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를 적용한다면 대학 시절 저는 극강의 E 성향이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곤 했죠. 처음 만나는 누구와도 반갑게 포옹하며 "왓썹 맨~?"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사람이었습니다.
패션도 가관이었습니다. 정장에 비니를 쓰고 다니길 좋아했습니다. 정장 안에는 브이넥 니트를 입고 말이죠. 아방가르드한 패션이었지만 제멋에 취해 살았기에 부끄러움은 늘 친구들의 몫이었습니다.
극강의 E 성향이 점차 누그러진 건 아무래도 군생활 영향이 컸습니다. 군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강수지'랄까요. 강압적이고 수직적이고 지랄맞고. 평범해보이는 사람들이 계급의 완장을 차면 소름끼치게 변한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이등병으로서 긴장감 넘치는 매일을 보내던 어느 날, 하늘 같은 병장 한 명이 내무실에서 집단 구타를 당했습니다. 꼬인 군번의 물병장이, 즉 병장이 위아래로 너무 많은 기수여서 병장다운 권력을 누릴 수 없는 녀석이 감히 군용 러닝셔츠가 아니라 흰색 사제 러닝셔츠, 시쳇말로 흰메리야스를 입었다는 이유였습니다. 군화발에 짓밟히던 오 모 병장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제 눈이 너무 뜨거워져서 그만 고개를 푹 숙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결혼하고나니 성향이 더 바뀌었습니다. 대문자 E에서 소문자 e로, e에 조금씩 i가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당찬 I 성향인데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를 힘들어 합니다. 특히 모르는 사람이 많을 때 크게 피로를 느낍니다.
자연스레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방송국 생활 할 때는 일 할 때 워낙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니 티가 안 났지만 평상시에는 사람 많은 곳보단 가족끼리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용한 곳을 찾았습니다. 삼청동 옆 팔판동 한옥에 살면서 고즈넉한 분위기와 그림, 조용한 선율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저의 적절한 e와 i 성향이 조화를 이루는 듯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고요함이 좋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가 ASMR 처럼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그러다가 주말에 담장 너머 집에서 파티라도 열면 신나는 EDM에 저 또한 둠칫둠칫 리듬을 타봅니다. 가족이나 이웃들과만 소통하다가 함부르크 한인청년회 창단멤버가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격의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저지만, 지금은 적이 불편하곤 합니다.
원래 나이들면서 그런 걸까요? 대학 시절이라면 저도 릴스나 틱톡커가 되어 엄청나게 영상을 찍어댔을텐데 이젠 그런 열정이 솟지 않네요.
2023년 지금의 나
뭐 그래도 인생을 차분하게 관조하게 된 지금 역시 좋습니다. 내 생각으로 꽉 차서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들었던 오만함을 점차 벗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게 좋습니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었나 자신에게 물으며 살아가는 현 독일 생활이 퍽 좋습니다. 그렇게 저라는 사람이 되어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