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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진 Oct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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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가 체질' 스트레스 받아 떡볶이 땡길 때 보자

어정쩡하고 노련한 30대


30대. 사회 초년생 시절은 이미 지났다. 그렇다고 연차가 많이 쌓인 건 아니다. 이제 막 작은 성공과 실패를 맛본 정도다. 감정에 충실하지만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절제할 줄 아는 나이 30대. 10대나 20대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나, 이제는 적절히 정제된 오늘을 덤덤하게 살아내는 나이. 손에 잡히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뗄 줄 아는 그런 시기. 일, 사랑과 우정에서도 관계 자체의 소중함을 들여다 볼 줄 아는 나이.


'힘을 좀 빼더라도' 세상이 굴러가는 걸 체감하는 나이 30대.


그래서 <멜로가 체질> 극중 임진주 작가는 '서른되면 괜찮아져요'를 썼나 보다. 그 30대의 묘한 스탠스를 느꼈던 게 아닐까. 이런 인식은 드라마 최종회에서도 진주의 내레이션을 통해 드러난다. 


"나 생각해보니까 우리 나이가 참 너무 좋은 것 같아. 뭔가를 다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 중엔 제일 노련하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좀 애매한 나이 중엔 제일 민첩하고"


한국 나이로 35살을 살아가는 나로선 이 드라마가 내 폐부를 여기저기 쑤셔놓아 가슴이 덜덜해졌을 정도다. 우선 이 드라마의 밑바탕 분위기가 유머다. 이 유머 코드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 쯤에 맞닿아 있다. 난 여전히 덜 떨어지게 웃으며 친구와 장난치고 웃겨주고 싶다. 하지만 친구를 깎아내리며 깔깔대던 10대, 20대의 개그는 하고 싶지 않다. 이 작품에서나 내 삶에서나 우리는 친구들과 대화하며 의식의 흐름대로 헛소리를 줄줄 내뱉지만 그 안에는 '내실 있는' 농담 또한 적절히 섞여 있다.

적당히 드라마 잘 하는 PD 범수. 그 또한 자기 직무에 관해선 능숙하다. 사람 마음 얻는 건 방송쟁이들의 숙명이다.

"난 택배받는 것도 좋아하고, 식당에서 메뉴판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 일이 좋아요. 무엇보다 소중한 이 일을 작가님과 하고 싶다는 거에요. 막 아니고 잘"


일터에서의 모습도 공감 포인트. 주인공들은 이제 직무 그 자체가 버겁지 않다. 다큐멘터리가 흥행하면서 생각지 못한 경제력을 갖추게 된 은정, 드라마 마케팅 짬밥 10년 가까이 먹으며 능란하게 작품 속에 PPL(작품 속 간접 광고)을 집어넣는 한주, 극중 드라마 작가가 되어 <서른되면 괜찮아져요> 입봉을 준비하는 진주까지 일을 잘 못해서 힘든 일은 없다. 어느 정도 직무가 다 손에 익었다. 이들과 일하는 회사나 의뢰자들 모두 세 커리어우먼에 대한 신뢰가 도탑다.


일은 일이지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개인사가 내 일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곤 한다. 공과 사가 흔들릴 때, 이마저도 오버스럽게 좌충우돌하지 않고 적절히 균형을 찾아가는 30대 주인공들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애틋하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뻥 뚫려버린 가슴으로 무기력이 밀물처럼 밀려와 삶을 잠식해버린 은정이 툭 건네는 대사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그래 두 끼 정도, 그 정도만 지나가면 괜찮을 거야.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든, 하고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든"


사랑도 마찬가지. 받아볼 만큼 상처를 받았고, 과하지 않은 위로를 적절한 타이밍에 건넬 줄 안다. 마지막회에서 한주가 회사 후배 재훈에게 건네는 위로가 대표적이다. 여자친구와 동거하며 켜켜이 쌓인 갈등과 원망에 갑갑해하는 재훈은 한주를 만날 때마다 숨통이 잠깐 잠깐 트인다. 한주 선배가 멋있고, 귀엽다. 시청자들은 재훈이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주와 커플로 잘 발전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나도 그랬다. 둘의 '일·관계'케미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우울할 때마다 꺼내어 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이런 뻔한 전개가 이 드라마엔 없다. 한주는 재훈에게 '여자친구를 자신의 기준에 맞추지 말 것'을 주문한다. 퇴근길 가벼운 술자리에서 재훈의 여자친구로 빙의해, 또다른 귀여움으로 무장한 뒤 '지금의 여자친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 것'을 당부한다.


한주는 30대의 사랑을 한다. 남의 남자를 힘들여 뺐지 않는다. 전 남편이 찾아와 찌질하게 치근덕대지만 아이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전 남편으로부터 부동산 명의는 챙긴다. 극중 반전 요소였던 한주의 남자친구는 재훈이 아닌, 다른 '어깨 넓은' 연하남이었다.

서른의 '일탈' 마무리는 맛.집.탐.방

위로의 기술


이병헌 감독의 작품들 특징은 인물들의 대사 처리가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물 흐르듯 줄줄줄 내뱉기에 대사량이 많고, 따라서 배우들의 과하지 않은 발성과 호흡이 중요하다. 연기 잘하는 배우를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기본기 탄탄한 배우들을 앞세워 이병헌 감독은 다방면에서 '자연스러움'을 뽑아낸다. 화면 속 대사가 자연스럽다.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다. 인물과 인물 간 모든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자연스러워서 단연 좋았던 건 '위로'였다. 친구들이 친구들에게 건네는 위로. "힘내"라는 뭉툭한 말로 아픈 사람을 더 망연자실하게 만들지 않아서 좋았다. 아무래도 작품에서 가장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이었다. 고생고생하며 다큐를 만들다가 만난 남자친구는 돈이 많은 친일파 집안이지만 자수성가 하려고 노력해온 단단한 남자였다. 은정 다큐의 성공은 투자자이자 사실상의 스테프로서 은정과 함께 땀흘려준 애인의 공 또한 크다. 은정의 행복이었다. 그런 그가 병으로 죽었고, 은정은 극심한 아픔에 휩싸인다.


은정이 자해 시도를 한 이후 한주와 진주는 은정 그리고 은정의 남동생과 다 같이 산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렸다. 은정이 다큐멘터리로 적지 않은 돈을 벌어 장만한 집은 어른 넷에 한주의 아들까지 함께 살기에 비좁지 않다. 친구들은 그렇게 은정의 곁을 지킨다. 부러 시답잖은 위로 따윈 하지 않는다. 30대라서 그런 걸까. 이들이 성숙한 걸까. 어쩌다보니 인물들은 소중한 친구를 위로하는 방법이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이란 정답을 알고 있다. 가끔 안아주고, 같이 라면 먹는다. 이런 메시지는 드라마 OST인 권진아의 '위로'란 곡을 통해 극대화 된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나를 사랑하는

세상과 다른 맘으로 나를 사랑하는

그런 그대가 나는 정말 좋다


나를 안아주려 하는 그대 그 품이

나를 잠재우고 나를 쉬게 한다

위로하려 하지 않는 그대 모습이 

나에게 큰 위로였다


배우의 재발견

 

드라마 전체를 끌고 가는 건 누가 뭐래도 진주다. 진주를 연기한 천우희 배우는 그럴 힘을 가졌다. 작지만 크다. 영원히 꼰대스럽지 않을 것 같은 리더십 같은 게 느껴진다. 영화 <곡성>에서 천우희는, 잠시 스포일러를 하자면(곡성 안 보신 분들은 건너 뛰세요) 외래 악귀에 맞서는 토종 산신령 같은 존재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나오는 '저 세상 텐션'은 그녀의 연기가 굉장히 입체적이란 사실을 입증한다.


천우희 배우의 연기는 마이너 한데 메이저다. 드라마 <아르곤>에서는 비정규직 인턴 기자를 연기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적당히 비주류 같은데 완전 아웃사이더는 아니고,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될 것 같은 처연함이 스치지만 결국 강단 있게 해내는 연기가 일품이다. 영화 <해어화>에서 연희를 연기할 때도 그랬다. 한효주 배우가 분한 정소율과 비교가 될 법 한데 자신의 연기톤을 영리하게 찾아낸다. <해어화>의 OST를 직접 작사했다. 노래도 불렀다. '생각하는 배우구나' 싶다.

다시 <멜로가 체질>로 돌아오면 천 배우는 똘똘하고 사랑스럽다. 또박한 대사 처리가 덤덤한 울림을 줘서 좋았다. 어렵지 않으면서 가볍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도 힙하게 우리에게 조언을 건넨다.


"똑똑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어리다고 진짜 어린 줄 알지 말고, 무엇보다 내가 느낀 바 현재 주어진 위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게 위기를 키우지 않는 유일한 방법 같아"


전여빈 배우는 이 작품으로 처음 봤다. 너무 충격적인 감성. 원래 내지르는 연기는 쉬워도 꾹 누르는 연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전여빈은 누르는 연기인데 '꾹' 누르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감정이 눌려진달까. 바람처럼 연기한다. 스윽 들어온다. 자신의 다큐를 보러 많은 인파가 극장에 몰린 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은 평소와 똑같이 덤덤하다. 그런데 옆에서 한주와 진주가 멍석을 깔아주면 마치 코미디언이 모델 워킹을 흉내내듯 우스꽝스럽게 워킹해준다. 그 덤덤한 표정으로. 무심한듯 쉬크한데 따뜻해져버리는 배우다.


전 배우의 저력은 슬픔을 연기할 때 극에 달한다. 자연스럽게 눌린 감정 연기는 되레 시청자들의 감정을 들쑤셔 놓는다. 너무 아플까봐 슬픔을 회피하다보니 무덤덤해진 건지 슬픔이 감정을 잠식해 무덤덤하게 굴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건지 모를 연기를 보여준다.

드라마 중후반에 가면 정신과 상담을 꼬박꼬박 받으면서 그 아픔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반 사람들은 경험하기 힘든 계기로 사랑에 빠진 은정과 남자친구였지만 그들이 보여준 짧고 건강한 연애는 은정 캐릭터의 슬픔을 더 짙게 만들고, 전여빈 배우는 꽤 어려웠을 법한 은정 캐릭터를 무심하고 쉬크하면서도 따뜻하게 해석해낸다. 상처 많은 은정에게 시청자가 되레 기대고 싶게끔 만드는, 그런 연기를 한다.


한지은 배우도 <멜로가 체질>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생각 없이 얼굴만 예쁘고 천진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면 제일 속이 깊고 넉넉한 한주 역할을 제옷처럼 잘 소화했다. 압권은 단연 "오빠" 퍼레이드 아닐까. 극중 드라마 마케팅 일을 하는 한주는 배우들이 PPL 제품을 작품에서 잘 소화해주길 바라며 읍소해야 하는 을의 위치다. 욕을 먹거나 고성을 듣는 게 일상이다.


그런 그녀가 일종의 변형된 미러링을 한다. 자꾸 성가시다는 듯한 말투로 현장 감독들이 "오빠 소리도 해가면서 잘 좀 해보라"며 채근한다. 은근히 성차별·성희롱을 섞은 재수없는 망언이다. 한주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대판 싸우거나 울면서 현장을 피하지 않는다. "해! 그냥! 그럼 그냥 해주라고!" 은정의 뼈 있는 조언을 접수한 한주. 자신만의 스타일로 귀엽게(?) 복수한다. "오빠↗옵빠↘오퐈↙옵뽜↗" 무지막지한 애교 폭탄을 현장의 남성 스테프들에게 쏟아부으며 PPL을 성사시킨다. '애교 지옥' 작전 성공이다.

한주는 애까지 딸린 '사연 있는 미혼모' 캐릭터인데 한지은 배우는 '세상 가장 영리한 소녀'처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재훈은 그녀가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라고 느끼다가도, 한주의 존재감 때문에 선을 넘지 않는다. 그 존재감은 한지은 배우가 길어올린 연기 내공에 기인한다. 겁네 인위적인 연기를 너무 자연스레 만들어버리는 한지은의 매력은 여러 사람 '입덕'시키는 마력의 원천이다. <멜로가 체질>의 로맨틱 분위기 메이커였다.


이밖에 나의 영원한 '족구왕'이자 '정봉이' 안재홍은 명불허전이었다.


배우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 작가의 대본이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버무려진 산뜻한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2019 '띵작'으로 내맘대로 선포한다. 탕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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