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비난

비판과 자기 입장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by 정병진
'이게 다른가?'


독일어능력시험 문제를 풀 때였다. 비판과 자기 의견을 구분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사고 회로가 턱 막혔다. 주어진 5개 문단에서 '저자가 비판(Kritik)하고 있는 문단은?' 이런 질문과 어울리는 문단을 찾아 짝지으면 되는 문제였다. 내가 헷갈린 질문은 이 두 질문이었다.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문단은?' 그리고 또 하나. '저자가 자기 입장에 이유를 든 문단은?'


비판이 결국 자기 입장 아니었던가? 이유, 그러니까 그 논거를 대는 지적 행위가 비판이라고 생각해왔기에 문제 풀면서 굉장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문제 해설집에는 비판은 비판이고 논거를 대는 건 논거를 대는 거라고 나온다.


비판은 Kritik이다. 자기 입장은 Standpunkt다. 여기에 이유를 댄다 할 때는 begründen이라는 동사를 쓴다.


내가 헷갈린 이유가 또 있다. 비판이 결국 '이래서 잘못됐다'는 입장과 같은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어 문제집에서는 다르게 본다. '잘못됐다'는 건 주관적 가치판단이 이미 내려진 상태다. 그런데 독일어에서는 비판의 개념이 '이러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다', 즉 어떤 대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뉘앙스에 조금 더 가까웠다.


독일 학교의 라틴어 수업을 예로 들 수 있다. 저자의 비판은 '라틴어 수업이 오늘날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라틴어 수업에서 학생들이 자기 의견을 활발하게 피력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구시대적 방법인 받아쓰기나 지금은 쓰지도 않은 고어를 배우는 낡은 수업은 불필요해졌다는 인식을 소개한다. 라틴어 수업에 반감을 가진 부모들이 차라리 자녀가 스페인어를 배우길 바라고 있다는 시대상도 덧붙여 묘사한다. 이 내용이 '비판'에 상응하는 문단이다.


반면, 저자가 자기 입장에 근거를 드는 내용은 확실히 다르다. 일상 속 유용함(Alltagstauglichkeit)이 떨어지고 목적이 또렷하지 않은(Zweckfreiheit) 라틴어 수업의 특성이 비판 받을 여지를 주지만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진정한 장점(die wahren Vorteile)이 있다는 게 저자의 중심 입장이다. 라틴어 수업을 비판할지언정 결국 옹호하는 게 저자의 입장인 것이다.


eine Art neutralen Raum, der das Nachdenken über Sprache und Sprachlernen


저자는 그 이유로 라틴어 수업이 언어와 언어 학습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일종의 '생각 공간'이라는 점을 든다. 라틴어 수업이 독일어를 비롯한 유럽권 언어의 문화를 보여주고, 다른 언어와 전혀 다른 라틴어 계열 언어만의 정체성을 특징짓는다는 설명이다.


'애정어린 비판'이 가능한 이유


나는 이 대목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어떤 대상을 비판한다고 해서 내가 그 대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애정어린 비판'이 그래서 가능걸까.


어렴풋하게 이런 개념을 적용하며 살긴 했던 것 같은데 실상은 비판과 내 입장을 혼용해왔다.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그 이유를 듦으로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게 기성 정치와 언론의 비근한 문법이다. 이런 언어 환경에서 10년 간 일해온 내가 비판과 주관적 입장을 구분하는 일은 마치 안 쓰던 근육을 쓰기 시작한 PT 초보자의 근육통처럼 힘든 작업이다. '비판적 입장'이란 표현도 곧잘 쓰지 않나!


이때 '비판과 비난은 구분해야 한다'는 명제가 떠올랐다. 우리가 학교나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자주 듣기도, 쓰기도 하는 표현이다. 내가 배운 점을 이 명제에 대입해보면 비판은 대상이 특정 기준에 못 미치거나 부작용, 문제를 일으킬 경우 그걸 지적해주는 걸 가리킨다. 비판하지만 옹호할 수도 있다.


비난은 자기 입장과 그 이유일텐데, 보통 특정한 이유 없이 자기 입장만 배가하는 일이 다반사다. '니가 그냥 싫어', '저 정치인은 그냥 재수 없어' 뭐 이런 식? '가짜 뉴스'는 그 이유조차 부정확하거나 틀린 게 많아 정말 위험하다.


비판과 주관적 입장을 구분할수록 '개선의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비판하는 순간, 적으로 돌려버리는 집단적 행태를 그간 숱하게 봐왔기에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느껴진다.


언론의 커뮤니케이션 양상도 비판과 비난이 뒤섞인 경우가 많다. '팩트'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건 이 둘을 그나마 구분짓게 해주는 도구가 팩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팩트라는 것도 어느 입장의 논거로 활용되느냐에 따라 비판이 될 수도, 비난이 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비판비난을 구분하기 위해선 내 주관적 입장을 객관적 비판과 구분짓고 떼어놓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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