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구두와 김밥

소풍날, 찌그러진 은박지

by 지온

가정환경조사서의 얇은 갱지가 교실을 한 번 훑고 지나가면
봄이었다.


칠판 한쪽에 소풍 날짜가 적혔다.


엄마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사달라고 말한 날이 있었다.
옷이고 신발이고 늘 물려받던 나를 안쓰럽게 여겼는지
작아진 운동화를 새로 사주겠다며 엄마가 나를 시장 신발가게에 데려갔다.


진열장에 놓인 구두에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왜? 저게 마음에 들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 운동화 대신 저 구두 사면 안 돼?”


앞코에 진주와 큐빅이 박혀 있고
얇은 스트랩이 달린 빨간 구두.
며칠 전, 자가에 산다며 손을 번쩍 들었던 윤지혜가
신고 다니던 것과 비슷한 구두였다.


소풍날 아침,
하얀 체육복 바지 아래
그 빨간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갔다.


가정통신문에는
점심 도시락과 먹고 싶은 간식, 음료수를 챙겨 오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준비물을 다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식당으로 출근하기 전
평소보다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집안에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가득했고
김밥 꼬다리는 우리 삼 남매의 아침밥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단무지, 시금치, 얇은 분홍색 소시지가 들어간 묵직한 김밥.
엄마는 옆구리가 터지지 않게 밥알을 꾹꾹 눌러
은박지에 둘둘 말아 봉지에 싸 주셨다.


수목원으로 향하는 관광버스를 타는 날.
전날 밤 아이들은 설레서 잠을 못 잤다지만
나는 다른 이유로 뒤척였다.


“너 내일 나랑 같이 앉자.”
교실을 오가던 약속들 속에 내 이름은 없었다.


늦게 버스에 올라
어디에 앉아야 할지 서성이게 될까 봐.
“여기 내 짝꿍 자리야.”
그 말을 듣게 될까 봐.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갔다.
버스 맨 뒷자리 끝쪽 구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눈을 감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과자 봉지 뜯는 소리가 이어졌다.

수목원에 도착할 때까지 잠든 척하고 있었다.


점심시간.
돗자리가 펼쳐지고
아이들의 도시락이 하나둘 열렸다.
색깔이 알록달록 화려했다.


가방에서 김밥을 꺼냈다.
찌그러진 은박지를 펼쳤다.


아이들은 돗자리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도시락을 들여다봤다.


나는 묵묵히
내 몫의 은박지를 줄여 나갔다.

손에 묻은 참기름을
체육복 바지에 쓱 닦아냈다.


그때였다.
한 남자아이가 포크를 들고
아이들의 도시락을 구경하다
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야! 김치맨 김밥 싸 왔다!”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듯
아이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 쏠렸다.

“오~ 김치맨.
김치 안 싸온 대신 김치색 구두 신고 왔냐.”


아이들이 깔깔거렸다.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순간
담임 선생님이 앞에 섰다.

선생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그 남자아이를 나무랐다.


아이들은 다시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다 먹고 이어진 간식 시간.
아이들은 서로 과자를 바꿔 먹으며 돌아다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은
여전히 소풍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누구는 도시락이 제일 맛있었다고 했고
누구는 간식을 제일 많이 가져왔다고 자랑했다.


맨 끝 창가 자리에 앉아
창문에 이마를 살짝 기대었다.
하늘이 파랗고
창으로 햇빛이 길게 들어왔다.


낡은 화물차 짐칸의 텐트를
가만히 감싸던 그 빛이 떠올랐다.
빨간 구두 위로
같은 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밤이 늦어서야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물었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소풍 잘 다녀왔어?”
그리고 다시 물었다.
“김밥 맛있었어?”


“응.
너무너무 맛있었지. 최고였어.”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그날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문 앞에 벗어 둔 빨간 구두가
어둠 속에서 조금 밝게 보였다.


괜히
발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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