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색 크레파스와 달력 뒷장
3학년이 되고 담임 선생님이 바뀌었던 그해,
우리 동네도 바뀌기 시작했다.
논 건너편에 철근이 올라가고 회색 벽이 세워졌다.
하늘을 가리는 높은 아파트가 솟아올랐다.
그때까지 나는 골목길과 논밭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동네 아이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러 그 안으로 몰려갔다.
철문이 닫히면 숫자가 하나씩 올라가는 불빛과 함께 내 몸도 떠올랐다.
문이 열릴 때마다 복도가 달라졌다.
아파트가 완성되자 학교에 새로운 아이들이 전학 왔다.
내가 살던 곳은 지금의 김포국제공항 근처였다.
아파트에는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눈이 파랗고 머리가 노란 사람도 보였다.
바람이 다른 나라에서 불어오는 것처럼 낯설었다.
전학 온 아이들은 내가 알던 골목길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중 내 앞에 앉은 아이, 윤지혜.
뻗친 데 하나 없는 단발머리, 반짝이는 큐빅 머리띠,
하얀 블라우스의 반듯한 리본, 쨍한 빨간 가디건.
검정 주름치마 아래, 흙 한 점 묻지 않은 빨간 구두.
그 아이와 나의 세계는 미술 시간에 가장 선명하게 갈라졌다.
지혜의 책상 위에는 끝이 뾰족하게 살아 있는 48색 크레파스가 층층이 열려 있었다.
내 책상 위에는 허리가 부러지고 껍질을 까내야 겨우 색이 묻어나는 몽당 크레파스들이 굴러다녔다.
엄마에게 새것을 사달라는 말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혜야, 나 하늘색 좀 빌려줄래?”
지혜는 옅은 하늘색과 짙은 하늘색, 두 개를 함께 내밀었다.
나는 그 두 가지 색으로 파란 하늘을 채워나갔다.
그림 그리는 일만큼은 자신 있었다.
집에서 매일 달력 뒷장에 선을 긋고 색을 칠하던 손이었다.
지혜는 자신이 빌려준 크레파스가 내 도화지 위에서 변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며칠 뒤, 지혜는 빳빳한 초대장을 내밀었다.
난생처음 받아본 것이었지만,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는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가장 아끼던 것을 꺼냈다.
지우개 가루 위를 굴리면 찌꺼기를 삼켜버리는 롤러 지우개.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보관만 하던 나의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그것을 쥐고 처음으로 아파트의 현관문을 넘었다.
집 안은 눈이 부셨다.
우리 집 삼 남매가 엉켜 뒹굴던 좁은 방과는 달랐다.
스무 명의 아이들이 앉아도 어깨가 부딪히지 않았다.
반짝이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피자라는 것을 처음 입에 넣었다.
바삭한 후라이드 치킨과 양념 치킨도 있었다.
엄마가 비 오는 날 부쳐주던 김치 부침개나
집에서 튀겨주던 통닭과는 다른 냄새, 다른 맛이었다.
돌아오는 길, 하얀 종이봉투 하나를 받았다.
우유 하나와 소보로빵 하나.
늦은 밤, 식당 일을 마친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겉옷도 벗지 않은 채 물었다.
“재미있었어?”
“피자랑 치킨 먹었는데, 난 엄마가 해준 부침개랑 통닭이
훨씬 더 맛있더라.”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게 진짜 내 입맛이었는지,
엄마의 숨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내민 봉투에서 말없이 소보로빵을 꺼냈다.
그리고 손으로 나누었다.
정확히 네 조각.
엄마 하나,
언니 하나,
오빠 하나,
그리고 나 하나.
우유는 내 앞으로 밀어주었다.
밖이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
방바닥에 엎드려 4분의 1조각을 베어 물었다.
부스러기가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날 먹었던 피자보다, 치킨보다,
그 작고 퍽퍽한 빵 조각이
기가 막히게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