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썬득한 겨울 삼청파출소 앞에는 두리번거리며 갈피를 잡는 중국인, 동남아 관광객이 자주 눈에 띈다. 정독도서관이냐 금융연수원 방향으로 가느냐 간단히 의논하는 목소리에서는 '딱히 볼 게 없는 것 같다'는 기류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경칩이 지나고 경복궁 담장 너머 목련이 활짝 피면 삼청파출소 앞 외국인 관광객들은 우르르 모여든 각국의 인파 속에 포근하게 묻혀버린다.
삼청동의 봄은 관광객을 타고 온다. 날이 풀리면 한국인 연인들이 부쩍 늘어난다. 예닐곱시면 불 끄고 웅크리던 상점들은 저녁 8시가 넘도록 손님 맞이에 분주하다. 트랜치 코트로 멋을 낸 여성들이 활기차다. 이 겨울 마지막으로 롱 코트를 꺼내 말쑥히 차려입은 남성들에게 삼청의 어스름은 낭만이다.
골목을 귀엽게 염탐하는 사람들 모습이 정답다. 싱그러운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처럼 골목 골목을 기웃거린다. 어디를 말하는 걸까. 체인 상점과 유명 브랜드 매장 등으로 상업적인 느낌 가득한 메인 도로가 삼청로다. 삼청로 곁길마다 실핏줄처럼 골목이 나 있다. 북쪽 방향을 기준 삼으면 삼청로 오른편에 소격동을 시작으로 화동, 삼청동 골목이 자리한다.
그 맞은 편에 팔판동 골목이 있다. 관공서 직원도 두어번 더 발음해줘야 알아듣는 생소한 동네 팔판동. 삼청동의 곁을 채우는 든든한 이웃동네다.
팔판동은 천진한 두 아이, 눈빛이 깊은 아내와 터를 잡은 세 번째 보금자리다. 경복궁과 국립현대미술관, 청와대를 곁에 둔 도심 속 문화•정치 중심지다. 매주 토요일 태극기 아니면 민노총의 외침이 하늘을 두드리는 동네 팔판동. 조선 시대 판서 8명이 살았다 해서 이름 붙은 팔판동에 우리 가족이 산다.
삼청로 바로 옆이지만 평일에는 크게 붐비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아 고즈넉한 이 작은 동네에서 우리의 봄도 꽃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