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versität Hamburg, Masterstudiengang von Journalistik und Kommunikationswissenschaft.함부르크대학교, 저널리즘&커뮤니케이션학 석사과정.
“자리를 수락하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을 때, 몇 번이고 의심했다. 이게 합격이 된 건가? 축하한다는 흔한 표현 없이 '자리를 받겠느냐'고 대뜸 물어오는 이 저돌적인 메일은 뭘까 싶었다. 스팸 메일인가? 보이스피싱?
아니었다. 합격 메일이었다. 7월 15일이 접수 마감이었던 함부르크대학교에서 8월 초순 이메일로 합격 연락을 받은 것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여주고 발신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학교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뒤에야 '이게 합격증이 맞구나' 확신했다.
학교 지원 포털 'Stine'에 뜬 내 합격 문건들. 입학 뒤에는 이 사이트에서 학점 신청도 다 한다.
이후 학교 지원 포털에서 정식 합격 문건을 다운로드 할 수 있었다. 학교 입학 센터가 우편으로 교통 카드와 학생증, 수강 신청용 시리얼 번호 등을 보내왔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독특한 행정 처리!
어떻게 붙었지?
함부르크대학교 저널리즘•커뮤니케이션학과는 최상향 지원이었다. 합격 소식이 믿기지 않았던 이유다. 총 13개 대학에 지원했는데, 함부르크대는 '어차피 떨어지겠지만 그냥 넣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원서를 썼다. 그런데 내가 합격이라니!
정량 평가로는 떨어질 이유가 다분했다. 학부 졸업 논문은 다른 활동으로 대체했고 독일어 최소 기준인 C1 자격증도 없었을 뿐더러 연구방법론은 학부 때 한 과목을 안 들어서 학점이 부족했다. 다른 학교 지원할 때도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감이 없었다. 탈락도 속출했다. 숱한 밤을 '내가 될까?' 뇌까리며 애를 태웠다.
학교 강의실 모습.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난... 줌에 갇혀 있다. 사진 : UHH
나를 어필할 방법은 정성 평가 뿐이었다. 언론사 경력을 적극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함부르크대학을 지원할 때는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세심하게 준비했다. 우리과는 매년 3가지의 질문을 바탕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 올해 항목은 '지원 동기', '졸업 후 계획',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는 언론의 의미'였다.
이를 작성하기 위해 이 학과와 관련한 자료를 유튜브와 구글링으로 뒤졌다. 그러다가 우리과 학생 선발위원회 위원장인 릴리엔탈 교수의 온라인 강의 영상을 발견했다. 예전 학생들 오리엔테이션 영상이었다. 옳거니! 릴리엔탈 교수의 강의를 통해 이 학과가 무엇을 중시하는지, 학문적으로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 포착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기소개 소재를 골랐고 브레맨대학교 자소서 내용과 적절히 섞어 제출했다.
불확실할 땐? "일단 저질러"
대학원 정보를 모아 분류한 뒤 원서를 넣고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 8개월 걸렸다. 한국에서 기초 정보를 탐색한 기간까지 치면 꼬박 1년이다. 하지만 대학원을 실질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던 건 독일에 오고 난 뒤였다. 한국에서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독일어 B1 자격증을 방송국에 다니면서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지원을 하면서도 '이게 지금 맞게 하고 있는 건가' 싶을 때가 너무 많았다. 학교마다 전형이 다 달랐다. 합격 가중치를 비롯해 인정되는 학부 과목까지 뭐 하나 확실하게 이해되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제일 확실한 것부터 했다. 내 학부 학점을 독일 학점으로 인정받는 VPD 신청이었다. 이것도 블로그마다 설명이 다 달랐다. 결론적으로 우니아시스트라는 대학 지원 사이트에서 VPD를 받았다. VPD를 요구하는 대학이 우니아시스트 지원 목록에서 활성화됐을 때 신청하고 돈을 내면 독일식으로 환산된 학부 학점을 인증받는 구조였다. 최종 결과를 받기까지 4주 정도 걸린다. 정말 다단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각종 증명서를 번역해서 공증받은 후 사본까지 만들어 공증을 또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엄청 남았어요.. 너무 많이 했어요..
원서 지원 자체도 까다롭다. 어느 학교는 종이로 지원서를 뽑아 수기로 작성해 우편으로 부쳐야 한다. 또 다른 곳들은 인터넷 자체 페이지로 접수했다. 그런데 정보를 기입해야 할 항목들마다 용어가 다 약간씩 달라서 지원서 쓸 때마다 짜증이 밀려온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물어보고 학교에도 문의하며 하나하나 더듬어가야 했다. 내 마음은 원서 지원 그 자체만으로 이미 초주검 상태였다.
지르고 나니 '어? 마음이 편하네?'
일단 꾸역꾸역 썼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특히 가중치고 나발이고 도저히 모르겠다 싶어 그냥 13곳 대학원에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모아 보냈다. 이력서는 물론 모든 학교가 "필요없다"고 응답한 추천서까지 다 첨부했다. 어느 틈에 내 마음은 '나는 도저히 저 13곳 대학의 유불리를 따질 위인이 못 되니 너희들이 나를 좀 알아서 잘 평가해줘'라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막 '잘 분석해서 합격률을 높여야지' 하는 마음을 버리니까 속이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배 째라'는 심정으로 일단 지원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런 방식이 먹혔던 걸까. 선발위원장이 굉장히 친절했던 어느 대학에서 만료된 토익 점수도 괜찮다며 영어 점수를 보내달라는 추가 메일을 보내왔다. 오호, 뭔가 진행이 되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럼 막 의욕이 솟고 흥분됐다. 다른 학교들도 지원자 개인 계정에 지원 과정이 실시간으로 뜨기 시작했다. "Leider..(유감스럽게도)"로 시작하는 거절 응답이 다수였지만 몇 군데 합격증을 받았다. 내 기준에서 피상적으로 하향 지원했다고 여긴 곳들은 신기하게도 다 떨어졌다. 내 선택은, 돌아볼 것도 없이 저널리즘 명문 함부르크였다.
인생이 깝깝할 때
'아나운서, 앵커' 타이틀을 내려놓고 아무도 날 모르는 독일에 넘어와 새 목표를 이루는 과정은 말 그대로 도전이었다. 한국에서도 죽을 힘을 다해 하루하루 일해야 했기에 이왕 같은 노력을 들일거면 조금 더 미래 지향적인 곳에 쏟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영혼과 체력을 소진하는 삶은 그만두고 싶었다. 지식과 기술을 연마하고 싶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를 기르고 싶었다. 뇌를 자극하고 일상을 추동하는 전혀 다른 환경을 찾아 해맸다. 이때 독일이 나에게 손짓을 했다.
'내 선택이 틀렸으면 어떡하지?' 정작 독일에 오고나서 돈 걱정, 비자 문제, 학교 문제, 집 문제 등이 뒤섞여 터질 때마다 35살(올해는 36짤..)에 툭 저지른 '독일 이주'라는 도전이 너무 무모해보였다. 아내와 아이들 볼 낯이 없었다. 자꾸 땅으로 시선이 고꾸라져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럴 때는 하늘을 봤다. 신앙인으로서 기도했다. 하나님, 더 큰 그림을 보게 해주세요. 5천 명 밥 그릇 빼앗는 사람 말고 5천 명 먹이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내 역량보다 큰 목표를 떠올리며 기도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눈 앞의 어려움은 작아져 있었다.
이렇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난 뒤에는 생각을 비웠다. 대신 행동을 했다. 어학 시험 문제를 풀었고, 행정 당국에 메일을 썼다. 기계처럼 썼다. 꾸역꾸역 여기저기 이메일을 보내고 나면 답장이 온다. 그러면 그 답장만 따져서 다음 절차를 밟는다. 독일에서의 삶의 패턴은 꼭 이런 식이다. 여력이 생길 때마다 바로 저질러버리는 행동 전략은 독일에서 내가 익힌 아주 중요한 인생 기술이다.
생각에 머물지 말자. 그 생각에 갇힌다. '할 수 있을까'를 따지지 말고 '해야 하는 일인가'만 생각해보자. 잘 모르겠으면 일단 저지르는 용기 내지 객기가 필요하다. 여력이 생길 때마다 저지르는 거다. 반응이 반드시 온다. 그럼 거기서부터 도전을 이어나가면 된다. 실마리가 거기 있다.
그 덕분인지 후회가 없다. '그 때 해볼 걸' 하는 후회가 없다. 인생의 무대를 한국에서 독일로 바꿔버린 것도, 회사를 그만두고 독일 대학원에 지원해 합격한 것도 모두 감사하고 뿌듯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