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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산문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일단 살고 봐야겠다

by 정병진

아내는 정치학을 전공했다. 덕분에 시사를 소재로 뉴스를 전하는 나와 대화가 자연스레 포개진다. 5월에 정치사적 이슈가 많다보니 최근에도 정치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아내의 정치관은 체계적이다. 비교정치나 국제관계, 정치철학과 역사 등을 전공하면서 큰 줄기를 잡았다. 구체적인 케이스 스터디와 인물 연구로 내실을 채웠다. 나로서는 배울 점이 많다. 나는 주로 정치적 사건과 정치인의 말을 중심으로 시사의 맥을 짚어나간다. 정치를 바라보는 굵직한 이론적 토대는 없다.


"당신도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향점과 그에 부합하는 철학을 가진 정치인, 선호하는 정책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조금 더 안에서 꺼내면 좋을 것 같아"

딱히 좋아하는 정치인도 지지하는 정당도 없는 나로선 사실 어려운 주문이다. 이럴 때는 '내가 정말 충청도 사람이라 그런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항상 '네 정치적 입장은 입밖에 꺼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라긴 했다. 아마 영향이 없진 않겠지. 누군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기 보다는 곱씹고 곱씹으며 저의를 따져보는 습관도 한 몫 한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집안 어른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편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지역색보다는 내 정치적 성향에 큰 영향을 준 건 '실존'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실존주의 책들이, 쉽게 말하면 시쳇말로 내게 '꽂히는' 사상을 담고 있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성'을 향한 맹신은 무너졌다. 절망이 팽배했다. 적군의 포탄으로 당장 내 옆의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픽픽 죽어가는 마당에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탐구하는 정의나 논리 같은 게 뭐 그리 대단했겠는가.


'실존'이 '본질'보다 중요한 세상에서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였다. 그 실존주의 래퍼토리가 그렇게 와닿았다. 전후좌우 모두가 대입을 향해 달려가는 전쟁 속에 '이게 인간이 할 짓인가' 날마다 중얼거리면서도 '일단 살고보자'는 생각을 강하게 품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변화도 생존본능을 자극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바뀔 공산이 크다. 이를 상쇄하는 게 바로 '휴머니즘'이다. 우선 내 가족의 실존에서 출발해 내 이웃의 안위, 나아가 공동체와 사회가 함께 실존하는 지향점을 갖게 된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 상식을 중시한다. 그게 정의라는 개념으로 흐를진 모르겠으나, 그건 큰 관심사가 아니다. 최소한의 '유익' 또는 '실리'부터 따지자는 게 기준이다. 그러면서 어지간하면 우리 것, 너희 것까지 챙겨서 같이 살자는, 뭐 그런 식이다. 인간다움의 맛을 살려주는 '프라이버시'에 절대 간섭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딱히 깊이 없는 개똥철학이지만 둘러보면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청년이 많았다. 정당 활동에 투신하며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학우들이 멋지고 대단했지만, 내가 나서야 할 일처럼 와닿진 않았다. 일단 내가 자리를 잡아야 이웃에게 내밀 손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어쩌면 안정적인 삶에 대한 조급증 같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개방 이후 끝없는 교육 경쟁, 취업 경쟁으로 '생존 이상의 것을 생각지 못하게 만드는' 위정자들의 구조적 지배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크고 작은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키려 하기 보다는 후원과 봉사활동, 나눔과 교육을 통해 시민사회를 돌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냥 소시민적 마인드 같기도 하다.


이런 기조 위에 정책을 확인하고 정당을 주시하며 정치인에 귀를 기울여 본다. 아내는 신념을 함께 해온 조직이나 인물들과 끝까지 가서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을 끊임없이 일궈내야 한다는 주의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언제든 나와 가족, 이웃의 실존을 위협한다고 느낄 경우 티 안 나게 보냈던 지지마저 곧바로 철회해버리는 데 인색하지 않다. 내 스스로가 너무 비겁한 걸까.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이렇게 시작한 나로서는 작금의 현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이념적 반목이 정치와 사회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다시금 '실존'을 만지작거린다. 나는 지금 안전한가. 정의와 평화는 내 실존에 앞서는가. 나와 내 가족의 실존을 생각할 때 지금의 불완전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와 내 가족이 실존적 불안감을 해소하고 나아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룬 후 다시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내 역할을 필요로 한다면 그때 기꺼이 응하는 삶에 대해 나는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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