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앞두고 있다. 선택지 3개를 두고 아내와 나는 고민에 빠졌다. 1번 선택지는 월세가 2,200 유로 선이다. 방 2개에 화장실 2개, 무엇보다 독일에서 놓치기 아까운 바닥난방 신축 건물이다. 문제는 지금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들 학료를 옮겨야 할 정도로 거리가 꽤 멀다. 2년 안에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딸아이에게 학교를 바꾼다는 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2번 선택지는 월 2,450 유로 선의 사실상 주택이다. 안뜰이 마치 한국에서 살았던 종로 팔판동 한옥 마당을 연상케 한다. 모두 리노베이션 됐고, 난방 기기도 모두 최신 라이에이터(하이쭝, Heizung이라고 한다)로 교체됐다. 걸림돌은 외관이 약간 난민촌 느낌 내지 하얀 컨테이너촌 같다는 점,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단 외곽이어서 딸아이가 혼자 자전거 타고 오가기엔 멀다는 점이다.
3번 집은 한국식 다세대 빌라인데, 2층에 자리한 1,800 유로 보눙(Wohnung)이다. 우리 동네에서 싼 집은 다 이유가 있다. 주방이 좁고 냉장고가 작다. 화장실이 1개이며 전반적으로 건물이 낡았다. 그나마 방이 넓게 빠졌고 창틀이 견고했다. 마음에 드는 지점이다. 이 집에서는 착실히 돈을 모아 내 집 장만의 목표도 이루기에 수월하겠다는 계산이 선다. 하지만 화장실이 1개라는 말을 듣자마자 딸아이가 질색팔색했다. 가뜩이나 대소변 볼 때마다 동생과 화장실 쟁탈전을 벌이는 딸아이였다. 2차 성징이 조금씩 시작될 기미가 보이는 딸을 생각해서라도 다음 이사는 화장실 2개 딸린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이사할 때 고려한 결정적 변수
딸아이와 아들녀석을 모두 거실에 불러 앉혔다. 1번부터 3번까지 선택지를 모두 브리핑했다. 집 방문(Besichtigung) 시 찍어온 영상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결아, 설아. 너희는 어떤 집으로 가고 싶어?"
딸아이는 주저없이 2번을 골랐다. 방갈로형 그 주택 집이다. 이유는 역시 2개의 화장실이었다. 게다가 넓고 깨끗하게 리모델링 된 집이라는 점, 학교에서 이 집까지 자전거로 통학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는 점을 꼽았다. 막둥이는 누나 말을 리바이벌 하며 자기도 2번 집으로 가고 싶다고 외쳤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아직 우리가 이사갈 집은 확정되지 않았다. 아직 부동산에서 최종 계약서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내가 지금 이 이사 과정을 짐짓 즐긴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을 '이사'라는 우리 집안 빅이슈의 의사 결정권자로 참여시켰다는 게 포인트다. 동기는 아이들이 집안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데 배제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아이들 스스로 '내 의견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부모님이 우리 입장을 들어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길 바라는 포석이다.
직계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이 단단한 소속감을 경험하길 아내와 나는 진심으로 소망한다. 어떤 의견이든 용납 받을 수 있고, 그럴 듯한 아이디어는 실제로 의사결정에 반영해주는 공동체는 구성원 스스로에게 적지않은 효능감을 느끼게 해준다고 믿는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느껴온 자아효능감이 곰비임비 마음에 쌓여 이윽고 견고한 자아존중감으로 싹트길 기대한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의 의견을 자꾸 구한다. 최악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안에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까지 공유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면 아이들 눈빛이 퍽 진지하다. 그 진중함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진기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