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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진 Jan 17. 2019

뒤늦게 봐버린 드라마 '나의 아저씨'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고생 많았어요. 좋은 사람들. 출처: 공식 홈피

너무 펑펑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다. 우연히 본 클립에 꽂혀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한 결과다. 얼마 전 마지막 16회를 완료했다. '내 생에 이런 드라마가 있었나' 싶었다. 캐스팅, OST, 구성, 대본, 카메라 앵글, 미장센, 편집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단문 대사 한 마디가 가슴을 너무 아프고 후련하게 후벼파는 드라마다.


처음에는 구겨지고 낡은 중년들을 보며 괜스레 가슴 미어졌다. 30~50대까지 근 20년 사회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볼품없이 낡아버린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이들은 <정희네>라는 친구 술집에서 우정에 기대어 '한 물 가버린'  서로의 중년을 토닥인다.

이리저리 치이며 구겨진 중년. 그럼에도 친구와 가족 덕에 좋다. 출처: 드라마 갈무리

아들이 아빠의 취미나 특기를 촬영해와야 한다는 과제를 들이밀었을 때 딱히 보여줄 게 없는 중년은 쓸쓸하다. "취미 특기야 어렸을 때 학원 다니며 배운 게 쭉 이어져서 만들어지는데, 나야 뭐 학교 빼곤 돈 내고 배워본 게 있어야지" 끌끌대며 웃는 듯 우는 듯 말하는 중년은 가슴팍이 먹먹하다. 나이 들어선 돈 안 되는 일에 돈 써본 적 없다는 그 말에 공감하며, 그래서 처음엔 '아 이게 남자들 진하게 울리는 드라마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게 보다 보니 남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였다. '인간이라면 최소한 어때야 할까' 고민하게 만든다.

고맙습니다. 엄마. 출처: 공식 홈피

어른이 뭘까. 부모라면 아이에게 최소한 뭘 가르쳐줘야 하는 걸까. 부부는 왜 호흡이 중요할까. 사람 사이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뭘까,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갑질이 인간됨을 어떻게 뭉개는가, 구석에서 안 보이게 움직이는 비열함이 얼마나 무서운가, 나뉘어버린 계층과 계급은 삶의 궤도를 어떻게 무섭게 바꾸나. 우정은? 죽음은? 장례는? 사내 정치는? 고부 갈등은?  재능, 일머리, 엄마, 형제, 행복.... <나의 아저씨>는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단한 현실 속 이야기를 세련된 연출로 자연스레 녹여냈다.


숨에 대한 통찰은 드라마의 백미로 꼽고 싶다. 드라마 중반까지 이선균 대사 7할이 '한숨'이다. "밥 먹었어?...쉬어..." 삶에 눌리고 직장에 치이던 중년이 말을 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한 숨이 섞여 나온다. 아내 역으로 분한 이지아는 그런 이선균 때문에 숨이 막힌다. 시어머니의 눈치도, 남편과 친구인 동서의 등쌀도 숨통을 누른다. 결국, 아내는 남편이 경멸하는 학교 후배와 바람을 피운다. 이지아는 바람을 피우면서 "숨 좀 쉴 것 같다"고 한다.

퇴근길 술 한 잔의 쉼표. 출처: 드라마 갈무리

나도 가끔 아내와 말다툼 할 때가 있는데, 아내는 내가 한숨을 쉬어서 너무 갑갑하다며 속상하다고 한다. 나는 내가 한숨을 쉰 줄도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쉰 것이다. 이리 눈치 보고 저리 뛰어다니며 삶의 고단함에 절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오면 긴장이 풀리고, 아무것도 신경쓰며 생각하고 싶지 않아 절로 새 나온 한숨이다. 고단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별 압박으로 구겨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현실과 위로가 <나의 아저씨>의 주요 감상 포인트다.


숨은 결국 사람으로 쉬어진다. 드라마는 해피엔딩인데 상투적이지 않다. 그냥 덤덤하다. 등장인물들은 죗값을 치르고 은혜를 갚으며 구겨진 숨통을 트여간다. 극중 '박동훈(이선균)'은 지옥 같은 현실이 이지안(아이유)을 겪으면서 점차 편안해진다. 날카로운 길고양이 같았던 이지안은 어른 같은 어른들 덕에 할머니를 부양할 짐도, 밥벌이에 대한 부담도 덜게 돼 그 가느다란 숨이 절로 편안해진다. 같이 욕해주고 싸워주며 장례식 초라하지 않게 채워주는 그런 어른들이 있어 마음이 녹는다. "편안함에 이르렀나?" 이선균은 새 삶을 살아가는 이지은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렇다는 답이 돌아온다. 숨이 편안하게 쉬어진다.

지안 고생 많았어. 출처: 공식 홈피

'혼자라서 고독하지만 함께여서 기운난다'는 평범한 주제를 참 잘 빚은 드라마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멋져 보이거나 보답을 바라서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누군가를 밟거나 구기지 않았으면 해서다. 가뜩이나 저마다 고단할텐데. 우린 자꾸 알게 모르게, 아니 은근히 알거니와 그걸 고약할 만큼 즐기면서 남을 힘들게 한다. 치사하게 살기보단 덤덤하게 살고 싶다. 작은 온기라도 같이 나누다 보면 나같은 멋없는 인간도 '개저씨' 소리 안 듣고 '나의 아저씨' 소리 들으며 나이들 수 있지 않을까. 내 세월의 더께는 그렇게 고운 빛깔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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