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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산문

아내는 베지터리언 남편은 돼지터리언

더 나아가 비건이 된 아내

by 정병진

아내는 베지터리언, 조금 더 나아가 중간 단계의 비건이다. 남편이 ‘돼지’터리언인데 채식을 하려니 얼마나 걸리적거리는 게 많을까 싶다. 각설, 결이 임신했을 때 그렇게 벽제갈비의 돼지갈비를 찾던 아내가 어쩌다 이렇게 바뀌었나 싶어 돌아보면 그 출발점에 '봄'이가 있다.


봄은 아기 고양이 이름이다.


딸아이가 지어줬다. 우리 가족과 살았던, 아팠지만 팔팔했던 개냥이다. 독일로 떠나오기 몇 달 전, 밤새 비를 맞으며 울어대던 아기 고양이를 구조했다. 눈병이 심했다. 바들바들을 넘어 온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병원에 데려가 응급 처치를 한 뒤 한 동안 우리 집에 머물게 했다. 곧 독일행을 앞둔 시점이어서 임시보호를 하다가 다른 가족에 입양시킬 요량이었다. ‘얘가 따뜻한 걸 좋아해서 이름을 지어줬어’ 그렇게 그 고양이는 ‘봄’이 되었다.

그 주 금요일 오후, 봄에게 쇼크가 왔다. 오전 내내 먹이를 안 먹더니 갑자기 거품 물고 쓰러졌다. 난 회사에 있었다. 아내가 두 아이와 봄이를 데리고 처음 진료받은 합정의 한 동물병원으로 달려갔다.

“큰 병원 가셔야 합니다”


왼쪽 앞다리의 작은 상처를 구더기들이 비집고 들어가 근육을 모조리 파먹었다는 설명이었다. 충격받을 새도 없이 셋은 망원동의 동물종합병원으로 뛰었다. 3살 난 아들과 고양이를 둘 다 안고 뛰기 어려웠던 아내는 “결아, 네가 먼저 뛰어가서 접수시켜!”라며 봄이를 딸에게 건냈다.


병원에서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밤새 당직 수의사는 봄이 발 속 구더기를 모조리 빼냈다. 아마 회사에서 야근 중이었던 것 같은데 나한테도 여러 번 전화가 왔다. ‘이 처치를 하면 금액이 이 정도 들어가는데, 하시겠습니까?’ 주먹 만한 고양이 한 마리 치료하는 데 비용이 너무 비쌌다. 수술 자체의 금액부터 각종 약, 무균실 비용까지 사람 다친 것 만큼 들었다. 아, 이래서 고양이 구조를 선뜻 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구나 싶었다.


솔직히 이때 나는 돈 때문에 갈등했다. 백만 원대가 넘는 큰 비용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느닷없이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봄이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던 아내 또한 그래서 내 의사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움직인 건 봄이었다. 수의사가 말했다.

“봄이가 잘 먹어요”


그 아스라져가는 작은 생명이 살아보겠다고, 자기 살아있다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저 작은 생명이 생의 의지를 저렇게 보여주는데, 뭔가 안 해줄 수가 없었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좀 과장하자면 숭고함 마저 느꼈다. 아내는 나보다 그 강도가 더 컸던 것 같다.


“일단 살리고 보자” 아내와 이렇게 결정하고선 우리 가족은 밤새 기도했다. 봄이 오늘 수술 잘 되게 해달라고. 돈 문제는 나중에 모금을 해서 충당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상황을 진솔하게 공유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분명 마음을 나누려는 이웃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더 넘긴 뒤 봄이는 빠르게 회복됐다. 우리는 흑당 밀크티와 콜드부르 커피를 만들어 팔았다. 너무 놀랍게도 봄이 치료에 든 총 비용 158만 원을 딱 상쇄하는 160만 3천 원이 모금됐다. 기적 같았다.


인생 1.5막 시작


봄이를 다른 집에 입양 보낸 후 딸래미는 ‘어이구 우리 강아지’ 할 때마다 ‘나 고양인데?’ 할 정도로 고양이에 푹 빠져버렸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고양이의 보은’은 대사를 얼추 외울 정도로 봤다. 아들래미와 나는 봄이를 애틋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됐다. 아내는 책 ‘동물주의 선언’을 시작으로 인간과 동물, 자연이 공존하는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채식주의에서 나아가 생태적 가치를 추구하는 비건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 시각으로 12일부터 아내가 절친과 합작으로 설립한 제로웨이스트샵 ‘보호(@Boho_works)’가 론칭 이벤트를 시작했다. 독일을 비롯해 영국과 미국의 수 많은 친환경 업체들을 물색해서 장만한 아이템들을 온라인으로 판매하기 직전이다. 물건들이 속속 부산 사무실로 도착하고 있다.


교체하기 쉬운 생활 용품들에 의미를 더한 친환경 제품을 가급적 비싸지 않게 판매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나와 내 가족, 이웃, 동식물을 비롯해 환경을 보호하는 첫 걸음을 뗄 때 진입장벽이 너무 높으면 안 된다는 게 아내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그걸 독일에서 준비하려니 어려운 점이 많았다. 내 대학원 준비를 위해 여러 신경을 써주면서도 부산에 있는 공동 창업자 친구와 일사분란하게 난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쭉 지켜봤다.


아내가 대견하고 애틋하고 존경스럽다. 그간 아내가 여러 사업을 시도하며 경험한 모든 노하우가 이번 ‘보호’ 프로젝트에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비건 사업가 아내도, 아직 돼지 좋아하는 나도 인생 1.5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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