 소리를 조금 지르면 된다고 하니 일 같지도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건설사가 이득을 챙기고, 용역업체는 얼굴을 숨긴 채 뒤로 빠진 그 상황에서 순진하고 돈이 필요한 대학생들만이 전면에서 ‘용역깡패’라는 말을 달고 앞장서는 상황이란 걸 하루 만에 알 수 있었다. 경신은 경찰과 용역업체의 긴밀한 거래현장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봤지만 못 본 척, 알지만 모른 척했다. 철거민이 죽은 그날, 업체 사람들은 20살에서 21살 되는 학생들을 향해 너희들은 살인자 새끼들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거주자들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 대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한 순간에 그들은 아르바이트생에서 살인자가 됐고 그 무명(無明)의 누명이 두려워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야반도주하듯 도망갔다. 그 대학생들 중 한 명에 경신도 포함된다. 경신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한쪽 눈을 간신히 뜬 채로 가족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말하던 한 아저씨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의 나이가 훌쩍 넘은 경신은 가끔 그들의 가족은 온전한지 궁금하고 미안하다. 살인을 하지 않았지만 도망치며 암묵 한 죄는 여전히 존재하고, 친구의 죽음을 미처 알지 못했어도 상황을 막지 못한 죄로 죽을 때 편하게 눈은 감을 수 있을지 경신은 그게 참 궁금했다. 경신은 어느 순간부터 잘못된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이 철호를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가던 한 남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강한 대나무 같은 인간은 못되더라도 한 곳에 뿌리내리고 박아 휘청거리면서도 잘 버텨내고 있는 들풀 같은 사람은 되자. 딱 버티고 서서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은 되자고 경신은 생각했다.

"인간들 정말. "

엘리베이터 옆 홍보 용지를 바꿔 끼우고 있는 경신의 뒤에서 한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일찍 오셨네요? "

화요일 목요일에 오는 대박통운 택배기사였다. 송길영. 경신은 길영에게 경비실 작은 냉장고 안에서 박카스 한 병씩을 건네주곤 했다. 택배를 나르는 일은 고단한 일이었다. 세상 고단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경신은 늘 수건을 목에 두르고 시간에 쫓기며 뛰어다니는 길영이 대단해 보였다. 길영은 경신과 비슷한 연배였다.

박카스를 받고 꾸벅 고맙다고 말하는 길영은 경신으로 경비원이 새로 바뀐 날

잘 부탁드린다며 작은 초코파이 한 봉지를 건넸다. 경신은 정말 정(情)을 나눈 사이라고 웃었고 이 초코파이가 군인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로 시작해 돈 없을 때 케이크 대신 초코파이 한 봉지 사서 위에 초 꽂아 불을 껐다는 이야기를 거쳐 요새 건강이 안 좋아 약 먹으면서 이런 달달한 것들도 주기적으로 먹어야 할 때가 있다는 말까지 닿았다. 경신은 길영이 저혈당 당뇨일 것이라 내심 추측했고 그의 건강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살피게 됐다.

" 초콜릿은 여름이라 잘 녹으니 여기 주스랑 사탕 몇 개씩 가져가세요. 여기. "

괜찮다고 손을 젓는 길영에게 경신은 작은 봉지에 이것저것 담아 건네주었다. 경신은 저혈당 당뇨 쇼크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실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생긴 당뇨로 약을 먹긴 했지만 여름에 수분이 빠지고 입맛이 잘 돌지 않을 때 쇼크까지 이어질 수 있어 늘 걱정해야 했다. 치료를 받으면서 갑자기 위험한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까 불안해 주머니에 늘 달달한 사탕 한 두 개씩을 넣어두던 경신이었다. 초콜릿은 혈당을 잘 높여주지 못해 초콜릿보다는 단순당인 사탕이 낫다는 것도 경신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날 보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 길영에게 경신은 무슨 일이 있느냐며 물었다.

길영은 말도 거칠고 행동도 거친 사람들이 아파트마다 꼭 한 명씩은 있는 것 같다며 말을 시작했다.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니 길영의 얼굴이 말끔해졌다.

"거 있잖아요. 택배 박스 문 앞에 두지 말고 소화전 안에 넣어달라고 말하시는 분. 4층 그분 택배가 오늘 컸는데 문 앞에 두고 혹시나 해서 문자를 넣어 확인하라고 했더니 외출 중인데 이걸 어떻게 확인하라고 연락을 한 거냐고 물으면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물어보는 연락이 불쾌하다고 답이 온 거 아니겠습니까. 사진을 찍어서 배송 상태를 전달했더니 갑자기 다짜고짜 박스 왼쪽이 찌그러져있다고 안에 상품이 파손됐으면 100퍼센트 책임지라고 문자가 다시 왔죠. 다른 택배 배송 때문에 사진 남기고 출발합니다.라고 마지막 문자를 남겼더니 자기가 물어본 질문에 대답 안 하고 무시했다고 딱 기다리라는 말을 하면서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겁니다. 아 참 내가 살다 살다... 또 이런 사람은 처음 봅니다. "

경신은 4층이면 그 여자냐고 물어보려던 걸 참았다. 누군가 없을 때 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역시 좋은 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니까.

집에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으니 작은 택배는 늘 소화전에 넣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어렵지 않은 일이니 배려했던 부분이었다. 배려는 감사함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기도 해서 누군가는 ‘갑’으로 누군가는 ‘을’로 분위기를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사장님처럼 좋으신 분이 더 많기야 하지만 이렇게 한 번 문자로 감정 주고받다 보면 하루 진이 다 빠져버립니다. 아고 빨리 출발해야 오늘 저거 다 배송하겠어요. 사장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목요일 날 뵐게요. "

"그래요, 그래요 기분 너무 상하지 말고, 운전 조심하시고. 운전 전에 사탕 한 알 입에 넣고 가요. "

길영은 경신의 말에 뒤를 한 번 다시 쳐다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경신은 자신과 나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더 다부진 길영의 몸과 햇볕에 그을린 까만 피부가 꽤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5분 후 4층 주민은 어김없이 씩씩거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두 번 눌렀다.

"안녕하세요. 망가지겠어요. 엘리베이터, 한 번만 살짝 만져도 눌려집니다~~"

"아 정말 오늘 일수가 왜 이 모양이야? 아저씨! 택배 기사 갔어요? “

"택배기사님은 늘 바쁘시지요. 무슨 문제라도.. “

"택배기사 배정 못 바꿔요 아파트 내에서? “

"하... 참... 대통령도 쉽게 이래라저래라 못하는 세상에 사는데 어떻게 뭔 일만 터지면 혼자 화가 나서 이것도 바꿔라 저것도 바꿔라 하십니까. 이 아파트 세대주님 혼자 가지고 있는 것 아니시죠! 사사건건 얼굴 붉히면 서로에게 안 좋지 않겠어요. “

" 어머 어머, 이 아저씨 말 하는 것 좀 봐. 그럼 제가 뭐 없는 말 지어서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예요? "

" 그 말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각자의 영역은 보존해 주자는 말씀입니다. "

" 내가 정말 그때 청소하는 여편네 옆에서 거들 때부터 알아봤지. 여기 아파트 정말 구질구질해. 내가 빨리 이사를 가던지 해야지. 두고 봐 정말 청소도, 경비도, 택배도 내가 다 잘라 버리고 이사 가도 갈 거니까. "

" 네 그러십시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시는 방법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 "

" 아니 저양반이 진짜.. "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4층 주민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끝까지 소리를 지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경신은 이런 대거리를 하루에 수십 번 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상했다. 차라리 몸을 쓰는 일이 덜 힘들겠군. 경신은 생각했다.



7.

경비일은 단조롭고 규칙적이지만 생각보다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세심한 성격일수록 눈에 보이는 것들은 더 수두룩할 수밖에 없었다. 분리수거를 확인하며 박스에 택배 종이를 뜯는 일, 플라스틱의 포장 부분을 뜯는 일, 박스를 잘 펴서 한쪽에 눕혀놓는 일, 재활용 의류수거함 밖으로 튀어나온 옷들을 정리하는 것, 자전거에 주소가 잘 붙어있지 않는 것은 다시 확인해 연락을 돌리는 것, 날씨를 보고 복도에 카펫을 깔거나 일정한 시간 복도 불을 켜는 것 등등 인터폰이 울리지 않더라도 동네를 돌며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아파트 내에서도 손 갈 곳이 많았다.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라 계절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았다. 비가 오면 강한 바람과 비가 복도 안 까지 들이닥쳤고 눈이 오면 냉기 때문에 복도가 흥건해지다 얼어버리기 일쑤였다. 하나하나 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만 경신은 이 모든 일들을 자기의 본분처럼 해내는 사람이었고 덕분에 아파트 주민들은 경신을 참 좋아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느끼지 못한 또 다른 기분이었다. 누가 시키는 업무를 해내고 결과를 보고하는 일이 아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 해내는 시간과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스스로 느끼는 뿌듯함 같은 것들. 경신은 이런 시간을 통해 자신이 점점 능동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경실이다. 경실은 오랜만에 끝나는 시간이 같으니 저녁은 밖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들어가자고 말했다. 추어탕은 경실이 좋아하는 메뉴다. 어릴 적 미꾸라지를 직접 잡은 적도 있다는 경실은 빙어도 잘 먹고 산 미꾸라지도 잘 만지는 그런 여자였다. 경신이 간 추어탕을 시키면 경실은 우득우득 씹는 재미도 못 느끼는 재미없는 양반! 이라며 통 추어탕을 시켰고 가까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먹을 때 으드득하는 뼈 씹히는 소리를 들으면 경신은 경실이 내심 대단해 보였다.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 어머 어머 누가 좀 도와주세요. "

반찬을 담아 가져오던 종업원은 한 테이블로 급하게 뛰어갔다. 경신의 건너편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하던 노신사였다. 경신네 부부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노인은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명치가 답답한지 주먹으로 가슴 쪽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눈이 마주쳐 그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었다.

" 자동 심장 충격기!! "

경신은 건물 입구 근처에서 봤던 충격기가 떠올랐다. 식당 사장이 기계를 가져오는 동안 경신과 경실은 심폐소생술을 했다. 마트에 다니면서 주기적으로 받은 교육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보다 강한 힘으로 눌러 심장에 힘을 가했다. 경실은 축 쳐진 노인이 아빠처럼 느껴졌다. ‘제발.. 제발..’

경신은 자동 심장 충격기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우연히 쓰러진 중년여성을 발견한 날이었다. 경신은 퇴직 후 하루에 서 너 시간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었다. 모두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에 두꺼운 책을 읽는 경신의 모습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경신은 눈이 침침한 생각이 들면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한 번 쭉 훑어봤다. 책을 읽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과 어디쯤인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2호선 라인은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여기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곳이었다. 빙빙 돌고 돌며 하루가 아직 길고도 짧다고,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다 하고 나를 위해 ‘휴식’을 취한다는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그런 곳이었다. 2호선 대림역은 출퇴근 시간 사람이 많이 타고 내리는 곳이다. 환승역이 있는 곳은 구경거리가 생각보다 많았는데 복잡한 그 상황에 편하게 앉아 책 읽는 호사를 부리는 것이 내심 미안해 경신은 한가하다고 생각하는 1부터 4시 사이 지하철을 애용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내리고 탔다. 경신은 어디 역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경신은 30분에 한 번 즈음은 확인을 했다. 목도 뻐근하고 눈도 뻐근했기 때문이다. 또 시간이 한정 없이 흘러버려 삽시간에 100살이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중년 여성이 머리를 짚더니 작은 신음소리를 뱉으며 쓰러진 것은 그때였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6호 칸에는 경신을 포함해 열 명 남짓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신이 놀라 " 억! 함께 소리를 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 여자 곁으로 달려왔다. 한 여성은 두 손을 꽉 쥐고 심폐소생술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경신이 심폐소생술을 더듬더듬 떠올리며 하려고 하자 한 젊은 남자가

" 이거 잘못하면 성추행으로 신고당해요. 119에 그냥 신고하는 게... "

중년 여성은 호흡이 없었다. 몸이 축 늘어졌고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목격한 것처럼 심장이 쿵쿵댔다. 경신은 더 이상 지체하면 이 사람이 죽는다고 말했다. 신고 좀 해주시고, 자동 충격기 기계 있나 확인 좀 해주세요. 빨리해야 합니다.

경신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경신의 얼굴에 돌아가신 엄마의 얼굴, 죽은 철호의 얼굴, 부모님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의 죽음은 몇 백 년이 지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경신은 생각했다.

경신은 심폐소생술을 했다. 청년이 가져온 전기 충격기를 사용했다. 정확히 몰랐지만 재빠르게 사용서를 읽고 몸을 움직였다. 단 하나,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할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경신을 용감하게 했다. 다행히, 아주 다행히 여자는 2분 만에 정신을 차렸다. 여성은 멍한 표정으로 몸을 세운 뒤 부정확한 발음으로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를 반복적으로 말했다. 경신은 119 신고를 했으니 구급대원에게 그래도 몸 상황을 체크받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구급대원이 여자를 발견했을 때, 경신은 상황을 전달했다. 경신은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 성추행으로 오인받는 위험을 따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처음 그 부분을 생각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옳은 행동인가, 그 사람에게는 지나칠 수 있는 행동인가.

백만 번 다시 곱씹으며 생각해 봐도 경신은 자신에게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지금과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어떤 것도 생명보다는 중요한 것이 없기에. 경신의 행동은 달라질 게 없었다. 경신의 행동을 경실이 알게 된 것은 지하철 고객의 소리함에 누군가 제보를 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기사로 경신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도 있었는데 심폐소생술을 하는 경신의 뒷모습, 구급대원이 올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기사였다. 그날 사고를 함께 목격한 사람들 중 단 한 명만이 끝까지 경신 곁에 있었을 뿐 모두 각자의 갈 길로 쉽게 발길을 돌렸다. 신문기사 댓글에는 이 사람이 진정한 슈퍼맨이다, 나도 저 상황이면 저렇게 못할 듯, 나이가 늙었는데 힘이 센 듯 등...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그중 경신이 확인한 가장 인상적인 댓글은 바로 이것이었다.

누군가의 생명이 꺼지지 않고 다시 피어나는 것을 보니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슴을 함께 쓸어내렸습니다. 용기 있는 행동에 감사드립니다.

가족들은 경신의 이야기를 기사로 접하고 깜짝 놀랐다.

" 아니 여보 이런 일을 왜 얘기 안 하고.. "

" 뭘 대단한 일이라고. 나도 겁이 나서는 그날 청심환 사 먹었지. 살았으니 됐어. "

" 당신도 참.... 대단한 일 했네.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면.. "

" 그땐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겠어. 허둥대는 시간도 아껴야지. "

" 무서워. 마트에서도 요즘 심폐소생술 교육한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어렵 더만 힘도 많이 들어가고. "

" 왼쪽이 아니라 명치 쪽을 강하게 눌러야지. 두 팔깍지 끼고 직각으로 만든 다음에. "

" 난 심폐소생술은 심장을 누르는 거니까 왼쪽에 하는 줄 알았더니 심장이 왼쪽으로 살짝 치우친 것이지 누를 때는 가슴 한가운데 명치를 누르는 거라 하드만. "

" 그 상황 되면 원래 없던 힘도 생기는 거야. 죽어가는 사람 살리는 데는 하느님 부처님 모두 보여 하나가 되는 거야. 보이지 않는 힘들도 도와 살리려고. "

" 당신 멋있다. "

그리고 몇 년이 지나 그 일이 가물가물 희미해질 만할 때 즘 식당에서 다시 쓰러진 사람을 본 것이다. 경신은 말한 것처럼 지체하는 단 몇 초의 시간조차 아끼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치워진 테이블 아래 한 노인이 무표정하게 누워있었다.

경신은 소리쳤다.

" 아버지! 다 됐습니다!! 다 됐어요. 이제 눈 뜨면 됩니다. "

사람들은 두 손을 얼굴로 가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겼다. 경신과 경실은 보이지 않는 저 편에 있는 아버지를 부르며 애타게 세상의 모든 힘들과 신들이 그를 다시 한번 돕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근처에 경찰서와 소방서가 있어 빨리 식당으로 구급대원이 도착할 수 있었다.

의식이 없는 채로 들것에 실려 떠나갔기 때문에 경신은 자신이 그를 죽게 한 것인지.. 덜컥 겁이 났다.

" 숨은 돌아왔나요?! "

경신은 뛰어 나가는 구급대원을 향해 소리치며 따라 나갔다.

" 네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

경신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경신의 팔에는 김치 국물이 잔뜩 묻어있었고 슬리퍼 한쪽은 벗겨져있었다. 맨발이 바닥에 닿는 촉감이 그제야 느껴졌다.

‘ 살았다.’

경신은 경실의 손을 잡았다.

" 여보 정말 이게 웬일이야. 내 주변에선 절대 일어날지 몰랐는데.. 마트에서 배운 걸 이렇게 정말 사용하게 될 줄이야.. 내가 정말 못 살아 못 살아. "

" 못살긴 뭘 못살아 살아 살아. 살았어 살았어. "

가게 주인은 식당을 정리하며 주변 상황을 정리했다.

" 사장님 사모님 오늘 너무 큰 일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

늘 1시 30분 같은 시간에 추어탕 한 그릇을 드시러 오시는 분이라고 했다.

1년 전 아내를 먼저 보내고 3개월 발길을 뚝 끊으셨다가 이제 혼자서 같은 시간에 오신다고 했다. 노인의 아들은 한 달에 한 번 10만 원을 결제해 주고 간다고 했다.

추어탕 한 그릇 11000원, 그렇다면 10번 정도의 추어탕을 먹게 되는 셈이다. 노인은 10번의 횟수를 채우지 않았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매일 먹는 추어탕은 슬프고 지루하니까. 사장님에게 노인의 안부를 꼭 알려달라고 하며 전화번호 하나를 남겼다. 언제 밥 한 끼 사드리고 싶으니 꼭 연락처를 전해달라고.



8.

경비원 수칙이라는 것이 생겼다. 10개 조항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 경건하게 붙어있었다.

초소에서 졸지 마시오.

초소에서 휴대폰 하지 마시고 영상 시청 금지합니다.

밥은 빨리 먹고 단지 내를 돌며 점검하세요.

동료끼리 모여서 잡담 금지합니다.

하루 한 번 옥상 문 잠긴 것 확인 필수.

주민에게 먼저 " 안녕하세요. " 하고 반갑게 인사하세요.

복도 청소 협력해서 돕습니다.

재활용 상시 설치 예정이니 깨끗하게 주변 정돈하세요.

초소에서 라면 먹지 마세요.(냄새 심함)

1-9번까지 업무 시작 전 소리 내서 읽고 일 시작하세요.

*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을 시 인사 점수에 반영할 것입니다.


연신은 집에 와서는 " 이게 맞아? " 라고 말했다.

" 엄마 못 봤어? 엘리베이터 안이랑 밖에 이거 다 붙어있다니까? “ 연신은 사진으로 찍어온 것을 경실에게 보여주며 씩씩거렸다.

” 미쳤나 봐. 사람들 다 보면서 감시하라는 거야 뭐야 갑질도 이런 갑질이 어딨어. 사람을 왜 이렇게 서글프게 만들고 있어 짜증 나게. 아씨. 아빠도 이거 해야 되는 거야 그럼?! "

경실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별것 아닌 소소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주민이 볼 수 있게 붙여놨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단지 내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경신이 느낄 것 같아 경실은 한숨이 나왔다.

" 아휴.. 정말 굳이 왜 이걸 밖에다 붙여놨대. 나눠주고 혼자 읽게 하면 될 것을. "

"내 말이 그냥 대놓고 감시하라는 거 아니야. 사람 기분 주눅 들게 만들고 제대로 갑질하겠다는 거지 진짜. 진짜 이건 아니다. "

" 아빠 오면 한 번 물어보자. 어찌 된 상황인지 알아보자. 아빠는 또 별일 아니라고 넘길 수 있어 연신아. "

” 당연하지. 아빠가 우리한테 속상하다, 열받는다 얘기하겠어? 묵묵히 또 일하겠지. 속이 얼마나 안 좋겠어. 아 속상해 진짜!! 그냥 그만 두라 해 그 일. "

" 아빠 그 일 좋아해. 자부심도 있고. "

”진짜 싫다. 한국. “

” 갑자기 한국이 싫다 까지로 가는 거야? "

” 왜 딸, 세상이 싫다고 하지. "

" 악! 진짜 짜증 나! 나 진짜 관리소에 전화를 하든지 할 거야! 말리지 마. "

" 짜증 날 땐 오이냉국이지. 이리 와 냉국 한 사발 들이켜. "

경실은 경신이 좋아하는 오이냉국을 만들어 숟가락으로 휘휘 저으며 생각했다.

‘ 마음이 어떨까. 그의 마음이 지금 어떤 기분일까... 속상해하지 않고 아주 작고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넘기면 참 좋겠다...’

그날 저녁 경신은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 모두 조항을 보고 기분이 언짢았다는 이야기였다. 좋은 게 더 이상했다. 누군가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서 주민들이 이런 상황을 다 확인해야 하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경신은 가만히 앉아 1번부터 9번까지를 조용히 읊었다. 비치해 둔 작은 컵라면 몇 개를 쇼핑백에 담았다. 그리고 업무를 시작했다. 경신이 회사를 다닐 때 경신의 지시는 곧 법이었다. 갑질이 아니라 지시를 한 누군가도 그 위, 누군가의 지시대로 움직였을 뿐이라는 걸 안다. 총대 메고 전사처럼 권리를 위해 싸울 수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구조였다. 철호처럼 올곧게 자신을 지키는 사람도, 경신처럼 쉽게 부류에 휩쓸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 아닌가.

경신은 얼굴에 걱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경실과 연신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원래 세상이 그런 거라고 말했다.

" 아빠 내가 어디서 이런 대접받으면서 일하면 이렇게 똑같이 말할 거야? "

" 할 건 하고, 부당한 건 얘기하면 되지. "

" 아빠 1번부터 9번까지 안 부당 한 게 뭔데. "

" 일 하는 근무시간에는 회사에서도 폰 안 하고, 영상 안 본다. 당연한 거야.

라면냄새는 1층 주민들에게는 예민할 수 있는데 신경 쓰지 못 한 거니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고, 삼삼오오 모이면 말이 나오고 오해가 생기니 차라리 이렇게 정해주면 오해 덜 생길 것이고 재활용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중 하나고... "

경신이 쉬지 않고 말하자 경실이 오이냉국을 더 퍼오며 웃었다.

” 연신아, 걱정하지 마. 아빠다. "

".... 휴.. 정말 못 말려. "

" 걱정 마.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빠도 얘기해. 받아들이고 협력한다는 마음으로 하면 대부분 할 만한 일들이야. "

" 아빤 부처다. “

" 그래 연신아 널 키우며 부처가 됐다. "

"... 헐. “

경신은 사람들의 배려가 감사했다. 쉬엄쉬엄 일 하라고 건네는 음료 한 병, 아이 간식 사면서 함께 샀다는 꿀떡 한 팩, 더운 날 드시라고 얼음을 넣어 가져온 보리차...

사람들은 경신의 어깨가 쪼그라들지 않도록 보이지 않게 마음을 나누고 배려했다.

경신은 그분들의 하루를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고 월급을 받는 목적이라 생각했다. 감사하다고 말하고 몇십 배 감사함을 돌려주기 위해 애썼다. 경신의 단지는 가장 깨끗하고, 가장 웃음이 피어나고, 가장 따뜻한 그리고 가장 부지런한 노동자가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눈이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꼭 경신이 먼저 인사를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증명하듯이 사람들은 노동의 권력 구조에서 연대해 서로가 서로를 보듬었다.

경비원 인원을 감축한다는 소문이 돌거나, 청소 노동자를 대폭 감소한다는 이야기가 돌면 신기하게 주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도 누군가에게 중요한 한 사람이고, 그들은 우리에게 감사한 사람이라는 것을 때마다 느끼게 해 주었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 타는 냄새에 한 집 두 집에서 불이 켜졌다. 밖을 내다보니 술이 취한 남학생 4명이 모여 통 하나에다 옷가지들을 태우며 불을 피우고 있었다.

그날 경신대신 야간 업무를 한 사람은 경신보다 5년이나 더 일을 한 신형인이었다. 신형인의 장점은 꼼꼼하고 완벽하게 일처리를 한다는 점 그리고 계획적인 사람이라 한 번에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늘 이렇게 꼼꼼하고 계획적인 사람이라 업무적으로 오해가 생기면 업무일지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신형인을 찾아갔다.

그런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때론 마찰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융통성이 없어 갈등이 잦았고 나름의 철학을 지키기 위해, 지시를 해내기 위해 마치 참전하는 군인처럼 형인은 그렇게 초소를 지켰다. 형인은 4명에게 다가가 위험하니 불을 끄라고 말했다. 술에 취한 한 명은 병 소주를 들이키며 기분이 안 좋으니 꺼지라고 말했다. 형인은 어른에게 그런 말버릇은 옳지 않다며 말했고 4명은 형인에게 개처럼 달려들었다. 아무리 마음이 강하다고 해도 나이가 들어 힘이 부족한 노인이 장정 4명을 견뎌낼 방도는 없었다.

경신은 출근 한 뒤 전 날 새벽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형인은 안와골절, 갈비뼈 골절, 손목 화상, 뇌진탕 등 10개 가까이 되는 병명으로 입원해 2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경신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새끼들. 나쁜 새끼들... "

경신은 뜨거운 믹스커피를 함께 마시며 얘기를 나눴던 형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형인은 이혼하고 딸과 함께 살았지만 초소에서 더 많은 밤을 보냈다. 경신은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 같이 느꼈을 게 뻔한 형인의 마음을.

다 괜찮다고 해도 형인의 성격으로는 편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이었을 것이다.

모른 척 신고를 해도 그만이었을 것을.. 먼저 나서고 늘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는 형인은 그 성격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 올곧은 성격 때문에 당신의 귀한 생명이 사라진 것이라고 경신은 좁은 초소에서 눈물을 흘렸다. 분노한 것은 경신뿐이 아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는 아직 찾지 못한 그 4명을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함께 움직였다. 주변 CCTV 파일을 직접 가지고 경찰서를 갔다. 창문을 열고 그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대충은 기억할 수 있다며 정보를 건넸다. 그중 한 명은 단지 내 주민의 아들임이 밝혀졌다. 가닥이 잡히니 실타래가 풀리듯 해결에 속도가 붙었다. 경신에게 밝게 인사를 건네고, 경신에게 얼음을 넣은 보리차를 건네주던 12층 주민의 아들이 형인을 죽였다. 아들은 쓰러진 형인을 향해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고문하다시피 짓이겼다. 쓰러졌지만 온몸의 신경세포는 살아있던 형인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지만 성대까지 수축했는지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형인은 그렇게 고통스러웠다.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고 골절될 때까지 때려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폭력을 가할 수가 있는 것이며, 인간으로서 적어도 자신보다 50살은 많은 노인을 향해 무차별한 폭언과 폭력은 가당키나 한 일인지... 경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의 부모도 울고 있었다. 잘못했다고 아들 대신 무릎을 꿇었다. 단지 사람들 앞에 선 것은 무릎 꿇은 아들이 아니라 무릎 꿇은 부모였다. 경신은 화가 났고 괴로웠다. 경신은 그들의 눈물이 애잔했고 슬펐다.

형인의 장례식에서 경신은 오랜만에 장례식장의 적막함에 압도당했다. 삶의 마지막은 이렇게나 고독한 것인가. 사고로 황망하게 떠났지만 그의 나이는 죽음과 그리 멀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78살. 죽음과 그리 멀지 않은 나이,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 그렇다면 경신도 죽음의 경계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그 생각을 하니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보쌈이 78살 된 돼지처럼 느껴지고, 편육이 짓이겨 죽임을 당한 슬픈 돼지처럼 느껴져 구역질이 났다.

경신은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영정사진 속 형인은 사진에서조차 밝게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못했다.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과해내야 할 일이 많다는 듯한 전사의 표정으로 그곳에 허망하게 있었다. 그날 알았다. 형인이 오랜 시간 군인으로서 일 했다는 것을. 경신이 느낀 올곧은 군인의 정신과 강인한 행동 뒤에 그의 삶이 녹아져 있었던 것이라는 걸.. 경신은 군인의 죽음이, 동료의 죽음을 되돌려놓고 싶었다. 일터의 동료들은 일터에서의 옷을 벗고 낯선 검정 정장을 입었다.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니 대기업 임원의 모습이, 교수의 모습이, 사업가의 모습이.. 그의 뒤편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경신의 모습에서도 공기업에서 오랜 시간 일한 삶이 누군가에게 비쳤을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경신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경신의 양쪽 눈이 눈물로 짓물러질 때까지 야속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 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는 종이 한 장이 더 붙어 있었다.

내가 한 말 한마디. 내가 하는 행동, 내가 짓는 표정이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그런 사람다운 사람이 됩시다.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 중 소중하지 않은 사람, 무시당해야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는 우리가 됩시다.

형인이 근무했던 공간은 경신의 공간이기도 했기에 한동안 국화꽃과 형인이 즐겨 마시던 믹스커피까지 자리를 가득 채웠다. 경신은 그것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죽은 것 같은 스스로 죽음을 애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경신이 죽음에 대해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9.

경신은 유서를 썼다. 언젠가 영정사진으로만 얼굴을 볼 수 있는 그날을 위해 경신은 준비했다. 많지 않은 재산을 적기에는 가족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신 장례절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간략하게 메모해 놔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세상을 떠날지 아무도 알 수는 없겠지만 나의 죽음을 경험하는 가족이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살만큼 살았고, 인생 즐길 만큼 즐기며 하고 싶은 일 많이 하며 만족한 삶이었으니 눈물보다는 미소로 자신을 보내주길 바란다는 말이었다.

퇴직금과 퇴직하고 일하며 번 소소한 돈을 모은 통장은 아내 경실이 행복하게 네일아트를 받는데 투자하라고 적었다. 인생이 긴듯하지만 돌이켜보니 삽시간에 흩어져버리는 모래 같다고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라고. 두려운 생각이 들더라도 ‘삶’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이니 그 두려움을 즐겨보라고.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말고 두려움을 뚫고 용기 있게 나아가라고. 나이가 들어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이 인간이니 어른으로서 하는 실수와 실패에 직면할 때 하늘을 보고 한 번 하하 웃으라고. 청년의 기분으로 ” 또 실수를 했구나! 또 한 번 실패를 했으니 얼마나 익숙한가! “ 웃어 보이라고. 부정적인 마음을 오래 가지고 있어 봤자 늙는 것은 본인이니 웬만하면 툭툭 털고 일어나라고. 영상시대에서 자란 아이들이니 얼마나 스마트폰이 매력적인지 이해는 하겠지만 스마트폰으로 얻은 거북목보다 독서를 하며 얻은 거북목이 100배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아빠의 방 안 책장에 좋은 책들을 한 권 한 권 들춰보라고. 몸을 움직인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꽂아놓은 빳빳한 오만 원 권 지폐를 발견하는 기쁨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제사로 거추장스럽게 질척거리며 만나지는 말자고. 대신 그날 가족끼리 만나든 친구랑 만나든 아빠의 좋았던 부분을 한 가지만 이야기하는 그런 의미 있는 날이길 바란다고. 아빠의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아빠의 단점을 꺼내서 안주삼아 씹어버리라고.

경신은 유서를 쓰며 웃음이 나왔다. 슬펐지만 이렇게 된다면야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지 한 장을 더 꺼내 경신은 볼펜에 다시 힘을 쥐어 잡았다.

철호에게.

미안하다. 난 너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는 사이가 진정한 사이라고 했는데 난 너의 이름을 들으면, 어디서가 너와 비슷한 이름을 듣거나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보면, 너의 나이와 비슷한 사람들을 대할 때면 자꾸 미안하다.

내가 널 지켜주지 않은 미안함보다 너의 편에서 힘을 함께 보태지 않은 미안함이 크다. 그래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월급을 받고 일하는 그 일터보다 너의 편에서 더 가까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너의 아이들을 보는 것이 두려워 마음뿐인 고민과 걱정을 했다. 모두 미안하다. 내 얼굴을 보면 혹시나 떠난 아빠를 더 그리워하게 될까 봐. 무서운 마음이 들까 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는 말은...

핑계가 될까.

난 미안하다. 철호야. 너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는 대신, 그만하라고 너의 이름을 부르기만 했으니 정말 미안하다. 난 먼저 간 너를 떠올리며 편지를 쓴다. 죽은 뒤 정말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나는 그때 너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사과의 악수를 하겠다. 네가 그 손을 세차게 뿌리칠까 봐 지금은 겁이 나지만 그래도 나는 주저하지 않고 너에게 몇 번이고 사과의 악수를 내밀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의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너를 위한 화해가 아니라 나를 위한 화해 같구나. 죽음을 떠올리며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이토록 이기적인 인간인가 보다. 난 너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철호야.

경신은 근무를 준비했다. 거울 앞에 서서 1번부터 9번까지의 문장을 조용히 읊었다. 주민들의 항의전화로 종이는 떼어졌지만 경신은 여전히 9번까지의 의무를 소리 내서 읊었다. 빳빳하게 다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 광대에 힘이 생겼군. 좋은 징조야. "

경실은 경신의 뒤로 와서 경신을 꼭 안았다. 난 당신의 냄새가 참 좋더라.

" 다 늙은 노인네 냄새를 좋아하는구먼? "

" 피죤 냄새는 언제나 향긋하지요. 오늘은 근처 가서 추어탕 한 그릇 먹을까? 몸보신 좀 하게. "

" 그래요. 오늘 저녁 근무는 없으니. 그렇게 합시다. "

늘 그래왔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근무지로 향한다. 작은 도움이라도 보탤 일이 어디 없나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 감사하게도 한두 개 늘 경신이 해내야 할 일들이 생긴다.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들이고, 할 수 있는 일들이라 감사한 것들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사람을 도와주거나,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산을 깜빡한 사람과 잠시라도 우산을 함께 쓰고 걷는 일은 아주 소소하지만 소소하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경신에게는 그렇다. 경신은 결국 처벌을 받게 된 아들 때문에 마음 성할 일 없는 12층 주민에게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는다. 평생 받을 손가락질과 지탄을 다 받았으니 부부의 얼굴도 많이 상했고 경신의 분노는 어느새 안타까운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죄인이 된 것처럼 생활하는 부부는 결국 그 부모라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간다 할지라도 형인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란 걸 경신은 알고 있었다. 평생 마음에 죽지 않은 씨앗이 박힌 것처럼 불쑥불쑥 그들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우울하게 할 것이란 걸...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인생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란 걸 경신은 알고 있었다.

4층 딸은 일을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딸에게 직접 들었다. 경신을 죽도록 싫어하는 줄 알았던 4층 여자는 딸의 마음을 어떻게 열었냐며 복희 여사와 경신에게 물어봤다. 복희 여사는 목캔디를 한 개 건네며 " 별거 있수? 툭툭 이렇게 뭔가 던지는 거지. "

목캔디 한 알을 까 입에 넣은 여자는 작은 직사각형 목캔디를 입 여기저기로 굴리며 " 달고 맵네. " 했다.

" 달고 매운 게 인생이지. 목캔디를 내가 그래서 좋아하잖아요. 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우리 딸은 먼저 저 세상 가서.. 그쪽 따님 보면 죽은 내 딸이 문득 떠올라 저도 오지랖이 심했어요. “

"............ 몰랐어요. 아휴... 정말... "

경신은 그녀들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며 귀에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 담았다. 행복한 대화였다. 경신은 뒤돌아 웃으며 단지의 정보지함 종이를 바꿔 놨다.

딸은 아르바이트로 커피숍 알바를 시작했다고 했다. 딸의 이름은 은유였다.

참 좋은 이름이다고 경신은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 마음의 문을 잠그고 방문도 걸어 감갔는지 경신은 알지 못하지만 은유, 이름처럼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감사합니다 아저씨. "

" 아고 제가 감사한 일을 했나요? "

"네.. 저에겐 그러세요. “

" 그렇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은유 양 힘내요! "

"감사합니다. "

감사가 작은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통통거리니 이 얼마나 행복한 날들인가.

경신은 일찍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면서 경실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 고맙소, 내 사랑. "

경실에게 답장이 왔다.

" 내가 더 고맙소. 내 사랑. 추어탕은 당신이 보슈. "

" 두 그릇도 사드리리다. "

경실은 냉장고에 복희 여사의 추어탕 한 팩을 하나 더 사와 넣어 둘 것이 뻔하고,

노신사가 들르면 전해드리라는 메모가 붙은 집 반찬 몇 개를 건네주고 올 것이다.

경신은 추어탕 한 그릇을 먹고 ” 이런 게 행복이지! “라고 말할 것이다.

낮이건 밤이건 그들에게 행복은 수시로 예고 없이 찾아오니까.



10.

경신은 글을 쓴다. 아니, 쓰기로 결심했다. 슬픔을 공부하기 위해 글을 쓰고, 행복을 영위하기 위해 글을 쓴다. 쓸 것이다. 읽기만 했다면 이제는 쓰며 치유한다. 그러니 경신의 인생 마지막 열차는 글을 쓰는 삶이다.

지하철을 타고 돌고 돌며 읽었던 책들 속에서 느낀 감정들을 메모하고, 근무를 하며 휴대폰 조명을 켜고 읽던 책들로 얻은 배움과 교훈을 적어 내려갔다.

경신은 경실이 드라마나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소설이 뭐 따로 있나 우리의 인생이 곧 소설이지.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경신이 느끼기에는 정말 인생만큼 소설 같은 이야기가 없었다. 다채로울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도 ‘절정’과 ‘반전’이 숨어져 있었다. 새드앤딩과 해피앤딩이 뒤섞여 있고 수많은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로 인생에서 배워나가는 부분이 있으니 이 자체가 경신에게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 아빠, 정말 글을 쓰시게요? "

철원의 질문에 경신은 엄지를 올려 보였다.

" 왜 아빠가 글을 쓴다니까 이상하냐? "

"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잘 어울려서요. 아빠."

“ 맞아. 그렇지? 이제 너희 아빠 직업은 ’ 작가‘라고 생각해.” 경실이 웃었다.

뭐든 소소하게 시작하다 보면 그 소소함이 쌓이고 쌓여 단단한 무언가로 변하는 게 인생이다. 경신은 매일 밤 자기 전 두 시간 정도 하루를 정리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기를 그러다가 조금 더 호흡이 긴 산문을 분량을 정해 쓰기도 했다. 가끔 프린트를 해서 가족들에게 보라고 건네기도 했는데 경신의 글을 읽을 때면 경실은 행복했다. 경신의 보이지 않은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았고 시장 떡 집 앞에서 손잡고 걷던 연애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경신 역시 때때로 불안하고 때론 가라앉던 마음이 글을 쓰며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았다. 읽기만 하는 것과는 또 다른 기쁨이었다. 날것의 마음이 불쑥 활자로 드러나 경신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어느 날은 정말 누가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글이 술술 써져 A4용지 10장을 한 번에 채우는 날도 있었다.

경실은 이 글들을 가족만 보기에는 아깝다며 공모전이든 뭐든 한 번 도전해 보라고 권유했다. A4용지 1000장이 다 채워질 정도로 글을 쓴 뒤에나 그런 도전은 해봐야지 하며 넘겼지만 경신도 궁금했다. 경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 닿을지. 그리고 그날 저녁, 경신은 은유가 조용히 건네는 종이 한 장을 받았다.

“ 아저씨, 카페에 붙어있는데 사장님이 여유분 한 장 있다고 하셔서 들고 왔어요. 그냥 이 거 보니까 아저씨가 떠오르던데요?”

은유가 웃었다. 경신은 조용히 앉아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가던 자신이 모습이 들킨 것 같아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 부끄럽네.. 이 공모전에 나가보라고? 허허”

전국 신인상 문학 공모전 종이 었다. 소설은 단편소설 10장을 완성하면 됐고 상금은 200만 원이었다.

“ 아저씨 무조건 해보세요. 진짜 응원해요!”

경신은 고맙다고 말하고 종이를 고이 접어 파일 안에 넣었다. 그리고 퇴근 전까지 몇 번이나 매만졌다. 그래, 유서에도 쓰지 않았던가. 삶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이니 고민하지 말고 두려움을 즐겨보라고. 황경신! 뭐든 해보자.

경신은 어김없이 피존 향기가 솔솔 나는 깨끗한 잠옷을 입고 책상에 앉아 조명을 켰다. 다른 날 보다 조금은 경건하게 자세를 잡고 볼펜도 글씨가 가장 부드럽게 써지는 것으로 신중하게 골랐다. 집에 돌아오며 구입한 원고지 종이의 앞 장을 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경실의 말을 듣고 공기업에 입사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가 떠올랐다. 승진시험을 준비하던 날도 떠올랐다. 문득 철원이와 연신이가 떠오른 날도 떠올랐다. 원고지 70장 정도에 경신의 글자들이 하나씩 자리 잡아갈 것이다. 경신은 다른 것보다 아마 그의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을까. 경신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첫 문장을 적었다.

경신은 40년 동안이나 하얀색 와이셔츠를 고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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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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