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로 일하던 어느 날 한 대학생으로부터 쪽지 한 통을 받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평화나비콘서트에 MC로 재능기부 해주길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흔쾌히 승락했다. 위안부 피해 문제에 평소 관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할머니들을 위해 '내가 뭐라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나에 대한 효능감을 크게 느꼈다.
다만, 마냥 프리랜서가 아니었던지라 소속 기관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니 물어보고 알려주겠다 답했다. 받은 공문을 출력해 보고를 올렸고 허락도 떨어졌다. 평화나비콘서트 포스터에 찍힌 내 이름을 보며 아나운서 된 걸 사뭇 자랑스레 여겼던 기억이 난다.
당시 제작된 포스터.
그런데 콘서트를 하루 앞두고 돌연 직속 선배의 호출이 떨어졌다. "니 좀 이거 지방선거 앞두고 곤란하지 않겠나?" 때는 그해 잡힌 지방선거가 얼마 안 남은 상황. 정치인들이 콘서트장에 들이닥치거나 잘못 엮이면 회사에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이 이어졌다. 자기 검열이 심한 시국이었다. ⠀ 나는 한 마디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 논리는 입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전환평가 후 정규직 시켜준다'는 말을 계약직 첫날부터 수 없이 들어왔기에 행여나 내 정규직 전환평가에 악영향을 줄까봐 덜컥 겁났다. 결이가 두 돌도 안 됐을 때여서 딸아이와 아내가 눈에 밟히기도 했다. ⠀ 결국, 콘서트 하루 전 어려운 전화를 걸었다. 평화나비콘서트 출연이 어렵게 됐다며 거절했다. 난 내게 연락했던 학생이 처음 내 전화를 받았을 때 흥분해서 고맙다 하던 말투가 떠올라 심히 부끄러웠다. 내 정규직 기회를 잃지 않고 싶어 회사 방침에 수긍한 무기력에 좌절했다. 쥐구멍을 넘어 멘틀 깊숙이 가라앉고 싶었다. 너무 미안했고 시절이 무서웠다. ⠀ 너무 미안해 공연장에 관객으로 찾아갔다. 학생들 얼굴 보고 사과하고 싶었다. 마이크를 잡은 자원봉사 학생은 풋풋하고 명랑하게 진행했다. "정병진 아나운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시지 못했지만! 제가 더 열심히 진행해보겠습니다!" 큰 박수가 쏟아졌다. 재능기부하러 와 주신 가수 정인 님 노래들으며 많이 울었다. ⠀ 지금 돌아보면 그게 뭐라고 그거 하나 못 했을까 싶다. 눈 질끈 감고 그냥 할 걸. 지방선거 의식한 정치인의 콘서트장 방문은 기색조차 없었다. 입사 초부터 '정규직 전환평가' 말 믿고 쪼개기 계약에 싸인해왔지만 역사상 첫 서울 낙하산 사장이 내려왔고 나는 1년 364일, 그러니까 근로기준법상 2년 넘어 가 무기계약직 될 요건을 하루 남기고 계약 만료로 회사를 나와야 했다. 정규직과 똑같이 논술까지 치고 공채로 들어왔는데. 정말 죽어라 열심히 하고 잘한다는 평가도 많이 받았는데. 억울했다. ⠀ 내가 지팡그인양 좇아온 정규직 전환평가는 아예 실시되지도 않았다. 낙하산 사장이 사장실에서 "미안합니다"라며 생각보다 내게 깊이 고개 숙일 때, 벗겨진 그의 머리에 언뜻 어린 내 모습을 인지하며 망연하고 자실했던 게 생생하다. 언론인에 대한 직간접적 검열이 독소처럼 침투했던 시국 탓일까. 난 최근 내가 겪은 갑질을 똑같이 겪은 모 후배들처럼 법적으로 싸워낼 용기가 없었다. 처자식이 눈에 밟혔고, 혼자였다.
우연히 이 크라우드 펀딩 공고를 보니 그 억울했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라도 기회 있을 때마다 뭐라도 해야 한다. 알리고 후원한다. 마음의 빚이다. 영화 <귀향> 때처럼, 이번엔 김복동 할머니를 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