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독일이야?"

독일에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많이 들은 질문

by 정병진

"그런데 왜 독일이야?"


독일에 오기 전에도, 오고 난 후에도 계속 듣는 질문이다.


해외 유학이나 이민을 간다 할 때 사람들은 보통 영미권을 선택한다. 영어를 잘하면 여러 모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게. 나는 왜 독일로 왔지?


'독일'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딱 떠오르는 3가지가 있다. 매체미학, 연극, 그리고 고등학교 때 들었던 제2 외국어 독일어 수업. 나와 아내는 여러 변수를 고려해 우리 가족이 옮겨갈 국가로 독일을 선택했다. 하지만 저 3가지는 오롯이 내 개인적인 계기들이다. 내 인생에 최초로 '독일', '유학', '이민' 같은 키워드를 집어 넣어줬다.


일단 좀 다른 걸 배우고 싶었다.


매체미학은 학부 때 중앙대학교까지 가서 들었던 학점교환 강의의 이름이다. 너무 재밌는 수업이었다. 지적 유희를 처음으로 느꼈던 강의랄까. 고3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생이던 시절, 왜 그 대학에 오면 밤새 토론하고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는 '학교 홍보 영상'스러운 장면들 있지 않나. 내게는 그게 로망이었다. 그 로망을 이뤄준 강의가 바로 저 매체미학이다.


강의는 일종의 대학원 수업 같았다.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장 보드리야르 같은 유럽의 지식인들을 공부했다. 우선 이들의 책, 논문을 읽고 내용을 정리한 뒤 오늘날 매체와 연결해서 소논문을 만들어야 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원들이 강의 시간에 직접 발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들은 논문을 심사하러 들어온 교수처럼, 혹은 그냥 학생으로서 발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논문 디팬스 과정과 흡사하다. 토론을 벌이거나 서로의 의견에 수긍도 하고, 학생 스스로 직접 강연을 펼치기도 한다.


발제를 위한 소논문이 나오기까지, 그 과정이 재밌었다. 우리 팀은 폴 비릴리오라는 매체학자이자 철학자, 건축가 겸 전쟁 이론 전문가를 발제했다. 조원들이 학과 동아리실에 모여 '속도와 정치'라는 비릴리오의 책을 밤 늦게까지 강독했다. 어려운 개념에 대해 서로 물어가며 더듬더듬 그의 이론을 알아갔다.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어가며 지금 우리를 둘러싼 매체 환경에 그 이론을 접목시켜 모종의 결론을 도출하는 작업이 나에게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커다란 지적 자극을 줬다.

간직하고 있다. 저 발제 자료들. 독일까지 가져와서 또 읽는다.

이 강의는 강진숙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께서 개설했다. 강 교수님은 독일 라이프치히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그로 인해 나는 '학문'이라는 단어가 '독일'과 자연스레 포개진다. 이 강의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오신 다른 교수님이 개설한 여타 강의와는 분명 다른 동기부여를 해줬다.


비결은 학생 참여형 방식이었다. 교수님은 학자들의 이론을 개념화해서 주입식으로 우리에게 강연하지 않았다. 스스로 찾아볼 수 있게끔 판을 깔았고, 곁길로 너무 멀리 나가면 데리고 돌아와주시는 정도로만 관여했다. 이런 방식을 좋아하는 학생이 많았고, 학점과 상관 없이 여러 번 청강하는 학생들 또한 더러 있었다.


비록 정연하진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자기 생각을 끄집어내서 타인에게 전달하는 일이, 그래서 서로 진지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됐다.


독일? 하면 토론! 원래 이런 생각이 내 머리에 부유물처럼 존재했는데, 이 강의를 통해 그걸 살갗에 와닿게끔 경험했다. 자연스레 미국식 학문과는 다른 유럽식 학문을 배워보고 싶어졌다. '유럽은 뭐가 다르지?' 이 의문을 풀고 싶었다. 이론으로만 공부했던 그 학자들이 먹고 자며 숨쉬었던 유럽에서 직접 살아보고도 싶었다. 내가 독일에서 대학원 공부까지 하게 된 결정적 계기다. 지적 로망스랄까.


두 번째는 연극이다.


딱히 연극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고, 대학 때 외에는 공연장에서 연극을 막 즐겨찾아 볼 정도도 아니었다. 다만, 고3 때 내 진로가 연극영화과 진학이었다. 외모보다는 연기로 승부하는 연기파 배우가 되는 꿈을 꿨던 시절이었다.

미경 배우님과 '잊혀진 시간' 공연할 때. 나는 심장병 걸린 50대 후반 아재 역할이었다.


하지만 연영과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고 재수 끝에 전공을 바꿔 언론홍보학과에 입학했다. 그래도 연기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나는 입단 테스트를 거쳐 대학로의 '불꽃'이라는 극단에 들어갔다.


극단에 관한 많은 이야기는 차치하고, 우리 단원들이 독일 한인교회의 초청을 받아 독일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아헨과 베를린에서 공연을 올렸다. 우리가 올렸던 창작극 '잊혀진 시간'이 가족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었고, 내 상대 배우였던 고 황수희 목사님의 동생이 독일에서 성악을 전공한 성악가였기에 이런 저런 루트로 독일에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단원이었던 나는 신나는 마음으로 독일 공연 겸 여행을 즐겼다.

독일 초청 공연 후 놀러다니며. 베를린 어딘가.

일단 맛있는 게 많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커다란 소시지도, 독일식 거대한 맥도날드 햄버거도, 노점에서 파는 굵다란 감자튀김도 다 내 입맛에 맞았다. 한인 교민들이 챙겨준 현지 음식들도 너무 맛있었다.

교민들이 차려주신 비빔밥을 먹을 때였나보다. 옆에 앉은 건 누구일까. 가물한 기억.

사람들도 좋았다. 독일 사람들은 덩치가 크고 약간 무섭기도 했지만 동양인이 화려한 행색으로 왔다갔다 한들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유쾌했고, 자유로워보였다(베를리너들).


그때는 독일인 보다는 우리가 만났던 한인 교민들이 더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보름 정도 되는 일정 동안 우리를 재워주고 여행지를 안내해준 분들이 전부 교민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곳곳에 숲과 공원, 축구장이 갖춰진 환경에서 독일식 교육을 받으며 자유롭게 커온 교민 자녀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이런 데서 미래에 내 아이들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극단에 있을 때라 온갖 똥폼과 아내가 질색팔색하는 저 가슴 파인 니트 위 정장 플러스 비니 패션. 비록 지금은 내 아재이나, 나르시시즘은 아직 내 피에 흐르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생각은 현실이 됐다.


독일 유학생의 삶을 처음으로 들려준 사람은 고등학교 때 독일어 선생님이었다. 전교조 소속이셨는데, 그들 특유의 열정이 돋보이던 분이었다. "내 수업 시간에서 배운 것 중 지금부터 가르쳐 줄 내용들은 너희가 평생 까먹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데어 데스 뎀 덴..." 정관사와 부정관사, 그리고 독일어 인사 표현을 가르쳐주셨다. 지금 내 독일어의 아주 든든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자신의 독일 유학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학비가 공짜인데다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돈을 주는 등 복지가 잘 돼 있더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복지 국가에서 살면 어떨까?' 수업보다 더 재밌던 선생님 이야기를 듣다가 그런 막연한 상념에 빠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독일어는 어려웠지만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선생님의 그 유학 시절 이야기가 내 마음 어딘가에 인처럼 박혀 있었던 것 같다.


"디 데어 데어 디, 다스 데스 뎀 다스, 디 데어 덴 디" 이 녀석들과 함께..


독일. 그 결정이 후회스럽진 않다. 다만, 초반에 에이전시 때문에 돈이 너무 깨지는 구조로 생활 기반을 세팅했다는 점, 더군다나 코로나 국면을 거치며 내 빈약했던 경제적 계획마저 다 허물어졌다는 사실이 현실적 압박을 가할 뿐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돈은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분명 독일에서는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아무리 일을 해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을 안 받으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아직 있다. 한국에서나 독일에서나 똑같이 불안하게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독일 와서 살겠다는 마음이 컸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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