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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든 감상이든, 결국 기억이 된다.

체험학습을 다녀온 후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양식이 있다.
글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긍정적인 나는 이 '체험학습 제출 용지'에만 괜히 반감이 들었는데 왜 다른 글쓰기 말고 이 제출 종이에만 유난히 반감이 드는지가 이상했다.

우리 가족은 스페인에 갔을 때 시차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우스갯소리로 평소에도 2시에 잠을 자니 시차도 별로 안 느껴졌나 보다. 했다.
한국에 와서도 헤롱거리는듯 싶더니 새벽 1시까지 쌩쌩하게 보냈다.

여행 후 일주일 이내 종이를 채워 제출해야 하는데 조건이 꽤나 디테일하다.
예를 들어 볼펜으로 작성해야 한다, 별지에 내용 별 사진은 2장 첨부, -장을 써야 한다. 등등이다.

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그때는 숙제가 엄청났다.
탐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거행된 이 숙제는 사실 누가누가 두껍게 사진을 붙이고, 내용을 정리했나로 평가됐고
난 왜인지 모르겠지만 늘 1등을 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엄마는 체험에 대해 진심이었다. 잠자리를 잡아도 사진을 찍고, 가족여행을 가면 무조건 기행문을 쓰게 했다. 나름 순종적이던 첫째딸 나는 원고지에 기행문을 쓰고, 곳곳마다 찍었던 사진을 붙이고 궁서체 글씨로 눌러 탐구생활을 작성했고 얇았던 두께가 2배는 두꺼워진 상태로 제출했다.

기록이 싫었다. 일기도 검사하고 도장 받던 시대다.
엄마한테 혼난 일을 쓰면 선생님은 속상했겠구나.. 뒤에 엄마를 옹호했고
동생과 싸운 일을 쓰면 속상했겠구나 뒤에 언니가 이해해 보렴 했다.
별일이 없다고 쓰면 모든 일은 특별한 거라고 하시니 일기를 쓰기 전 살살 배가 아팠던 것 같기도 하다.

사진은 더 찍기 싫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족사진을 제대로 건지지 못한 것을 사실 이해한다.
엄마가 " 여기 봐~" 하면 목석처럼 서있었는데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때 표정을 이번 여행 내 아이들을 통해 봤다.
억지로는 안 해야지 하면서 내가 또 엄마가 되니 이 순간순간을 얼마나 기록하고 싶은지... 나도 모르게
한 장만 찍자를 녹음한 듯 내뱉고 있었다.

일기 쓰기, 독후감 쓰기, 기행문 쓰기, 탐구생활 제출, 우표 모으기 등 이름이 거창한 숙제들 중 한 가지 선택이 아니라 무려 다 해가야 했다.

체험학습 보고서는 내 탐구생활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귀찮겠다. 왜 굳이 기록을 해서 제출을 하고 검사를 받아야 하는가.

내가 이렇게 산더미 같던 숙제 이야기를 하며 토를 다는 이유는 그 산더미 같은 숙제에도 나름의 의미와 배움이 있다는 것을 훗날 알게 됐다는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억지로 쓴 기록이든 쥐어짠 감상이든, 결국 기억이 된다. 그러니 이 보고서에 대해 나는 더 이상 반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썼던 일기가 내 살이 되고, 턱을 괴며 썼을 기행문으로 잠시 가족이 함께한 시간을 떠올렸을 것이며, 누구한테 혼나고 찍은 것 같은 표정의 사진들을 보며 추억하며 웃고, 성실하게 해냈던 숙제의 무게는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성실함으로 한순간 뒤 바뀌는 시기가 온다는 것을 안다.

아이는 12시가 넘어서는 말똥한 눈으로 앉아 관심도 없던 것 같은 유럽여행을 떠올린다.
친구들 이야기 반, 한국 이야기와 릴스 이야기로 가득했던 것 같은 아이들의 여행이 다시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아이들은 바르셀로나 - 마드리드 - 톨레도 / 지로나 - 포르투 - 리스본의 순간들을 (짜내어) 기억했고
그 기록을 작성하기 위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지' 다시 생각한다.

건축물의 곡선의 아름다움도 기억하고, 가우디의 열정과 죽음도 기억한다.

행군같던 더위와 피곤함도 기억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는 작게라도 놀람과, 감탄과, 아름다움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기록을 해야만 이 기억이 남는 것은 아니지만 기록을 하는 과정을 통해 더 분명하게 각인할 수 있다는 것은 '쓰기'의 이로움이다.

어릴 때 숙제를 하면서 '기행문을 왜 써서 내야해!' 하고 짜증을 내면 엄마는

" 하라면 하는거지. 라고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꼭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었니." 같은 말들을 덧붙여주곤 하셨다.

이제 그 행간의 의미가 와닿는다.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시간인지.
꽉 채운 아이의 바르셀로나 여정을 글로 읽으니 첫날의 감동이 다시 되살아난다.
단단한 기억이 되는 귀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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