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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책배우자

혹시 내가 유책배유자야?


         

#1. 


“네가 임원이야? 지금 몇 시야? 어?!”

임원도 아닌 주제에 난 늦잠을 오지게도 자고 말았던 것이다. 숙취에 힘들어하며 눈을 떴을 때 아직도 어두운 바깥명도에 안심했다. 숱한 경험상 지금의 어둠은 새벽 5시쯤의 어둠이었으니까. 술은 덜 깼지만 밝음의 정도는 본능적으로 잘 알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이랄까. 아무리 술을 많이 먹어도 그 시간에 맞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고 가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5시 같은 어둠 덕에 난 한 시간 정도는 더 잘 수 있겠다고 판단하며 다시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그날은 잘 내리지 않는 블라인드가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다. 

회사생활 10년, 철저하게 가려 빛을 차단한 그 블라인드가 나에게 치명적인 오명을 남긴 것이나 다름없다.      

-여보, 나 오늘 팀장한테 완전 박살 났어.

-응 나한테도 한 번 더 나야지?     


아내의 분위기를 좀 파악할 심산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답문이 온다는 것은 화가 덜 났다는 것이다. 문장이 짧고 이모티콘이 없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알아서 기어야 하는 상황. 아무리 일이 많아도 오늘은 최대한 일찍 퇴근해 같이 저녁을 먹고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하여 보면서 야식이든 뭐든 먹어야 무마할 수 있다. 간단히 한잔 마시고 들어간다고 약속을 한 게 화근이었다. 약속이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 하는 게 법칙인 사람과 사는 남편에게는 사소한 약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키지 못할 거란 걸 뻔히 알면서 이번에도 간단히 한잔 마시고 일찍 들어간다는 말을 내뱉었고 결혼생활 10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도 고쳐지지 않는 악습관이라며 아내는 단단히 화가 났다. 

내 아내는 능력 있는 이혼전문변호사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아 더 매력적이었다며 이혼전문변호사로 자리 잡은 이유를 나에게 설명해 주었지만 아내가 가끔 내뱉는 서류 속 상황들은 정말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 맞나 싶은 것들로 수두룩했다. 그리고 때로 그 서류들은 우리들의 결혼생활을 상대적으로 더 행복하게 느끼게끔 만들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대학 때 같은 과에서 만나 연애를 할 만큼 하고 결혼을 했다. 대기업 법무 팀으로 입사해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아내보다 내가 더 낫다는 무언의 확신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고속도로를 달리려 시작할 때 아내는 더 빠른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 덕분에 겸손함을 배웠다. 

그녀는 나보다 돈도 더 많이 번다. 야근과 회식은 사회생활의 연장선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보란 듯이, 그녀는 야근과 회식도 거의 없이 사회생활의 연장선을 잘 이어나가고 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한 여자들의 넓은 허용범위를 몇몇 동료들은 부러워하기도 했다. 늦은 귀가에는 후한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는 불같이 화를 냈다. 그게 우리 부부싸움의 90퍼센트를 차지했고 난 늘 그녀에게 유책배우자였다. 

어느 날 그녀는 알랭드 보통 책을 한 손으로 든 채로 말했다. 

“ 결혼이 뭔지 알아?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기이하고 불친절한 행위. 당신이 딱 이 글귀랑 똑같아.”


그녀는 그녀만의 아우라가 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프린트된 서류들을 훑어볼 때나, 두꺼운 책을 읽을 때 유독 그렇다. 결혼 10년 동안 발견한 그녀의 새로운 모습은 너무나도 많았다. 집안에서는 최대한 회사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가끔 소파에 앉아 서류뭉치들을 바라보며 연필 끝을 입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나, 뭔가 집중하면 입이 살짝 나오고 그 입 근처에는 연필 끝이든 커피든 뭔가가 늘 함께하는 것이나, 안경을 끼고 일을 하다가 뭔가 다른 일이 생각나면 그 안경을 머리로 살짝 올려 머리띠처럼 사용한다는 것이나.. 뭔가 작정하고 ‘한 시간 정도 날 건들지 마시오.’ 할 때는 파마기가 거의 다 풀린 긴 머리를 무심하게 위로 질끈 묶을 때 나는 그녀에게 경이로움을 느낀다. 때론 공포감도 느낀다. 때론 아주 때로는 섹시함을 느낀다. 

10년 동안 변함없는 이 사소한 과정은 그녀의 성격을 반증한다.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는 사람. 

어떠한 상황에도 아침 6시에 눈이 떠지는 나의 신체반응도 비슷한 맥락 아닌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녀와 꽤 어울리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믿고 있다.           



# 2


밖은 조금 더 밝았을 것이다. 방 안의 햇빛을 모조리 삼켜버린 블라인드는 퍼질러 자고 있는 나를 조롱하고 있었겠지.  출근하면서 나를 깨우지도 않고 블라인드까지 내려놓고 간 아내의 행동은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사회생활에는 지장 안 가도록 서로 배려라는 것을 했었던 우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아내는 조용히 준비하고  현관문을 혼자 나섰으며 블라인드도 최대한 조용히 내려주었을 것이다. 평생 동굴 속에서 숙면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팀장에게 한 소리 들은 나를 동료들은 회사 메신저로 위로했다. 일부러 담담한 척하며 웃어 보였지만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도 있는데 대놓고 한소리 듣는 건 사실 자존심 상하고 짜증 나는 일이다. 

어제는 사실 팀 전체회식은 아니었다. 마음 맞는 동기 몇 명이랑 만나 그냥 서로 사는 얘기를 나눴다. 결국 같은 회사 동기인지라 회사 이야기로 귀결되긴 했지만 서로의 일상, 서로의 관심사, 서로의 현재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편했고 술이 술술 들어갔었을 테지만. 술이 술술 들어가면 인생도 술술 꼬여버릴 수 있다는 것을 왜 잊고 있었는가.

나이가 비슷하고 결혼주기도 비슷해서 희수,동욱 우리들은 이렇게 시간이 맞으면 가끔 만난다. 몇 번 함께한 연말 송년회 덕에 아내들끼리도 서로 친한 편이고 둥글둥글하게 잘 흘러가는 걸 보면 서로의 코드도 꽤 잘 맞는 편이다.      

“아.. 나 요새 와이프랑 좀 그래.”

“뭔데 또, 잘해라 좀.”

그날 나와 동갑인 희수는 뜬금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결혼 10년이 다 돼가는 부부들이 신혼처럼 알콩달콩 할 수 없다는 건 기혼자라면 알고 있는 사실일 터이니 그냥 잘하라는 말로 넘겼는데 희수 이놈의 표정이 평소와는 다른 거다. 

“형, 뭔 일인데요? 말해봐요. 표정 심각한데.”

늘 분위기를 살뜰하게 챙기는 동욱이가 티 나지 않게 희수의 감정을 매만진다. 늘 후배들을 살뜰히 챙기고 다정다감한 남자로 정평이 나있는 친구인데 회사에서 인정받는 그 장점이 집에서는 늘 싸움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늘 친절하고 세심한 남자에게는 늘 사람들이 따르는 법이다. 거절을 잘 못하니 이 사람 저 사람 부탁도 많이 하고 고마움의 표현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전 교육파트에 있는 희수는 신입사원들과 함께 워크숍을 갔었다. 우스갯소리로 늙다리가 가서 아재개그 같은 거 함부로 치지 말라고 당부를 했지만 내심 희수를 부러워했다.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에 발만 함께 살짝 넣어도 그들과 동일시될 것 같은 착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는 약간의 일탈. 

희수는 가서도 분명 어마어마한 친절들을 베풀고 돌아올 것이고 분명 문자에는 젊은 신입사원들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짱. 같은 멘트들이 수북하게 쌓여있겠지. 

희수는 3년 전쯤 신입사원이 보낸 문자 하나로 곤욕을 치른 전적이 있다. 그래서 오해가 될 만한 문자는 알아서 자체 검열해 삭제한다. 철저하게. 그런데 술이 화근이었다. 

워크숍에서는 교육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할지언정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떻게든 기회와 시간을 만든다. 단합이라는 단어로 그럴듯한 포장을 하고 즐거움이라는 개인적 쾌락을 충족하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가능한 일이다. 워크숍에서 인연이 된 둘, 셋이 모여 한 잔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선배가 후배를 부르고 후배들이 신입동기를 부르는 식으로. 비엔나소시지 같이 줄줄이 연결된 고리는 꽤나 길었고 그 사람들은 술이 취하면 조금씩 보이지 않는 그룹으로 나눠져 자리를 옮겼다. 

술에 취해 어떻게 자리가 옮겨졌고 누구와 끝까지 술을 마셨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원래 기억나지 않는 게 정상 아닌가...) 그날 술자리에서 희수는 신입사원 두 명과 옆 팀 황 대리, 같은 팀 조 과장과 함께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 문자를 보니 신입사원들은 선배님 감사해요. 선배님 같은 따뜻한 분과 회사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같은 풋풋한 문자를 남겼고 하트 이모티콘으로 도배가 되어있었으며 언제 찍었는지 모를 사진도 6장이나 있었던 것이다. 희수와 그 새내기는 다정해 보였고 어떤 부인이 봐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만한 거리었으며 손을 맞잡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집으로 들어가기 전 휴대폰을 꼼꼼하게 살펴 지우고 정리해 말끔히 들어갔을 희수였지만 그날은 인사불성이 돼 와이프에게 온전히 다 보여주게 됐던 것이다. 


“ 미친 자식. 너 요새 잘못하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한다. 아 이 자식 진짜..”

“ 아 이분 이번에 신입사원 오나리 맞죠. 예쁘다고 엄청 인기 많던데.”

동욱도 사진 속 여자를 아는 모양이었다. 

“ 야 너 이런 말도 성희롱인 거 몰라?”

“ 아.. 짜식. 와이프 이혼전문변호사라고 따박따박 걸고 넘어지기는 내 상황 어떻게 하냐고 말을 해보라고. 회사에 전화를 하시겠단다. 무작정 회식은 나가지 말라는데 환장하겠고 결국 먹게 되면 그날은 뭐 전쟁인 거고.. 이 짓을 3개월째 한다.”

“안 죽인 게 어디냐. 신체접촉 아예 금물, 이거 교육도 받은 놈이 몰라?”

“기억이 안 나니까... 그게 문제지.. 하... 사진은 누가 찍어서 골치 아프게.”

“그 신입사원은 연락 안 오지?”

“ 당연하지 따로 연락할 일이 뭐 있냐. 그냥 그날 어찌하다 보니까 들어가면서 문자 보낸 것 같고 그 뒤론 오며 가며 회사에서 마주치는 거지 뭐.”

“야 조심해, 요즘 사진이나 문자 골치아파. 오해가 한 번 생기면 이게 상상이 더해져서 무서운 거야.”     

나는 문득 술이 문제인지, 술을 마시며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이 문제인건지, 찍힌 사람이 문제인건지, 

문자가 문제인건지 하트가문제인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아마 와이프가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진은 이혼 접수 시 증거자료로 제출 가능하고 문자의 이모티콘도 상황에 따라서는 판단에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 할 것이다. 이혼시 위자료, 양육권등등 각종 단어를 남발하며 변호사로서 변호인의 입장에서 변론을 하겠지. 내 아내의 변호인은 아마도 아내 아닐까 생각하니 갑자기 희수가 짠해보였다. 



#3


이혼전문변호사인 아내는 철저하게 일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서류를 슬쩍 보려고 하면 연필로 손등을 톡 치면서 눈빛을 발사한다. ‘꺼지셔.’ 

이 또한 신청인을 보호해야 하는 변호사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일상에서 그런 사건의 정황들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 세상에 별의별 년 놈들이 다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내 아내는 대화 중에 유책배우자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직업병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론 그 유책배우자라는 말의 억압과 힘이 꽤나 대단해서 사람의 마음을 졸아버리게 만들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이 약속이라는 범위도 나름에 따라 유책이 될 수 있다면서 나에게 조근조근 설명하려 들었고 너무나 객관적이고 분명한 설명에 난 금방 풀이 죽어버렸다. 일반적으로 아는 불륜이나 성격차이뿐 아니라, 언어. 신체적인 폭력, 종교적인 갈등, 고부갈등 이유도 종류도 다양했다. 

정답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둘만의 보이지 않는 감정 역시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었고 그랬기에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술 먹고 잠자리를 하자고 요구하거나, 문자나 여타 다른 상황들로 오해의 소지를 만들 때 난 거하게 한 판 깨지면서 일장연설을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결혼생활의 신뢰도를 깨뜨리는 것은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줄 뿐 아니라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활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야기하는 것이라며 늘 강조하곤 했다. 그녀가 나에게 힘을 주어 말하는 이런 것들의 화두는 ‘정신 차리고 잘해라.’였다.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라는 것.  


술 한 잔을 털어 넣고 희수는 계속 말했다.

“이혼서류 내밀더라.”

동욱이는 놀란 토끼눈을 해서는 말했다.

“ 아 선배! 사진 하나로 이혼은 너무 한 거 아니에요?”

“ 사진 하나가 원인은 아니지 않겠냐. 부부생활 몇 년인데. 쌓일 대로 뭔가 쌓여있으니까 이게 기름에 불 지핀핀 격 된 거지. 야 그냥 싹싹 빌어.”

나는 소주 한 잔을 털어놓고는 말을 이어갔다.

“ 이혼전문 변호사님이랑 사는 나는 오죽하겠냐. 난 매일매일이 유책배우자야. 뭐 꼬투리 하나 잡혀봐라 난 개털로 쫓겨나서 거리에 나앉는다. 그런데 또 말을 듣다 보면 이게 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자존심은 상하는데 거기다 말을 되받아치기가 힘들더라. 그냥 기어, 잘못했다 싶으면 빌고 오해가 맞다 싶으면 설명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걱정하고 술 퍼먹는다고 제수씨가 알아주냐? 답답한 놈.. 남들한텐 그렇게 잘하면서 왜 그렇게 말을 못 하냐. ”

“ 다른 사람들은 연기를 해서라도 표현이라는 걸 하잖냐. 그런데 우린 애 키우랴 일하랴 저녁 늦게 만나면 아이 같이 돌보고 아내는 옆에서 같이 잠들거든. 애 키우면 다 그런다고들 하는데 뭔 대화할 시간도 없고 얼굴이 둘 다 죽을상이라고. 거기다 뭔 얘기를 해.” 희수가 말했다. 


“아.. 선배. 형수님도 너무 힘들어서 그럴 거예요. 제 친구들 보니까 새벽까지 잘만 놀던 친구들도 결혼하고 아이 낳으니까 정말 삶이 달라지더라고요. 너무 에너지소비가 크니까 아이 재우면서 그냥 기절한다고.. 몸이랑 마음이랑 따로 논대요.”

아이가 있는 사람은 희수뿐이었고 나는 그런 전쟁육아 상황을 이야기로만 들었던 터라 잠깐 머리로 상상하며 맞장구를 쳤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다며 10년 정도는 각자 누릴 것 누리고 아이를 낳고 싶다던 것이 우리들의 약속이었다. 분명 그 약속을 지킬 변호사였다. 

아내에게 다가가는 방법조차 어려워하는 애송이 같은 남자를 내 아내는 뭐라 생각할까. 이렇게 이야기 했을까. 

“여보세요! 마음에 보이지 않게 상처 주는 것도 이거 엄청난 잘못이라고요. 유. 책. 배. 우. 자.라고요.”

아내는 늘 사소해 보이는 말 한마디가 그들의 틈을 갈라놓는 원인이 된다고 말했고, 사소한 행동 하나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도 말하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 희수의 무관심해 보이는 행동은,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은 사진과 문자들은 명백한 잘못일 것이다. 

“내가 뭐라도 하고 이런 대접을 받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뭘 그렇게 사사건건 오해를 하고 물고 늘어지나.. 피가 말린다. 피가 말려.”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옆 팀 마케팅 부서 박 부장님은 부부동반 모임이며 가족에게 살뜰한 최고의 아빠라고 정평이 나있었는데도 바람을 폈단다. 다들 알면서도 쉬쉬거리긴 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새살림을 차린 게 들통 나서 회사에서 있는 창피는 다 당했고 뒤늦게 다시 한번 사랑에 빠져버린 그는 대중의 시선도 평가에도 당당했단다. 

사실 나도 이런 것을 막연히 꿈꾼 적은 있다. 아내와 영화를 보다가 이런 비슷한 장면이 나오면 주인공에 나를 살짝 도치시켜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소심한 상상 말이다. 

‘만약 내가 저 상황이라면, 나에게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온다면?’ 같은 생각들. 

난 그런 생각들을 아내에게 가끔 이야기했고 아내는 웃으며 맞받아쳤다. 


“ 여보. 나쁜 놈들이 바람피울 것 같지? 아니다? 엄청 순진하고 엄청 안 필 것 같은 그런 사람들 있지? 그런 사람들이 원래 눈 돌아가면 정신 못 차리는 거야. 어디 보자... 우리 남편은 그럴 인물은 못되고 또 모르니까 만약에 피고 싶다.. 싶으면 완벽하게 숨기든지 아니면 말해. 정상참작이라도 해줘 보게.”

농으로 말하고 농으로 되받아치는 그냥 가벼운 대화정도였다. 


희수가 입을 뗀다.

“ 나 딴 여자 만난 적도 있어. 그냥 이 현실이 너무 싫을 때 있지 않냐? 일하다 들어가서 눈치 보고 애보고.. 설렘도 없고 뭐 재밌는 것도 없고..토킹 바 가서 혼자 홀짝거리는데 거기서 내 말에 그렇게 호응을 해주는 분이 있는 거야. 명함하나 건네줬는데 연락 와서 따로 두 번 정도 만났어. 그 바에서 만나긴 했지만.. 그런데 야, 설레더라. 그렇게 날 보고 웃어주고 인정해 주는데 집에 가서 내 와이프 얼굴 보면 세상 내일 떠나는 사람 같은 얼굴인거지. 그래서 그 바를 또 가. 2차.. 3차 끝나고 마무리로 거길 항상 들르게 되더라고. 책임질 게 없잖아 그래서 이러다 바람나겠다 싶길래, 그 길로 바 안 간다.”

“미친.. 놈.. 야 어디 가서 이런 얘기하지 말아라.”

“ 야 뭐 내가 뭔 짓을 했냐. 그냥 잠깐 설레었던 것뿐이라고.”

“ 그래, 네 감정인데 내가 뭐 어쩌겠냐만 그래도 마음 잘 잡아. 너 요새 진짜 불안 불안해 보인다. 엇나가면 한도 끝도 없어. 박팀장 생각해라. 너. "

희수는 휴대폰 액정을 터치해 배경화면에 부담스럽게 걸려있는 수민이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봤다. 

“ 야 한잔 더하자.”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 한 없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갑작스럽게 대면했다. 나쁜놈. 

나는 캔을 움켜쥐며 희수에게 말했다. 나쁜놈이라고.


     

#4


2차, 3차까지 가면 희수가 또 그 바를 들를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그날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이 좀 그러니 희수를 집까지 좀 데려다주고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희수가 아파트로 비틀거리면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 다시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너무나 자연스럽게 잊고 살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그런 표정을 본 건 19살, 수능을 앞두고 있는 여름 막바지였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 비틀거리는 한 사람이 택시에서 내렸다. 아빠,라고 부르려다 목구멍이 막혀버렸다. 뒤따라한 여자가 내렸고 그들은 손을 잡고 걸었다. 집이 아닌 반대방향으로. 나는 그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집과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했다. 아빠의 활짝 웃는 얼굴을, 호탕한 음성과 제스처를 난 19년 만에 처음 봤다.

아빠는 적당하게 술이 취해있었다. 차라리, 인사불성이 돼서 지금 내가 어디서 누구와 이렇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원망스러웠고 불안했다. 

‘혹시나 동네사람들이 지나가지는 않을까?’

‘이 장면을 엄마에게 달려가 전하지는 않을까..?’

아직도 그 심장 뛰던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느껴진다. 자기가 가정을 꾸리는 동네에서 낯선 여자와 그렇게 하하 호호거릴 수 있는 대담함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 대담한 모습을 집에서는 어떻게 철저하게 숨길 수 있는지 의아했다. 도서관에서 새벽 2시에 나와 집으로 향하면서 아빠와 낯선 여자의 모습을 몇 번 더 목격했다. 그리고 그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될 무렵 아빠는 엄마에게 뭐 잘한 일이라고 그 짓거리를 이실직고했다. 진실하고 싶었단다. 

그 얘기에 혼잣말이 크게 새어 나왔다.

“미친놈.”

가족밖에 모르고 남편의 성공을 위해 내조하는 게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초라한 엄마는 그날 무너졌다. 그 남자는 고3 수능준비를 하는 아들을 남겨두고, 쓰러져서 울고 있는 엄마를 남겨두고 캐리어 두 개를 들고 집을 나갔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가 돌아온 건 5년 후.. 몸에 병 하나를 달고 나타났다. 염치도 없이.

엄마는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을 힘겹게 이겨냈고 같이 맞바람이라도 펴버리겠다고 말하다가 나에게 사과하며 눈물 흘렸으며, 아빠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려고 매일 버리고 태웠다.

며느리에게 자신이 겪었던 그 이야기를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다며 쏟아내면 내 아내는 늘 팩트와 감정을 지혜롭게 섞어 엄마를 진정시켰다. 

“ 이혼소송이라도 걸어보시지 울 어머님, 제가 더 일찍 시집올걸요. 울 어머님 도와드리게.”

“ 그것도 뭘 알아야 하는 거야. 마음은 죽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고 눈앞이 깜깜하더라. 그냥 대학 가는 아이 앞길만 안 막으려면 돈 벌고 허튼 생각 안 하고 버티는 게 답이었지 나한텐..”

“ 아! 엄마. 그 얘기 이제 그만해. 뭔 아빠라고 또 품어줘 품어주긴.”

엄마는 돌아온 그 사람, 몸에 병 하나를 달고 온 그를 다시 품어주었고 지겹게 병시중을 했다. 그는 19년을 함께한 가족을 5분 만에 등지고 나가 5년이란 시간 묵묵히 그들만의 행복을 누리다 후회로 돌아온 것일까, 반성하기 위해 돌아온 것일까. 

난 죽음으로 죗값을 받기 위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그 모습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고통스럽게 눈을 감던 그의 모습과 벤치에 앉아서 낯선 여자에게 보이던 행복한 미소. 엄마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그 미소를 날리던 그의 얼굴을 늘 겹쳐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를 갈았다. 어디서 바람은 유전이라는 말이 들리면 난 그 인간과 같지 않다고 소리쳤다.   

내가 느낄 때는 아빠엄마의 부부사이는 평화로웠다. 얇은 균열자체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편안한 마음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었다. 가족여행이며 친척행사에서도 늘 금슬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 부모님이었다. 그랬기에 난 이런 부모님의 처절한 마지막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빠가 아니라 그냥 남이라고 생각하며 지낸 오랜 시간, 엄마도 나에게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또 한 번 품어줄 수밖에 없는 엄마를 욕하라며 날 진정시켰던 시간. 

그 시간이 갑자기 뒤엎어진 것이다. 왜 난 그가 떠오른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희수는 다정다감한 인간이 맞지만 그의 아내에게는 늘 갈증 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미소를 한 번 보여주겠지..’ 평생을 기대하게 만들고 기다리게 만드는 그런 사람. 사진 속 자신이 남편의 표정에서 내가 그날 느꼈던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지. 순간 나는 희수가 아니라 희수의 아내가 이해됐다. 

택시를 타고 가며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고 있어요.”

“응, 나 집. 일하고 있을게.”


달달하지 않지만 간단하고 명료하며 군더더기 없는 현실부부의 문자란 이런 것이다. 길지 않고 과한 애정이 스며있지 않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애정은 더 깊고 밀도 있으리라. 

창 밖에 보이는 커플들은 모두 손을 잡고 있다. 무제한 안주 노래바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저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는 여자는 노래방도우미일 것일까. 그는 집에서 못 받는 인정을 그녀들에게 받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가겠지. 진한 향수 향이 옷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술기운에 잊은 채로. 

다정하게 밀착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걷는 중년의 두 사람이 보인다. 그냥 딱 봐도 부부인 사람. 눈에 띄지 않지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힘이 느껴지는 법이다. 관계의 시간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풍겨지는 그런 힘. 

그녀는 머리를 질끈 묶고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서류를 보며 연필 끝을 물고 있다. 그 모습이 순간 너무 사랑스럽다. 갑자기 섹스를 하자고 하면 이것도 이혼사유가 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이 순간을 그냥 넘어가는 것 자체가 유책배우자지 하며 그녀와 입을 포갰다. 

그녀가 나를 껴안았다. 우리는 그렇게 부부의 사랑을 만끽했다.   

        

#5


그날 희수와 한 이야기는 절대 남발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누군가의 입에서 희수의 상황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길 바랐다. 희수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메신저가 아니라 문자였다.

“ 담배 한 대 콜?”

옥상 우리들의 아지트는 담배연기가 하늘로 잘 날아간다는 착각 때문에 아직도 애용하고 있는 비밀의 공간이다. 흡연실이 따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냥 옥상으로 올라가 한 대 빨고 내려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으니까. 누군가 컴플레인을 걸어 옥상 문이 강제로 닫혀지지 않는 이상 우리들의 일탈도 이 공간에서 계속될 것이다. 

전자담배 열풍이 불더니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전자담배 예찬이다. 맛도 다양한 데다 티 안 나게 몰래 피우기도 좋다나 뭐라나. 

내 아내도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몰래 피고, 거짓말하며 펴대는 걱정하나는 덜었으니.

“ 어제 얘기 좀 하자고 했더니 울더라, 와이프가.”

“ 야 잘했다 그래도 잘했네. 내가 데려다준 게 큰 힘을 발휘했고만!!!”

분위기를 좀 가볍게 만들어보려는 마음이었지만 생각보다 분위기는 쉽게 가벼워질 수 없었다. 

“ 힘들단다. 자기 만나는 사람이 있대.”

“...... 응? 뭐? 제수씨가?”

“ 응. 너무 외롭고 우울하고 자기 마음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래. 남편은 남 같고 그 사람은 자길 토닥여줬다나 뭐라나.”

“... 참나 누군데 그 새끼는?”

“몰라. 그걸 뭘 더 물어봐. 그런데 나.. 화가 안 나더라? 이상하게..”

아주 이상한 것 맞았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 전자담배로 그 새끼의 눈알을 후벼 팔 것 같은 분노가 솟구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이,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결혼을 보여주는 대답일지도 몰랐다. 

결혼이라는 요망한 것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공간과 시간이니까.

“ 그런데 내가 화를 안 내니까 그걸로 또 난리를 치더라고. 이것 보라고 이럴 줄 알았대. 다른 사람한테나 온 마음 다 쏟지 나는 남보다도 못한 인간이었다고 짐승처럼 울부짖는데 애는 깨서 울지.. 그냥 미쳐버릴 것 같아서 뛰쳐나왔다.”

“ 그래서 너, 바 간 건 아니지?”

“ 에라이.. 야야.. 가고 싶더라. 됐냐? 안 갔어.”

“ 잘했다 희수야. 잘했어. 좀 생각해 보자 상황을.”

전자담배에서 나오는 희뿌연 기체가 우리의 공간을 아득하게 만들어버렸다. 뿌연 기체 속에 갇힌 것 같은 우리들은 지금 상상 속에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희수는 담담하게 일했고, 덤덤하게 회식에 참여했다. 

2차, 3차 후에 바를 가는지 안 가는지는 이제 내가 간섭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희수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고 아내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동요 없이 듣는 자세가 영락없는 이혼전문변호사였다. 

“ 그래? 증거가 있대? 심증만으로는 뭐든 쉽게 말하면 안 돼. 영미 씨 아마 일부러 떠보려고 말했을 수도 있고. 희수 씨가 영미 씨 한테만 유독 내색 안 하잖아. 아휴..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자기는.”

증거..

어떤 증거가 그들의 승산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카드내역서? 문자나 통화기록? 블랙박스?

둘만의 깊은 관계의 시간이 증거물 수집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못할 짓 같았다. 

“ 자기야. 우리 둘이랑 희수씨네랑은 또 다를 수 있는 거야. 내가 만났던 사람들도 그렇고 상황에 따라 얼마나 일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아이가 있으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범위의 일들이 존재하거든. 우리는 절대 모를 수 있는 것들... 아마 아이가 있으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 일 테고.”

‘우리 아빠도 아이가 있었다. 19년 동안 살 비비며 살았던 아들, 내가 있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아이가 있든 없든 그건 부부만이 아는 그들의 상황일 뿐이다.

“ 영미 씨 이혼 두려워하는 분이야. 난 그거 알아. 영미 씨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 안 나? 엄마가 이혼하던 날 얼마나 울었었는지 그 얘기할 때 자기들은 정신 놓고 술 먹었었지? 여자들 다 울었었다고.”

“아... 그랬었... 어?..?”

각자의 돌덩어리 하나씩은 있는 법이고 내가 지녀온 그 무거운 돌덩어리가 누군가에게 돼 물림 될까 두려운 것, 당연한 일이었다. 희수도 어쩌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그녀가 정말 나쁜 마음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혼 상담 오는 사람들 중에 절반은 울면서 나가.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누구는 아이를 생각하고 누구는 연애시간을 떠올려. 누구는 이혼한 아빠엄마를 떠올리고... 헤어지면 다 될 것 같다던 사람들도 이야기하다 보면 울면서 그렇게 헤어지고 싶다던 남편이랑 아내를 두둔한다니까. 이상하지? 물론 서로 물어 뜯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그 안에서도 아직 남은 애정 때문에 가슴치는 사람도 있는거야.”

난 이혼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늘 원고, 피고, 의뢰인, 소송, 이혼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이혼전문변호사 아내의 말들이 늘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혼을 원하지만 정말로 이혼을 원하는 건 아니라는 사람이 있다는 모호한 말은 늘 어려웠고 이혼상담은 여고생 때 연애상담과도 비슷해서 마음을 활짝 열고 경청해야 제대로 들린다는 말은 재미있었다. 

“여보 난 유책배우자야? 이혼 사유 감 있으면 말해 줘 봐.”

“유책배우자였으면 나랑 이렇게 누워있겠어? 일방적인 잘못은 없는 것 같기도 해. 그래서 어렵지만.”


희수네는 이혼까지 결심한 듯 부부가 난리를 치더니만 정말 결국 하지 않았다. 

“ 야 내 속사정 다 까발린 사람 네가 처음이다.”

“ 잘했다 이 자식아. 좀 엄한 길로 가지 말고 사람 심장 쫄깃하게.”

“ 이혼이 뭐 죄냐. 그런데 영미랑 나는 이혼이 답은 아니더라고. 나도 조금씩 배워가는 거지 뭐. 우리 공주 이 났다 사진 좀 봐.”

“이혼얘기에 갑자기 아기 이 얘기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이놈아.”

“ ㅋㅋ 너도 애 낳아봐라. 기승전‘애’다.”

“그래 좋다. 너 웃으니 이제 내가 살 것 같다. 너 그 귀한 아이 너랑 영미 씨의 합작품이라는 거 잊지 말라고.”

“낳아보지도 못한 자식이 훈계 질은.”

“ 나도 곧 아빠 돼 뭐! 헛... 아... 말하지 말랬는데..”

중간에 임신이 됐다가 자연 유산된 경험은 우리 부부에게 아픈 추억이다. 그 기억 때문에 지금도 아마 불안했을 것이다. 10년동안은 임신 대신 일을! 약속은 무산됐고 안정기까지 어디다 말하지 말라던 아내 말을 이번에도 안 들었다. 약속을 이렇게나 어겼으니 이번에도 난 유책배우자가 됐다.

난 아내에게 말하고 싶었다. 대한민국 부부 중에 어디 한 명 유책배우자 아닌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들만이 아는 시간이 때론 그 ‘유책’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으며 그 ‘유책’으로 사람답게 다시 살아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하긴.. 나도 그놈의 유책배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더 좋은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 남편 중 하나일 테니까.

난 오늘도 내 아내의 유책배우자다. 

유책배우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유책배우자. 

평범한 대한민국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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