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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une May 11. 2023

내 인생에 더 이상 두근거릴 일은 없을 줄 알았어



다낭 호텔에서인가 엄마가 느닷없이 심경 고백을 해왔다.


요즘에 혼자 집에 있을 때면, 그냥 이제는 이렇게 매일매일 비슷하게 살다가 가겠구나. 이제는 막 가슴 두근거리고, 신기하고, 새로운 일은 없지 않을까. 이런 생활이 안정적이고 편하면서도, 뭔가 조금 슬프기도 했다고.


이번에 베트남 여행을 오면서도, '미국도 유럽도 갔다 왔는데 새로울 것이 뭐가 있겠나. 그냥 딸내미랑 좋은 시간이나 보내고 와야지.' 하고 왔단다. 그런데 웬걸! 베트남, 생각보다 두근두근 거리고 엄청 신나더란다.



이 나이에도 새롭게 느껴지는 게 있다니, 좋다
호이안 올드타운 거리를 거니는 엄마


그 말을 듣는데 나는 좀 놀랐다. 30대 후반인 나도 엄마와 같은 생각을 최근에 많이 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돈 벌고 혼자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럭셔리하게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와 여유도 있다. 그런 게 편하고 좋으면서도 이렇게 나만 위해서 사는 삶에 더 이상의 동력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나이가 돼서도 맨날 나의 괴로움만 들여다보고 있었지, 엄마도 하루하루의 권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구나 싶었다. 좀 더 일찍 엄마랑 여기저기 같이 여행을 했으면 좋았을 걸 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와의 일정 마지막 하루를 호텔에 머물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엄마가 하루 종일 숙소에 같이 있어도 괜찮을만한 리조트 스타일의 호텔을 예약하고 싶었는데, 1박에 조식포함 10만 원 내외로 저렴하면서도 아주 예쁜 숙소를 찾았다.



“와 여기 너무 이쁘다”

 
호텔 안으로 향하는 입구



진짜 그랬다.

작고 아담하지만 모든 곳에서 자연과 베트남 특유의 분위기를 아름답고 소박하게 담아낸 곳이었다. 여기도 이쁘고 저기도 이쁘고 심지어 테이블도 이쁘네! 하면서 사진을 한 백장 정도 찍은 것 같다.


스태프들도 다들 친절하고 우리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줬다.


이왕이면 좀 색다른 방에서 지내보고 싶어서 방갈로 방을 예약했는데, 사실 예약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호텔이 굉장히 자연친화적인 곳이라 샤워실도 야외로 개방된 형태라 벌레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그건 뭐 수풀 속에 있는 곳이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엄마 사진 100장 찍어준 날


예쁜 방갈로 방 안팎을 둘러보다 방에서 베트남 컵라면 하나씩 먹고 쉬고 있었는데, 엄지 손가락 만한 도롱뇽이 창문 쪽에 붙어 있는 걸 내가 발견했다. 오, 귀엽네.


"엄마 저기 봐, 도롱뇽 있다"

"어디 어디 어디!!!"


그랬다. 알고 보니 엄마는 시티걸. 도시 체질의 사람이었다. 난 엄마가 나보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또 우리 할아버지 댁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 밖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던 곳이라 볼일 보다가 뱀을 볼 수도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어엿하게 며느리 역할을 해내던 엄마를 생각하고 손가락만 한 새끼 도롱뇽이나 작은 벌레 따위는 겁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내가 막 사람을 물거나 공격하지는 않으니 괜찮다고 해도 엄마가 하도 겁을 내 하셔서 일단 스태프를 불렀다. 스태프들이 방에 들어와 에어컨을 완전 분리까지 했는데도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신경 써서 예약해 준 나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도롱뇽을 본 이상 이 방에서는 마음 편히 잘 수가 없다고 하셨다. 다행히 호텔 측에서 빌라 쪽에 있는 덜 개방된 형태의 방을 저렴한 가격으로 다시 배정해 주었고, 그곳도 충분히 아름다워서 머무는 내내 엄마는 대만족 하셨다.



밤에 불이 켜지면 한층 아름다워지는 멋진 숙소


그렇게 우리는 이 숙소에서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고 저녁까지 먹으며, 석봉이는 글을 쓰고 어머니는 떡을 썰었듯, 나는 자판을 두들기며 회의를 하고, 엄마는 그림을 그렸다. 혹시 몰라서 엄마의 취미인 드로잉 할 것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엄마는 하노이 투어에서 만난 딸내미 같은 대학생 투어가이드의 사진을 그림으로 옮기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숙소에서 커튼만 걷으면 앞에 침대가 놓인 테라스가 있는데 아침잠 설치던 우리 모녀는 거기서 해가 떠오르는 아침 풍경을 즐기곤 했다.


풀벌레 소리가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아침. 내가 할아버지댁이 떠올라 엄마에게 시골 생각난다고 하니, 엄마는 여기까지 와서 시댁 얘기 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 미안.


테라스에서 즐기던 호이안의 아침


"여기서 하루만 더 있다 갈까? 그래도 아쉬울 때 떠나야겠지?"

"비행기 변경 되는지 알아봐 줄까? 더 있고 싶으면 더 있다 가"

그러니 돈 들고 번거롭게 뭐 그러냐고 하시더니 일단 한 번 알아보기만 알아보라고 하시더라. 여기서 지낸 시간이 좋긴 좋으셨나 보다.


결국 여행을 연장하지는 않으셨지만, 엄마는 베트남을 마음속 가득히 안고 가셨다. 지금도 주말 아침에 반미를 직접 만들어 드시고, 넷플릭스에서 베트남 관련 영화를 보고 나에게 보라고 연락을 하신다.  


혹자는 여행을 일상에서의 도피라고 했다. 공감한다. 나의 이번 여행의 시작의 절반이 그랬으니까. 그래도 음식이나, 영화 고르는 취향이 조금 더 넓어지고 다양해진 엄마의 일상을 보면서, 여행을 갔다 와서 현실로 돌아온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든 나의 세상을 조금 더 넓고 깊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 엄마를 끌어들인 것을 참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엄마 혼자 다시 한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 몰래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식당에서나 어디서나 요청하고 싶은 게 있을 때 "이건 엄마가 직접 가서 이렇게 얘기해 봐" 하고 영어나 베트남어를 가르쳐 주면 엄마는 한 번도 못하겠다, 부끄럽다 한 적 없이 "알았어" 하고 착착 걸어가서 어떻게든 해결을 해왔다. 엄마가 영어를 못하셔도, 부담 없이 같이 여행할 수 있는 건 엄마의 낯선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나도 엄마에 대해서 더 이상 알 것이 없고, 새로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 중에 또다시 엄마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보고, 엄마와의 앞으로 같이 지낼 시간들이 다시금 설레는 순간들이 있었다.


일상에서도, 또 가끔은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이렇게 세상사는 설렘을 같이 찾아다니는 동지로 오래 같이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엄마와 함께 지낸 호이안의 작은 리조트 숙소 정보

제스트 빌라 & 스파 호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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