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반응하고 있나요?
오늘은 정말이지 바람의 기분이 잘 보이는 그런 날이었다.
기석은 금요일까지 야근을 하며 간신히 버티던 육체의 피곤함을 토요일 보라와의 데이트를 통해 위로받곤 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연애를 하기는 했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만나는 횟수가 그렇게 잦지 않았고 남들이 일주일이면 뺀다는 스킨십 진도도 한 달이 걸렸다. 하지만 보라는 믿고 있었다.
그 애간장 녹이는 과정과 부족한 시간이 그와 그녀의 연애를 적당히 긴장감 있게, 적당히 설렘을 유지한 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어쩌면 덕분에 1년이라는 시간을 무탈하게 보내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의 올인원 로션냄새를 사랑했고 그는 그녀의 달콤한 미소를 사랑했다.
보라는 연애를 할 때마다 예민하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남자친구에게 듣지 않으면 남자친구의 친구에게, 그것도 용케 넘어가면 주변의 가족들에게 꼭 듣고야 말았다. 보라는 본인이 예민하다는 단어보다는 ‘면밀, 감성, 재치, 영민’이라는 단어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하는 그런 평가에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보호막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느낌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보라만의 방식을 존중받지 않았을 때 즉각적으로 말하는 것 때문이라는 결론 아닌 결론을 냈다.
원래 단어의 느낌과 밀도는 그 말을 내뱉는 사람의 눈빛과 어투에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있어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결국엔 전달되는 무언가였고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때마다 보라는 ‘나는 감성적인 사람인가, 예민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주눅 아닌 주눅이 들었다. 이런 질문과 스스로에 대한 고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서운함 들이 맞물려 결국 초라함이라는 기분으로 점철되었고 감정이라는 것은 변이하고 변이 하다 결국엔 면역성이 생겨 자가 치유되기도 하고 또는 자멸하기도 하는 요망한 것이었다.
“ 보라, 넌 참 예민하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날이면 보라는 몸에서 다른 사람이 뛰쳐나와 날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고 그 기점으로 늘 연애는 종지부를 찍었다. 보라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왜 숱한 단어들 중에 ‘예민’하다는 말에 말 그대로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지.. 한 번, 두 번 연애가 끝날 때마다 보라는 생각했다. “보라, 넌 참 감성적이다.”라고 말해주는 인간을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보라는 이런 경험에 면역이 생겼지만 감정의 돌연변이 앞에 자주 자멸 당했고 분노를 표출하고 싶은 본인의 모습을 지울 수 있다면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었다.
‘지워도 흔적은 남지.. 다시 태어나면 어떨까. 그래 다시 태어나는 게 깨끗하고 더 나을지도 몰라. ’
우울증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고민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가족들은 죽을상을 하고 앉아 상담을 받아 봐야 한다. 우울증일 수 있다는 말로 마음에 병이라도 걸린 사람 취급했고 친구들은 자기들 연애하느라 한 친구의 깊은 고민은 안중에 없었다.
보라는 생각했다. ' 난 자살이란 단어를 생각한 적은 없다고. 아마 그럴 거라고.' 다만 분명한 건 시간이 흘러갈수록 혼자만의 세상에 조금씩 고립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보라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앉아 헤겔이라는 고딕체 두 글자가 쓰인 책의 앞장을 수백 번 읽은 뒤덮었다. 그리고는 경영대 앞 큰 호수 앞 잔디에 앉았다. 4월은 생각보다 해가 길었고 생각보다 쓸쓸함이 느껴지는 저녁 8시였다. 깊은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호수 앞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보다가 생각보다 꽤나 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스스로 그 호수에 잠기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을 뿐.
' 걱정 마 세상아, 아무래도 난 자살할 용기는 없는 것 같으니까..'
돌을 던지면 어디까지 물이 통통거릴까. 얼마나 깊이 가라앉을까.. 생각하며 보라는
조용히 일어나 호수로 네발자국쯤 걸어갔다. 정확히 네 번째 걸음을 걸으려 오른발이 지면과 떨어졌을 때, 그가 날 붙잡았다. 하늘에서 갑자기 인간이 하나 툭 떨어진 것 같은 당황스러움이었다. 저녁이었지만 깜깜하지는 않아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고 분명 보라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보라의 팔을 잡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선명했다. 조각상같이 선명한 이목구비가 보라의 눈에 들어왔다.
“ 아직 추워. 9월쯤이 좋겠어. ”
“..... 네?”
“ 좀 더 기다리다 9월에 다시 몇 발자국 더 가보라고.”
보라는 정색했다.
" 저기요. 절 이상하게 생각하신 것 같은데 지금 물에 빠지려고 한 건 아니거든요?"
" 아.. 그렇다면 다행이야. 생명의 은인으로 각인되진 않겠어."
" 팔 좀 이제 놔주실래요?"
" 팔 놔주면 바로 다이빙할 건 아니지. 확실하지?"
" 후...... 누구세요? "
" 재학생"
보라는 영민하고 감성적인 사람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말하는 그의 눈을. 오감을 총동원해 그의 세포에서 내뿜는 에너지를 주머니에 주어 담고 싶었다. 그의 말투는 무미건조했지만 다정했고 눈빛은 은은했지만 뜨겁지 않았다. 그 부드러운 온기가 좋았다.
“ 2049203.. 아직도 전공서에 학번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구나.... 이름은 황민서?”
보라는 괜히 머쓱한 마음이 들어 책 귀퉁이를 손으로 가렸다.
" 이미 다 봤는데 뭘 가려. "
"난 김기석이야. 학번을 보니 내가 더 선배인 것 같다. 오며 가며 얼굴 보면 인사나 하자. "
김기석. 그리고 느낌. 보라는 이 두 단어를 기억했다.
보라는 솔직히 알 수 없었다. 정말 호수에 빠지려고 했는지, 돌을 던져 물의 깊이를 알고 싶었는지.
물의 깊이를 도대체 왜 궁금해했는지, 스스로 왜 자꾸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한 가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원점으로 보라를 되돌려놓았다. 기석과의 만남 이후 보라는 9월 달력을 자꾸 들춰봤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9월까지는 기다려.라는 기석의 말을 떠올리며 어쩌면 기석도 보라의 마음처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다고 분명 그랬기 때문에 자신을 발견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보라는 학교에 올 때마다 그 사람을 찾곤 했다.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지만 스스로 알고 있었다. 삶의 유예기간을 준 은인이라는 개념보다 궁금한,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 용기가 일게 하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그를 다시 만난 건 학교 앞에서 대자보를 보고 있을 때었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거두자는 이름 모를 학우의 글 아래에는 갖가지 욕설과 낙서들이 가득했고 그 낙서를 향해 욕을 날리는 중이었다.
“ 미친놈들, 다 자기들만 맞는 줄 알지. 등신새끼들.”
“ 맞아. 참 세상엔 등신새끼들이 맞아 그렇지?”
그였다.
" 어 기석!"
" 오 반말!"
" 아...."
" 괜찮아. 잘 지냈지? 날이 더웠는지 호수 물이 얕아졌더라?"
"..... 그만 좀 하세요. 그때는..."
그는 늘 맑은 날 내리는 우박처럼 갑자기 등장하면서도 어색한 기운 하나 없이 담담하게 음성을 내뿜었다, 만개한 꽃들 사이에 갑자기 불어 닥치는 꽃샘추위, 한 여름에 갑자기 내리는 무시무시한 소나기 같았다. 다른 사람은 당황하는데 본인만은 당당한.. 늘 그런 존재인 것 같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익숙해지고 인정하게 되는.. 그런 사람.
정면으로 그를 마주친 건 두 번째 지만 그때도 블루톤의 밝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블루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며 슬쩍 위아래를 훑으니 그가 대뜸 입을 연다.
“ 너 머리 잘랐네?"
" 네."
" 짧은 머리도 잘 어울린다. 뭔가 더 씩씩해 보여."
" 네?"
" 응 소공녀에서 말괄량이 삐삐 이미지로 변신한 느낌이야."
“... 이...."
보라는 순간 고민했다. 나도 칭찬을 해야 하나. 하고.
"블루 계열 셔츠를 좋아하나 봐요?"
" 응. 시원하잖아."
기석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 수업 있어서 먼저 간다. 다음에 보자."
다음은 언제인지, 어떤 방법으로 다시 보자는 것인지 보라는 궁금해 물어보고 싶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기석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있었더니 기석은 뛰어가다 뒤를 살짝 보고는 다시 돌아와 손을 내밀었다.
보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기석의 손을 잡았다.
" 아... 폰 줘봐. 번호 교환하자."
" 아. 젠장."
" 오 봐봐 삐삐 맞네."
보라는 뜨거운 주전자를 만졌다 놀란 아기처럼 기석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며 말했다.
" 아!"
010 -... -....
보라는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이 도대체 시트콤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오랜만에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와 다시 마주친 건 도서관에서였다. 도서관 철학코너에서 가장 재미없어 보일 것 같은 가장 두꺼운 책을 뽑아 바닥에 앉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때론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책을 일부러 펴서 싸움하는 마음으로 독서를 한다. 보라는 궁금했다. 이 책을 쓴 숱한 철학가들의 어려운 마음을. 그리고 이해하고 싶었다. 그 어려운 마음을.
보라는 책을 읽는 행위를 읽기보다 흡입하기, 흡수하기, 오감으로 충족하기로 표현했다. 한 페이지에서 몇 십 분을 읽고 곱씹어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다시 읽기를 했던 것일까..
“좀 넘어가지 이제.”
작은 소리로 속닥거리며 다시 그가 나타났다.
보라는 책을 훑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과 너무 가깝게 닿아있는 느낌이 부끄러워 발딱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여긴 또 무슨 일이에요!”
“책 읽으러 왔지. 너도 보고.”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이런 책 읽는 애들도 있나 확인차 왔다가 널 발견했지?"
“ 왜 맨날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해요? 나에 대해 뭘 안다고?”
“ 원래 모르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거야.”
도서관은 조용했고 구석진 그 공간은 철학책 한 권을 품에 안은 보라와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기석의 숨소리만이 공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이 사람은 또 블루 톤이네. 머리스타일도 한결같고 소매를 걷어 올린 스타일도 똑같아.
왜 저렇게 따뜻하게 바라보는 거야. 옷은 블루 톤인데 마음은 오렌지빛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활화산 같이 뜨거운 느낌도 아니고 그렇다고 맹숭맹숭함도 아니고 적당히 뜨겁고 적당히 따뜻한 오렌지 빛..'
“ 저기요.... 저랑 연애라도 해보려고 자꾸 나타나서 찔러보는 거예요?”
“ 하하 너무 표현이 구시대적이다? 찔러보는 게 뭐야 찔러보는 게. 그냥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나에 대한 존재를 각인시키는 중이랄까. 생각보다 지금 내가 당황스럽거든.. 연애라는 말을 도서관에서 속닥거리면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야. 허험.. 빨리 말해야 하는 거야?... 난 9월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보라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책 향기와 그가 작게 움직일 때마다 퍼지는 은은한 로션냄새 그의 웃음과 환한 표정은 보라의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들었다.
“.... 9월까지 사랑할래요 우리?”
“9월까지?.......... 색다른 연애법이네? 좋아. 사랑하자.”
9월은 며칠 남지 않았다. 며칠 그와 사랑을 하자. 보라는 며칠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언제가 됐든 둘은 사랑을 시작했을 테지만 보라는 조금 더 그걸 앞당기고 싶었을 뿐이고, 9월이 되었을 때 그가 옆에 있어준다면 자신의 인생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향기였고, 소름 돋는 설렘이었다. 오랜만이었다 그런 기분이.
보라는 늘 ‘예민’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날을 떠올려야 했다. 보라는 26살이 될 때까지 총연애를 3번 했다. 껄렁거리며 다가오고, 썸을 무장하며 스킨십을 하려 하는 쓰레기들을 제외하면 연애다운 연애는 딱 3번이었다. 가장 오래 한 연애는 3년 정도였고 3년의 연애동안 보라는 가장 많이 ‘예민’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카디건의 까슬거린 촉감이나 귓가에 속삭일 때의 소리, 샴푸나 로션 향수냄새를 조금 더 많이 느끼긴 했지만 그것이 연애를 종지부 져야 할 이유가 되는지는 아직도 설명되지 않았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연애가 마무리될 즈음 늘 남자들의 주변 인물들은 혀를 차며 남자를 감쌌고 바람도 피우지 않고 기념일도 잘 챙겨주고 꼬박꼬박 전화하고 데려다주는 남자친구로서의 정석의 행동들을 행했음에도 오감 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보라는 한순간에 미친년이 되어있기 딱 좋았다. 한 번은 3년 동안 우리가 섹스를 몇 번이나 한 줄 아냐고.. 우리 너무 요새 식었다고 하는 옛 남자친구에게 보라는 말했다.
“ 콘돔 냄새가 너무 역해. 화학냄새를 맡으면 누가 우릴 보고 있는 것 같아.”
3년이나 사귀었지만 그의 화두는 잠자리 그 자체였고 어쩌면 모든 연인의 중심에 그것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을지..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 계기로 그는 7살 어린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생떼 부리는 모습으로 잠자리에 집착을 하며 3년 동안 쌓았던 믿음과 신뢰 사랑이라는 이름을 조금씩 무너뜨렸고 그럼에도 보라는 콘돔 없는 잠자리를 완강히 거부했다.
“ 화학냄새 안나는 콘돔 찾아오면 그때 할래.”
그는 브랜드별 갖가지 콘돔을 가지고 와 보라 코에 들이밀었지만 보라는 역겨웠다. 잠자리가 거부되자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겼다. 보라는 그 거리에 대한 책임을 혼자만 뒤집어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아득바득 소리 지르고 밀쳐내며 마무리를 더럽혔는지 모른다.
‘느낌이 그런 걸 어떻게. 기분이 그런 걸 어떻게 해. 다 숨기고 맞춰줄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 꽃향기가 어떻게 다 똑같아? 꽃향기라는 건 원래부터 틀린 말이야. 장미향이 있고 라벤더 향이 있거든. 향기는 코로만 맡아지는 단순한 후각 작용이 아니라고. 향기를 맡고 눈에 그려지는 것도 있다는 걸 왜 모르냐고 병신같이.’
기석과 보라의 연애는 소년과 소녀의 사랑처럼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명백한 스킨십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스킨십에 연연하지 않았고 보라는 걷다가 살짝살짝 닿던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석은 셔츠 소매 단추를 늘 잠그지 않고 위로 몇 번 접어 입었는데 올드해 보이면서도 그 셔츠 입은 자태는 훌륭했다. 그는 눈을 맞추고 클래식 같은 미소를 지었다.
조용해 보이지만 왈가닥 기질이 있던 보라를 기석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밝음을 끄집어내어 주려고 노력하는 게 보라에게도 느껴지곤 했다. 보라의 독특한 표현에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고 보라의 의견을 한 번도 무시한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보라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
지나치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만 보이는 거야.
보라는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 라는 이름도 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정확히 반복재생을 돌려 40번을 들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 아!!!!!! 악!!!!! 너무 좋아.!!!”
“ 하하 나도 좋아. 기분 엄청 좋아지지 않아?”
“ 샴푸향이 맡아진 거야 가 아니라 너무 좋아.”
“ 동감! 오감의 노래라고 할 수 있지. 이 가사 쓴 사람은 적어도 연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 거야. 시적인 사람.”
“ 이렇게 세심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어쩌면.. 실제 연애에는 젬병일 수도 있어. 뭔가 연애까지 잘하는 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 건 뭔 기분이지?”
“ 님만 다 가질 수는 없다는 합리화본능. 하하”
보라는 가끔 노래의 가사를 바꿔 기석 앞에서 흥얼거리곤 했다.
많고 많은 사람 속에서 네 로션향이 느껴진 거야~
걸어가는 사람 속에서 네 로션 향만 보이는 거야~~
기석은 보라의 귀여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얼씨구나 작사를 해야 한다며 추켜세워줬고 기석의 환한 웃음은 보라의 마음을 더 더 열게 만들었다. 온 세상이 향긋하던 봄 속에서 혼자만 고동색인 것처럼 느껴지던 보라는 기석과 함께 찬란한 봄을 만끽했고, 싱그러운 여름을 뜨겁게 함께했다. 9월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처음의 조건을 떠올리진 않았다.
‘ 우리 9월까지만 사랑할래요..?’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껴 노래를 듣는 사람 사이에서 둘이 유선 이어폰을 귀에 한쪽씩 나눠 끼고 노래를 흥얼거렸고 카톡도 사용하지 않았다. 1이 업어지는데 읽씹(읽고 씹었다)은 이유로 자잘하게 다투는 사랑은 싫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휴대폰은 연락수단으로만 사용하는 취향이 비슷해 트러블하나 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
전국 숨은 독립서점을 찾는 데이트를 즐겨했고 그럴 때마다 둘은 동시에 말하곤 했다.
“ 역시 여행은 책방 찾는 재미지.”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그것보다 맛있는 책을 찾아 헤매는 일을 함께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일 수 있는지 보라는 매일매일 느끼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9월을 한참 넘겼고 새로운 봄이 시작할 때 기석은 취업했다.
보라는 기석에게 취업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냥저냥 한 선물 말고 의미 있는 선물을 건네고 싶었다. 둘에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라는 훗날 자신이 어떤 직업에서 일을 하든 책이라는 매개체가 늘 함께할 것이라는 것을 느낌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남으면 독립서점을 찾아가 새로운 책을, 신선한 책들을 눈여겨봤고 알음알음 알아 옛 그림책을 복간시키는 모임에도 들어가 활동하고 있었다.
보라는 보라를 포함해 5명의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옛 그림책을 복간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보라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이나, 그전 세대가 읽었던 전집과 단행본들을 추려내 초판과 내용을 그대로 복원해 내는 일이었다. 보라만이 미혼이었고 함께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녀가 있는 기혼자였는데 결혼과 육아에 대해 전무한 보라가 수다를 통해 듣고 배우는 것들도 인생에서 꽤 도움이 될만한 것들 아니겠냐 생각하며 꽤 만족하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사방이 아날로그 느낌 나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아날로그적인 사람들, 아날로그 느낌 나는 책냄새, 아날로그적인 과정.. 이 고단한 작업을 이 편리한 시대에도 유지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구나..
다시 옛날로 돌아가 그 추억을 소환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는 거구나.
책을 복원하기도 했지만 가끔 아동들이 있는 곳으로 재능기부도 나갔다. 책 읽어주는 언니라는 타이틀을 달고 아이들과 마주 앉아한 손으로 책을 들고 한 손으로는 제스처를 하며 최대한 친절하고 재미있게 동화구연을 했다. 보라의 발랄함은 동화구연에서 빛을 발하곤 했고 늘 인기가 좋았다. 재능기부로 시작했지만 구연하는 보라의 모습을 본 담당관계자들은 늘 다른 곳과 연결을 시켜줬고 부수입으로 쏠쏠할 만큼 동화구연비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획하고 시작한 일에 나 혼자 목돈을 덥석 움켜쥐는 건 양심에 걸려 늘 받은 돈은 공동의 돈으로 저장해 놓고 회식이나 모임원들의 생일날 함께 사용했다.
“ 보라야. 그건 너 능력 껏 번 돈인데 이제 이만하면 우리도 많이 신세 졌어~ 그건 따로 모아놔 결혼자금으로~ 능력이 좋으니까 생각보다 결혼자금 빨리 모을 것 같은데?”
8살, 3살 남매를 키우면서도 하고 싶은 일은 꼭 하는 엄마가 되겠다고 늘 말하는 세희언니가 불쑥 입을 열었다.
“ 아~ 아니에요~”
손사래를 쳤지만 나보다 나이도, 연륜도, 배려심도 많은 그들은 모두 하하 허허 사람 좋은 표정과 웃음으로 일단락시켜 버렸다. 그래서 얼떨결에 통장에 500만 원이 생겼다.
‘ 이렇게나 많았나? 그냥 이길로 확 나가버려?’
보라는 생각하면서도 본인이 어이없는지 가볍게 웃어버렸다.
사람도 좋고 돈도 좋고 잉여시간을 알차게 쓰고 있다는 자기 계발적 기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보라가 책을 복원하는 일을 하면서, 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감정이 풍만해진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부유하고 있는 쓸데없어 보이는 자잘한 감정들마저 의미 있게 다가와 보라의 신체 한 부분에 콕하고 박히는 기분이 들었고 꼭 그런 감정들이 보라의 자양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감이 총동원되는 그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작은 방법들을 예측해 볼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문득 보라는 이 작은 발판이 또 다른 곳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꽃봉오리마다 터지고 싶어 안달이던 그 봄날, 호수 앞에서 우연히 만난 보라와 기석처럼.
책을 복원하는 일을 하다 우연히 만난 아기 참새 같은 아이들처럼.
손으로 시작해 입으로 돈을 벌고 있는 자신의 모습처럼.
세상은 여러 갈래의 길로 저마다 의미를 부여하고 또 덕분에 숱한 연결고리들로 새로움을 창조할 수 있는 최고의 놀이터일 수 있으니 말이다. 보라는 그걸 알기 때문에 뭐든 조금 더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보라는 보라만의 방식으로, 기석은 기석만의 방식으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고 때론 완벽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방전된 에너지를 다시 충전하기도 했다.
보라와 기석은 함께했지만 때론 서로의 지극히 자폐적인 상황을 존중해 주었다. 보라와 기석은 그 점이 서로를 더 밀도 있게 사랑할 수 있게 돕는 지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야근이 부쩍 잦아진 기석이 저녁 전화를 걸었다.
“ 보라야~ 우리 오랜만에 학교나 가볼래?”
“ 지금? 9시야. 학교 가서 뭐 하게?”
“ 4월이잖아. 우리 학교 가서 에너지 좀 받고 오자.”
“ 청춘의 기 이런 건가요? 좋아. 알았어. 시간 아끼자! 경영대 앞 벤치에서 봐. 우리의 첫 만남 장소.”
“ 으... 무서운데.. ㅎㅎ 알았어. 거기서 만나.”
보라와 기석은 경영대 앞, 큰 호수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그들의 그날을 추억했고 보라는 이제는 마음 편하게 모든 걸 얘기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입을 뗐다.
“ 나 사실 그날 이 학교 호수에 빠지고 싶었던 것 같아. 다른 곳 말고 여기면 뭔가 위안이 될 것 같았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아. 그때 나타난 거야. 내 앞에.”
“ 알아. ”
“ 알아? 뭘?”
“ 도서관에서 널 처음 본 날이 호수에서 본 날보다 일주일쯤 전이었나? 하도 사는 게 재미없어서 난 그날 자퇴를 해버리려고 했거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다른 동기들 취업소식 들려오고 누군 유학을 갔다더라 누군 아버지 회사 아래에서 인턴 밟고 있다더라.. 이런 것들 들을 때마다 그냥 웃고 담담한 척 넘어갔었는데 내가 엄청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자식이었더라고. 담담한척하는데 위경련이 일어나는 거지. 괜찮은 척 쿨한 척하는데 술이 당겨.
그런데 모르겠더라고. 내 인생 어떻게 흘러가게 해야 하는지...
그래서 정신이나 차려보려고 철학책 한 권 읽어봐야겠다 싶어 그날 도서관에 들어갔거든. 저번에 집 근처에서 잠깐 인사했던 이모부 기억나?”
“ 응 마트 앞에서 봤었던?”
“ 응. 그 이모부가 대학도 철학과 나오고 철학으로 우리 이모 속 꽤나 썩게 한 분이거든.”
“ 철학으로도 속을 썩게 할 수 있나? ㅎ”
“ 그럼 세상살이.. 인생살이.. 소크라테스가 말했지.. 헤겔이 말했지.. 끝도 없이 나오는 철학자 이름에 이모가 나중에 욕지기가 나온다고 하더라. 지겨워 죽겠다고. 그래도 내가 볼 땐 이모부가 좀 멋있어 보였거든. 세상을 자기가 주도해서 끌고 가는 그런 모습이 멋져 보였다고나 할까?
다 가는 대기업 뭐 이런 거 아니더라도 만족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힘이 꼭 철학책 속에서 나올 것만 같은 희망이 느껴져서.. 그날 난생처음 그 구석까지 들어가 본거야. 그런데 거기 네가 있더라?”
“ 그날 날 봤었다? 일주일 전에?”
“ 그렇지. 바닥에 앉아서 같은 페이지만 한 시간을 보고 있는 너를 나도 관찰했지. 넌 철학자일까 이상한 종일까...ㅎㅎ”
“ 네가 잠깐 짐 두고 화장실을 가길래 펴있는 연습장을 슬쩍 봤는데 커다란 호수 중간에 네가 빠져있는 그림을 볼펜으로 그려놨더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네가 생각나는 거야. 이름도 몰라.. 나이도 몰라.. 그냥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두 눈빛이 계속 떠올라서 매일 호수 앞을 어슬렁 거렸어. 널 본 날도.”
“ 그래서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상황처럼 짜잔 나타난 거구나?”
“ 근데 가까이에서 보니까.. 아 왜 이렇게 예뻐. 눈동자는 또 왜 이렇게 반짝이는 건데?”
“ 아.. 모야 진짜.. 우리 진짜 둘 다 이상해.”
“ 넌 내가 널 살렸다고 하지만 나한테는 보라 네가 생명의 은인이야. 다시 힘내서 세상을 살게 해 줬으니까. 자격지심 따위 안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도 괜찮은 인간일 수 있다고 알게 해 줬으니까. ”
“.... 내가 대단한 일을 했네..?”
보라는 기석을 슬쩍 바라봤다. 기석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보라의 머리를 매만지며 흩트렸고 보라는 오른팔을 기석의 왼쪽 팔 사이로 넣어 팔짱을 꼈다.
“ 보라야. 우린 어떤 삶을 살까?”
“ 음... 오감이 충만한 삶?”
“ 오 좋다 그거. 매일매일 감각에 충실하며 사는 삶.”
“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보이는 거야~~ 하하”
보라와 기석이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꽉 잡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보라의 머리칼을 살짝 날렸고 덕분에 노래가사처럼 샴푸향이 더 잘 보였다. 기석이가 무심히 접어 올린 셔츠 아래로 오늘따라 더 불뚝 성나있는 굵은 핏줄을 보라는 검지 손가락으로 살살 매만지다 기석의 볼에 뽀뽀했다. 셔츠에서는 기석의 땀 냄새와 늘 보라를 기분 좋게 하는 그의 로션냄새가 보였다. 시각의 후각화. 촉각의 시각화. 미각의 촉각화...
보라와 기석은 오감을 충족시키는 4월 저녁을 만끽하고 있었으리라..
보라와 기석이 입맞춤에 집중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가 흘러나왔다.
키스를 하다가 둘이 순간 웃음이 터졌고 기석이는 얼굴을 맞대고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면 꼭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입장하자고. 보라는 ‘만약에’라는 어중간한 단어가 주는 어정쩡함 때문에 갑자기 분위기를 싸하게 하는 갑분싸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다. 덕분에 기석과 보라는 계속해서 키스를 할 수 있었다. 완벽한 오감충족의 시간이야. 보라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