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수업을 마친 딸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며 외친 말이다. 친구들이 다가와 토끼, 사람을 그려달라고 졸라댔단다. 결이 그림체가 마음에 든다며, 특히 결이 특유의 그림 캐릭터가 좋다며 친구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한 명 한 명 그림을 그려주느라 힘들었다고 말은 하는데, 입이 귀에 걸려서 아주 신이 났다.
수업 첫 날, 클래스를 다 마치지도 못 한 채 울음이 빵 터져 아빠를 찾았던 모습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다.
딸아이 특유의 그림체. 각종 만화와 게임을 두루 섭렵한 정결 화백의 최신 화풍이랄까.
Akademie Faber-Castell에서 진행하는 Ferienkunst 교실. 우리말로 옮기면 방학 예술 교실이다. 방학이 되면 시립도서관을 비롯해 파버 카스텔처럼 민간 회사들이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한국의 학원 개념이라기 보다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강좌나 청소년 캠프 비슷하다. 입시 지옥이 없는 유럽에서 아이들이 자기 관심사에 따라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다.
딸아이도 일주일 동안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하루 하루 자신감이 늘었다. 독일어가 서툴더라도 그림으로 이야기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업을 총괄한 안드레아스 선생님의 자상한 리더십도 한 몫 했다. 그는 "아이들은 무엇을 해도 다 괜찮다"며 "결은 이미 충분히 그림에 소질이 있고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구글 번역기를 동원하면서까지 기여코 아이와의 친밀한 소통을 해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수료식 현장에서도 그는 30여명의 아이들 부모님들에게 "결이의 그림은 특별하고 재밌다"고 칭찬해주셨다. 딸아이는 폴짝폴짝 안드레아스 선생님 뒤를 쫓아다녔다.
딸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겨주신 고마운 안드레아스 선생님.
클래스 등록 안 했으면 큰 일 날 뻔 했어.
아내와 나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최근 함부르크로 이사를 준비 중이다. 독일은 세입자가 집주인 내지 부동산 업자에게 '내가 이 집에 임차를 신청한다'는 지원서를 내야 한다. 나의 신분, 월세 지불 능력을 입증하고, 왜 이 집으로 와야 하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설명하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등 한국의 대기업 입사 뺨 치는 노력을 들여야 한다.
서류 심사에서 합격하면 해당 물건으로 Besichtigung을 하러 가는데, 단순히 집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세입자 후보와 집주인이 대면하면서 진행되는 실무 면접에 준한다. 여기서 추려지면 최종 후보가 되고 최종 면접 후 월세 계약을 따낼 수 있다.
이 지난한 과정을 밟던 중이다 보니 두어달 전 예약한 딸아이 파버카스텔 아카데미를 취소할까도 생각했었다. 아침마다 40분 거리를 데려다 줘야 하기 때문이다. 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아이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일이 체력적으로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뉘른베르크에서 함부르크까지는 밤샘 Flix 버스 타고 8시간 정도 걸린다. 한 번 다녀오면 사나흘은 몸이 아프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보냈으면 어쩔 뻔 했나 싶다.
그래도 아이를 생각하면 힘을 내고 싶었다. 코로나 국면에서 결이는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애초에 독일 넘어올 때 실력 없는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면서 아이 학교도, 사는 지역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으로 오게 됐다. 코로나까지 터지자 아이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은 무한정 길어졌다.
아내와 나는 아이가 자신감을 갖길 바랐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또래 친구들과 대화도 하면서. 특히 세계적 문구 회사인 파버카스텔은 이곳 뉘른베르크 근교 슈타인이 본사인데, 함부르크로 떠나면 다시 참여하기 힘들 프로그램이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파버카스텔인데..' 아빠 엄마가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다.
파버카스텔표 미술 교육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의 아이템은 연필이다. 최초의 연필 제작자가 1719년 뉘른베르크 근교 슈타인(Stein)에 살았고 목수 Kaspar Faber가 1758년 이곳에 정책해 1761년부터 연필을 제작했다고 한다. 9대째 연필을 만들고 있다.
이곳은 파버카스텔 아카데미 건물. 아이들부터 어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미술 교육이 이뤄진다.
교육 프로그램은 아이들 특성에 맞게 구성됐다. 아이들이 아침에 오면 먼저 손을 푼다. 자유롭게 스케치하며 싸온 음식을 먹는다. 원래 아침 점심을 다 제공해주기로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케이터링 업체가 출장을 나오지 못했다.
아침 메인 프로그램을 하나 진행한 뒤 점심을 먹는다. 점심 먹고 난 뒤에는 근처 놀이터에서 뛰논다. 낮잠도 잔다. 그림을 그리러 왔는데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이라니! 너무 좋았다. 밥 먹고 나면 어차피 노곤노곤해지고 잠이 오는데, 건물 안에서 졸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밖에 나와 뛰놀고 한 숨 푹 잔 뒤 맑은 정신으로 오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낫겠다 싶다.
프로그램 세부 일정을 안내하는 이메일.
오후 강의까지 진행하고 난 뒤 집에 가기 전에는 각자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갖는다. 자신이 뭘 그렸고 무슨 생각을 하며 그렸는지 이야기 하면 친구들이 질문한다. 마치 크리틱을 연상케 하는 순서지만 아이들은 그저 호기심 어린 질문으로 가득하다.
첫날 결은 이 프레젠테이션 시간을 어려워했다. "결아, 괜찮아. 말 잘 못해도 괜찮아. 그냥 단어만 얘기해도 돼. Das ist die Sonne! Das ist ein Stein!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이게 뭐다 저건 뭐다' 라고만 말해도 괜찮아. 답답한 건 친구들이겠지. 그렇다고 네가 잘못하는 건 없어. 넌 그림으로, 몸 동작으로 표정으로 알려주면 돼"라고 달래줬다.
제일 중요한 건 네가 즐거워야 한다는 거야. 네가 즐거우면 돼. 즐겁지 않으면 수업에 안 가도 괜챃아 결아.
아내의 말까지 잠잠히 듣던 "해보겠다"며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결은 값진 수료증을 따냈다. 아니 그 일주일을 신나게 놀았다.
결아, 봄 전시회 어때?
봄은 고양이 이름이다. 독일로 떠나오기 전 운명처럼 우리 가족에게 왔다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 아기 고양이다. 결에게 봄은 특별하다. 이름도 결이가 지었다. "이 고양이가 따뜻한 걸 좋아해서 봄이라고 지었어" 추운 날 밤새 비를 맞다가 죽기 직전 내가 구조한 고양이 봄. 딸 아이에게, 아내에게 우리 모두에게 짤막한 시 같은 존재다.
딸아이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좋아하는 다른 사람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모종의 효능감을 느낀 듯 하다. 마치 내가 중요한 뉴스를 전하고 난 뒤 관련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파생되는 모습을 보며 흡족했던 것처럼,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뉴스 잘 보고 있다며 인사를 건넬 때의 뿌듯함처럼 그 비슷한 뭔가를 느낀 듯 했다.
결이가 봄이를 만든다고 만들긴 했는데.. 약간 해태 같기도 하고... ^^;;;
앞으로 아이가 봄이를 소재로 미술 작품을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아, 봄 전시회 열어보는 건 어때? 봄이를 소재로 행복, 따스함, 즐거움을 자아내는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일"
"응!"
뭘 알고 대답한 건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독일에 사는 동안 아이가 그림이나 디자인 계열로 삶의 방향을 잡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꼭 직업이 아니어도 괜찮다. 취미로, 특기로 얼마든지 그림을 그리길. 세상을 알록달록하게 칠해주길. 따뜻한 톤으로 완성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