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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과 대중의 연결고리

BBC SCIENCE 6월 편집장 메모

by 정병진
지난 4월 공개된 블랙롤 이미지.


"시공간의 끝에서 지옥문을 보았다" 실제 블랙홀을 관측해낸 EHT 참여 연구원의 말이다. 지난 4월 이들이 블랙홀 이미지를 공개하자 전 세계가 들썩였다. 검정색의 둥근 타원형은 블랙홀의 그림자다. 그 주위를 둘러싼 진한 주황색 빛은 블랙홀로 들어가는 가스 또는 상대론적 전자들이 운동하는 제트다. 누리꾼들은 블랙홀 이미지를 거대한 고양이의 한쪽 눈처럼 패러디하는 등 인류사적 발견을 즐겁게 누렸다. 같은 블랙홀을 바라보며 누구는 지옥문을 떠올리고 누구는 귀여운 고양이를 생각한다.

6d44e12dcd12a961311381a8716c1743.png 블랙홀 패러디의 절정. 고양이눈!

천문학적 가치를 떠나 필부필부들은 저마다 자신을 강력히 끌어당기는 '삶 속 블랙홀'을 실측된 블랙홀로부터 연상했다. 아이 키우는 부모에게 블랙홀은 자녀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몸피가 매우 작지만 부모의 모든 삶을 빨아들인다. 기실 엄청난 '인생 중력'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전공자들로부터 홀대 받아온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은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5차원 세계를 온몸으로 버티며 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시공간과 차원을 초월하는 유일한 개념이 사랑이라는, 과학이라기 보다는 다소 대중적인 주제였다.

인터스텔라 웜홀 진입 장면. 공식 홈페이지 활용.

사실, 우주 차원에서 거론되는 과학 개념들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워낙 크고 방대해서다. 이번에 우리가 본 M87의 블랙홀은 지구로부터 5천5백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 연구진은 태양의 질량보다 430만 배 무거운 우리은하 중심의 궁수자리 A* 블랙홀도 발견했는데, M87은 그것보다 천 배 정도 질량이 더 나간다. 어지간한 전문가들 아니고서야 이게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머리로 이해하기에 우주는 너무 크다. 결국 대중은 마음으로라도 인류사적 위대한 발견을 치하할 뿐이다.

그런데 희한한 건 그 마음이 모이고 또 모이면, 머리로 이해하고 또 이해해야 하는 과학의 지평 또한 확장된다는 점이다. 사람의 관심이 모이면 정책 당국은 자원과 역량을 해당 분야에 집중하게 된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정치적 움직임을 추동한다. 기업도 달려든다. 이미 미국 등에는 일반인이 우주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민간 상품이 상당 수준 개발됐다. 이러한 추세는 과학·기술 분야 R&D 예산을 끌어오는 명분이 된다. 결국, 대중은 '과학 발견'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과학 발전'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뒷배다.

따라서 대중이 과학에 관심 갖게끔 돕는 역할은 중요하다. 블랙홀을 보며 고양이를 떠올리든 지옥문을 그리든 뭘 해도 상관없다. 자꾸 이것저것 보여주며 대중이 과학을 곱씹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게 <BBC SCIENCE>나 <이웃집과학자> 같은 매체의 존재 가치다. 자꾸 접하다 보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자연스레 대중이 과학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 덕에 과학은 인류와 자연에 이로운 방향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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