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이 꿈이 되어버린 세상

by 정병진

정규직과 보상심리


데이터분석 전문가인 바이브컴퍼니의 송길영 부사장의 유튜브 강연을 자주 접한다. 최근엔 그의 책 [그냥 하지 말라]도 e-book으로 읽었는데 한 구절이 턱 와닿았다.


'스펙'이라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단어가 쓰이기 시작한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학점이나 토익 정도만 준비하면 됐는데 지금은 스펙 9종을 채워야 합니다. 봉사활동, 제2외국어 등의 준비를 오랫동안 하다보니 이 경쟁을 뚫고 들어온 이들에게 보상심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성과의 보상'이라기 보다 입사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겪은 '경쟁의 보상' 같은 것이라 할까요. 어쩌면 나중에 보상받을지 장담할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한 상사가 그때 있지도 않을테고요.

-송길영 [그냥 하지 말라]


정규직은 당시 취준생들의 강렬한 욕구이자 목표였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나운서로 일하면서는 줄곧 비정규직이었다. 피터지게 노력해 수백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커리어를 쌓아갔지만 늘 비정규직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 했다. 왜냐하면 확률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아나운서 정규직 일자리는 지상파 3사와 JTBC 정도만 제공했기에 모두 합쳐봐야 지상파 아나운서 정규직 일자리가 평균 KBS 3명, MBC 2명, SBS 2명, JTBC 1명, 총 8~10명 안팎이었다. 지원자 수는 최소 3천 명이 넘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커리어를 쌓게 된 곳에서는 한 때 100여명의 사내외 인사들의 평가를 받아 S, A, B, C 등급 중 S 등급을 두 번 받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가 생겼다. 하지만 그 제도를 도입한 대표는 대혼돈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이 시작된 이후 새 정권 출범과 함께 사라졌다. 그 제도의 수혜를 입은 사람은 단 1명 뿐이었다.


그 이후 부임한 리더십은 모종의 정의감을 기치로 내걸었으나, 사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정의감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회사 개혁의 구심점이었던 선배들은 "너희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한탄과 답답함 섞인 말을 했다. 비정규직 동료들을 불러 모아놓은 커피숍 회동에서 한 말인데, 그 말과 그 날의 분위기, 뉘앙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팀장은 비정규직 앵커들에게 공공연하게 '개편이 되면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훗날 어떻게 쓰일지 몰라 그 모든 말들을 다 녹음해 두었다. 정보통신비밀보호법상 내가 현장에 있었다면 위법이 아니니까. 듣고 또 듣곤 했다. '선배'라는 분들의 여러 발언들. 여튼 같이 고민해보고 해결책을 찾아보려는 정규직 선배는 아무도 없었다. 기껏해야 위로주 한 잔?


'공채 시스템'이 송길영 사장이 언급한 '경쟁의 보상' 심리와 맞물리는 구조가 핵심이었다. '너희들을 정규직화 하면 사내 정규직 공채 동료들의 반발이 만만찮다'는 게 일관된 주요 논지였다. 공채로 입사한 정규직 직원들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한 사내 반발 심리는 우리 사회 저변에 넓고, 깊게 깔린 거대한 방어 기류였다. 문재인 정권에서 깜짝 추진한 중진공 비정규직 전환이 사내 반발로 어정쩡하게 식어버린 케이스가 극명한 케이스다. 이런 기류는 아마 지금도 한국 사회 저변에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기억의 편린에 깊숙이 박혀 있을 것이다.



구조적 폐해


비정규직 문제는 방송국 전반에 팽배한 현실이었다. CJ E&M 드라마를 제작하던 비정규직 스테프가 2017년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이 사건이 있었다. 방송 현장에선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살인적인 노동 시간을 소화해야 했다. 고 이한빛 PD 이야기다. 그의 유서에는 '힘없는 비정규직 스테프들을 격무 속으로 몰아대고 쥐어짜는 현실이 괴롭다"고 써 있었다. 그의 친구 박수정 씨는 "노동을 착취 당하는 이가 누군가의 노동을 착취해야 하는 폭력적인 구조를 바꿔나가는 게 친구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역설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정규직과 동일한 수준으로 일을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아이템 회의부터 기사 작성 등 배우고 해낼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속보 처리부터 국가적 특보 상황까지 정규직 못지 않게 잘 처리했다고 자부한다. 실제 좋은 평가를 내부적으로 많이 받았다. 프리랜서는 자기 방송만 '띡' 하고 사라져도 상관 없지만 뉴스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렇게 준비해서는 안 됐다. 근로자성이 충분히 인정될 만한 요건이 충만했던 것이다.


실제로 MBC에서는 16, 17사번 비정규직 아나운서들이 회사가 구두로 약속해온 정규직화를 이행하지 않자 중앙노동위에 호소했고 중노위는 이들을 모두 정규직화 시켜야 한다고, '근로자성이 인정된다'고 결정했다. 행정법원은 지난 2020년 3월 즈음 중노위 결정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MBC는 항소를 포기했다. 그때 MBC 후배들이 소를 제기한 내용을 살펴보면 근로자성 인정, 정규직 전환 구두 약속 등이 핵심 승리 요인이다.


그런데 자세한 내용을 보니 나는 그 친구들보다 더 많은 일을 감당하며 근로자성이 초과 인정될 정도로 업무를 봤던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여러 선배들로부터 공공연하게 들어온 정규직 전환에 대한 구두 약속이 바로 저거였구나, 싶기도 했다. 당시 공채 합격 이후 인사팀장은 대면 첫 날 "정규직 전환 평가가 있을 것"이라며 연봉계약직 계약서를 내밀었다.


하지만 사측은 정규직 전환 평가를 실시하지 않았다. 쪼개기 계약을 이어가다 1년 364일째 되던 날 나를 내보냈다. 2년째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면 무기계약직으로 자동 전환되기 때문에 하루 전까지 나를 쓰고 '자동 계약 종료' 되게끔 자른 것이다. 암투병을 하다가 서울에서 부임한 당시 사장은 떠나는 날 내게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마지막 인사였다. 이 논리는 서울 MBC에서도 동일하게 튀어나왔으나 법원은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나는 용기가 없어 그 모든 싸움을 포기했었다. 막 태어난 딸아이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닦고 다시금 바보 같이 정규직이 되기 위해 대학생 취준생들과 뒤섞여 스터디를 시작했다. 기자 시험을 준비한 건 이때부터였다.



정규직이 꿈이 되어버린 세상

Screenshot 2022-12-01 054908.jpg 영화 [너의 결혼식]의 한 장면

박보영, 김영광 주연의 2018년 개봉작 <너의 결혼식>을 취준생이던 당시 생각없이 보다가 저 장면에서 울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창 시절 풋풋한 첫사랑과 헤어진 뒤 서로 각자의 꿈을 이루고 재회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장면이다.


"야 너 그 정규직 됐다면서, 잘 됐다. 축하한다"


당시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꿈은 대통령도 세계평화도 아닌 정규직이었다. 그 시절 나 같은 취준생들이 다 그랬다.


지금 Z세대는 그 단계를 넘어 각자도생을 위한 '수익 파이프라인' 만들기에 한창이다. 미 연준의 금리 인상으로 인한 강달러 이전까지의 코인 열풍, 신사임당을 비롯한 경제 유튜버들의 대박,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창업 열풍, N잡러, 긱 경제, 영끌족의 등장 등이 그런 현상이었다.


송길영 부사장의 "나중에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한 상사가 그때 있지도 않을 테고요"라는 문장이 그 배경이다. 회사보다 우리네 수명이 더 길어졌기에 정규직이 되었다 한들 정년 보장이 쉽지 않을 뿐더러 한 직장에서 나오는 수입 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 됐으니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학점이나 토익 정도만 준비하면 됐는데 지금은 스펙 9종을 채워야 합니다.

-송길영 [그냥 하지 말라]


이 말은 틀렸다. 10년 전이면 2012년인데, 내가 한창 취업 준비했던 2008~2011년을 돌아보면 그때 '취업 5종 세트'라는 신조어가 조명받곤 했다. 송 부사장의 저 말 만큼은 틀렸다. 학점, 토익은 당시에도 디폴트였다. 봉사활동에 인턴 경력 등 직무 경험이 필수였고 어학연수까지 치면 기존 취업 5종 세트가 당시에도 취준생들을 짓눌렀다.


나는 정규직이 꿈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낙오했다. "왜 독일로 이민했어요?"라는 질문에 아이들 교육이나 번아웃 등 다양한 소재로 대답하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저 뒤틀린 세상에서 낙오자로 살기 싫었던 게 가장 큰 이유다. 그 노력이면 어디서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졸업 후 10년 간 아무리 발버둥쳐도 바뀌지 않았던 처우, 무책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화, 비정규직 뉴스를 전하는 숱한 비정규직 아나운서들의 냉가슴이 응축돼 내 가슴 깊은 곳에 늘러붙어 있다. 그리고 삶이 느슨해질 때마다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 응어리들을 핵융합 폭발시켜 에너지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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