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넷플릭스
나의 최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방송 "퀴어 아이"의 새로운 시즌이 오픈돼서 엄마랑 같이 보기 시작했다. 퀴어 아이(Queer Eye)는 인테리어, 음식, 인간관계, 패션, 미용에서 각각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5명의 멋쟁이 게이 남자들이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바꿔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인생을 바꿔주는 5명의 멋쟁이 게이 남자라니! 멋지게 변화하는 사람들이 모습을 보는게 너무 재밌다. 너무 내 취향인데, 엄마 취향에도 맞을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참고 영상 https://youtu.be/D6 c4 Eaj2 Fc4
우리 엄마와 게이 남자라니. 이제까지 이 두 단어에는 그 어떤 접점도 없었다. 사실 이 방송은 다양한 성 정체성뿐만 아니라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 미국의 역사까지 어느 정도 알아야 내용이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꽤 있어서, 엄마가 이 모든 정보를 소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 또한 나의 기우에 불과했고, 엄마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우리는 장장 2개월에 걸쳐 시즌 1부터 6까지 매일 한 두 편씩 꼬박 꼬박 밥 먹듯이 봤고, 우리의 최애 방송 중 하나가 되었다. 매회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렸고, 엄마는 왜 한국에는 오지 않느냐며 그들의 한국 진출을 몹시 바라는 빠순이가 되었다. 안토니는 너무 잘생겼고 요리도 잘해서 좋고, 조나단은 애교가 넘치고 귀여워서 좋고. 심지어 나에게 엄마를 찾아오게 영어로 사연을 써서 보내라고 압박했다. 집 인테리어좀 확 바꿔 줬으면 좋겠다면서.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 못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어떤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는지도 모르겠어서 되는 대로 살게 되는 때. 오히려 사연의 당사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어딘가 "좋지 않다, 변화해야 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본연의 매력을 알아봐 주는 다섯 멤버들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가면서 스스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외모적으로나 삶 자체가 바뀌는 마법과 같은 순간들에 큰 감동을 느낀다.
누구에게나 이 다섯 게이 친구들이 있다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주인공들에게 공감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뛰어난 공감능력이 있겠지만, 그들 스스로도 그들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바비는 기독교가 모태신앙에 가족 모두가 독실한 신도였던 만큼 자신 스스로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고, 또 커밍아웃했을 때 평생을 헌신한 커뮤니티에서 거부당하고 집을 떠나야 했던 과거로 인해 교회에 문을 열고 들어가지도 못하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시즌이 거듭해 가면서 그 스스로도 변화를 겪었고, 나중에는 오래된 교회를 수리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내기도 했다.
게이, 성전환자, 흑인, 백인, 이민자 등 출연자들을 규정하는 수많은 다양한 정체성은 엄마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개념들이었다. 엄마는 평생 외국인 친구를 사귄 적도 없고, 물론 해외에 살아 본 적도 없다. 게다가 게이 남자는 엄마 기억에 만나본 적도 없을 것이다 (만났어도 모를 수 있지만). 하지만 엄마는 비행기 13시간 보다도 엄마와 거리가 멀었던 여러 가지 다양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이 방송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웠다.
방송을 보면서 여러 가지 성 정체성이나 미국의 역사나, 인종 차별 문제 등을 얘기해주면 엄마는 흥미롭게 듣고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아마 거의 평생을 남자와 여자만 있는 이분법적 세상, 100만이 넘는 외국인이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인이 절대 다수인 땅에서 비슷한 사람들만 보고 살아온 엄마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다양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방송을 통해서 접하는 기회가 된 것 같다. 넷플릭스로 떠나는 세계여행 같은 경험.
엄마는 여행도 좋아하고, 뭔가를 새롭게 배우는 것도 좋아하신다. 엄마가 지금과 같이 더 자유롭고 편리하게 외국에 나갈 수 있는 세상에 젊은 시절을 살았다면, 아마 한국에서만 살았을 것 같지 않다. 아마 나보다도 훨씬 다양한 세상을 탐구하고 자유롭게 살았을 수도 있다. 같이 일본을 여행했을 때 엄마는 나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모습에 놀라곤 했으니까.
이렇게 엄마의 새로운 면을 보면 나도 흥미롭게 느껴지고, 또 같이 해외여행을 가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엄마, 해보고 싶은 건 뭐든지 해보자. 엄마한테는 매력적인 다섯 게이 남자는 없지만, 엄마를 지지하는 두 딸이 있으니까. 그리고 퀴어 아이 여러분, 한국에도 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