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장, 그리고 30년의 기억

머리칼과 시간사이

by 지오쌤

방배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강 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의 머리를 자르러 일요일에 와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미용을 배워 10년 넘게 이 업종에서 일했다.
경력으로 보나 기술로 보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그녀가 여전히 나를 ‘헤어디자이너’라 인정한다.
특히 컷을 잘하는 원장으로, 말하자면 강 원장은 딱 하나뿐인 나의 ‘야매 손님’이다.

30여 년 전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져 왔다.


그녀는 특별히 싹싹하거나 뛰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늘 변함없이 진솔하고 단단한 사람이다.


내가 샵을 운영할 때 함께 일했고, 결혼한 언니 집에 얹혀살다가 독립을 위해 잠시 우리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진솔한 됨됨이를 더 잘 알게 되었다.

한때 남편이 거래처 세관 업무를 하던 사람을 소개해 인연을 맺게 해주려 했던 적도 있었다.


그 후 강 원장은 전라도 광주에서 인연을 만났다.
건축설계를 하는 남편과 결혼해 미용 일을 접고 아들을 낳아 키웠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아들은 겨우 8개월이었다.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방 딸린 작은 미용실을 열고

다시 삶을 일구기 시작했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은 취업 준비 중이다.
강 원장은 지금도 그때 그 미용실을 지키고 있다.

나는 30년 가까이 경력이 단절된 상태였지만,
그녀의 부름에 응해 1시간 넘는 거리를 둘째 딸과 함께 찾아갔다.


그녀의 장비로 더듬더듬 강원장의 머리를 잘랐다.
본인의 요구와 내 솜씨 사이를 조율해 커트를 마쳤다.
마침 기다리던 손님이 “원장님, 훨씬 세련되셨네요.”라며 칭찬을 건넸다.

내심 뿌듯한 마음을 숨기며 안도했다.


그러나 딸은 경력 단절 미용사인 나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강 원장님, 이 아이 펌을 해주면 어떨까요? 멀리 바다 건너 휴가를 간다니 웨이브를 넣어줘도 괜찮겠죠?”
내가 물었다.

원장은 웃으며 말했다.
“엄마 솜씨가 얼마나 좋은데, 엄마 말대로 한번 해봐요.”한다.

우리 딸은 내 솜씨는 물론, 내 어떤 말도 믿지 않는다.

결국 강 원장의 조언을 받으며 둘째 아이의 펌을 시작했다.
입으로 코칭하는 강 원장과 손으로 실행하는 경력 단절 엄마, 두 명의 ‘원장님’이 한 아이 머리를 위해 팀을 이룬 셈이다.


롯드 사이즈, 와인딩 방향, 약 바르는 위치와 순서, 중화제 시간까지 꼼꼼하게

강원장의 지시를 따랐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까칠한 딸이 매우 만족했다.

펌 요금을 카드로 내겠다고 했지만, 강 원장은 거절했다.
다시 현금 5만 원을 내밀었더니, 더 강하게 거절했다.

고집 센 그녀를 꺾어보고자 “그럼 5만 원을 반반씩 나눠 쓰자.”라고 했다.
그녀는 폭소하며 거절했다.

“그럼 내 머리 잘라준 것도 제가 돈을 드려야 하나요?” 하고 되물었다.

결국 딸아이가 사용할 헤어제품 하나를 구입하며 계산을 마쳤다.


인후가 내 귀에 속삭였다.
“엄마, 지난번에 같이 갔던 파스타 집에서 저녁 먹자.”

좋다고 했다.

강 원장을 차에 태워 파스타 집으로 향했다.
루꼴라 시금치 피자, 해물 오일 파스타, 토마토 해물 라자냐, 자몽 주스까지.
한국말로 적히긴 했지만,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신세대 요리들이었다.


강 원장은 우리 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말했다.
“난 이런 음식 처음 먹어봐. 원장님 딸이 있어서 정말 좋겠네.”


그 말이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아들 하나 키운 그녀가 아직 이런 음식을 처음 경험했다면 기억에 오래 남는 식사였길 바란다.


또한 ‘왜 난 아직 우리 아들과 이런 자리 한 번 갖지 못했을까’ 하는 허허로운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딸아이 말에 따르면,
“엄마, 어느 아들이 엄마와 단둘이 파스타 집에 가겠어?”라고 한다.


항상 긍정적인 그녀.
고맙고, 미안하고, 멋진 강 원장이다.


그녀의 샵 주변은 재개발로 들썩이고,
평당 억 단위가 넘는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강 원장, 아깝다. 임대라도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요. 내 집도 아니고 관리비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그래, 그럼 이 동네 아파트는 다음 생에 살아보는 걸로 하자.”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아니, 안 살아 버리면 되지. 꼭 살아 봐야 하나?”


그 단순한 한마디가 머릿속 깊이 박혔다.
그녀는 아들 하나를 키우며 평생을 살아왔다.
8개월 아들을 안고 살던 그 자리에서, 이제 곧 60을 향하고 있다.


가끔 그녀를 만날 때면 나는 물었다.
“강 원장, 괜찮은 분 있으면 소개받을 생각은 없었어?”


“예, 내 새끼 키우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한다.


작년에 남편을 보내고 힘들었던 내 모습을, 강 원장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문득 부끄러워진다.
지금도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때, 나보다 어린 그녀가 어른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