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SCIENCE 3월 편집장 메모
수능시험 언어 영역 과학 지문 앞에서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43~47번까지 5문제가 달린 '양자 역학' 지문이었다. 지문을 정독했더니 생각의 회로가 급격한 혼돈에 휩싸였다. 같은 방향에 대한 운동량 합이 0인 한 쌍의 입자를 각각 지구와 금성에 떨어뜨려놓아도 연관을 유지한다는 가정을 읽는 순간부터 이미 카오스였다.
45번 문항에는 뜨겁거나 차갑고, '딩' 혹은 '댕' 소리가 나는 한 쌍의 구슬이 등장한다. 한 알은 내가, 다른 구슬은 친구가 갖는다. 이 구슬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알아보기 위해 어느 한 사람이 구슬을 만져보거나 두드려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의 구슬에도 영향을 준다. 양쪽 다 '딩' 혹은 '댕' 소리가 반반의 확률로 나게 되는 이유다. 이 지문을 그 촉박한 시간에 다 이해하고 풀려 했던 나는 불 속에 뛰어든 추구처럼 순식간에 잿가루가 됐다. 재수생이 된 결정적 이유였다.
그날 시험장에서 양자 역학 내용을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인정'만 한 후 문제를 연이어 풀었다면 어땠을까. 그날 수능을 그렇게 물 말아먹지는 않았으리라. 과학 콘텐츠를 다뤄보니까, 무조건적인 이해 보다는 당장의 결과를 조금이나마 인정해보려는 태도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과 관계를 철저히 찾아내 현상을 완벽히 이해하려는 시도는 새 가설이 나오거나 가설이 입증되는 순간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특정 값이 도출된 경위나 일련의 결과들을 종합해 일부분이라도 '인정'한 사람은 그 다음 또 수긍할 만한 내용이 없는지 탐구하게 된다. 무너질 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잡지 3월 호에 실은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는 얼른 납득하고 싶어지는 글이다. '양자 얽힘'이 왜 양자의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건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든 독 살포 상자를 열어봤을 때 고양이가 죽었거나 살았을 거라는 결과를 알고 있다. '왜 반반이지?' 의문을 품기에 앞서 '아 반반이구나!' 인정하는 과정은 그래서 중요하다. 입자가 서로 얽혀 있어, 한 입자 값을 측정하면 다른 입자의 상태 또한 알 수 있다는 '얽힘'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너무 작은 미시 세계에서 입자가 이동하는 양상은 축구공이 굴러가는 그것과 같진 않을 터. 숫자만으로도 설명되는 세계가 있구나 수긍하려는 찰나, 2004년 수능 양자 역학 지문이 오류 투성이라는 이화여대 김찬주 교수의 글을 본다. 지문 속 '운동량'이라는 용어가 틀렸다는 게 골자다. 본래 '스핀'으로 되어 있었을 텐데 출제 위원들이 '운동량'이라는 잘못된 해석을 지문에 넣었고 문제가 다 엉망이 됐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45번 문제는 모든 보기가 정답이 될 수 있다. 이쯤되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먼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