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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진 Mar 06. 2019

느낌있는 삶

배우 하정우,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니 그가 다시 보인다

배우 하정우를 눈여겨 보기 시작한 건 영화 <의뢰인>을 관람한 이후부터입니다. 이 작품에서 하 배우는 아내를 죽인 용의자로 몰린 의뢰인(장혁)을 변호하는 변호사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영화 중후반에 펼쳐지는 재판정 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공판 중 검사와 논리 대결을 펼치는데 특유의 손짓과 걸음걸이, 쫀쫀한 목소리의 차진 대사가 제 온 몸을 전율하게 만들었습니다. 코로 들이마신 후 깊은 복식 호흡으로 내뱉는 그의 대사에는 여유와 힘이 녹아 있었습니다. '느낌 있다'라는 찬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책 겉표지.

이런 배경 때문에 하정우 씨가 쓴 책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뉴스 도중 하정우 배우의 책이 11월 말에 나왔는데 벌써 4쇄를 찍었다는 소식을 직접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길래?' 싶었습니다. 1쇄가 3천부 정도니까 벌써 그 시점에 1만부 이상 팔렸다는 얘기였습니다. 책을 사고나서 이미 그가 <하정우, 느낌 있다>라는 에세이를 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배우이자 감독으로서 맹활약하는 영화계의 하정우 씨가 그림을 그린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는데 책까지 2권이나 펴냈다니. 열정과 뚝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오한 예술가? 오해를 깨다

하정우 씨가 그림을 잘 그려 개인전까지 하는 모습을 보며 '예술가 기질이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예술가 특유의 '무절제함'이랄까요. 술과 여자를 좋아하거나 늦게까지 잠을 안 자고, 주위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구는 식의 까다로운 성격이 아닐까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 하정우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길 좋아하며 매일 걷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건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작품은 예술가가 안정적이고 반듯한 길에서 벗어나서 일탈하거나 방황할 때 나오지 않나요?' 사람들이 던지는 이런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좋은 예술과 안정적인 삶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좋은 작품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
-118p-


그러면서 되레 규칙적이고 건강한 삶이 꾸준한 작품 활동에 효과적이라는 점을 일러줍니다. 이는 평소 제 지론과도 같습니다. 하 배우를 다시 보게 된 중요한 대목이었습니다.


내 몸과 삶에 나쁜 것은, 내 작품에도 좋지 않다. 부정적인 충동은 절대 예술가의 연료가 될 수 없다. 예술가의 삶은 단 한순간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작업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한 걸음씩 진보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120p-


곱씹음의 미학

배우 하정우의 연기는 '체화됐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습니다. 배우의 인식과 몸에 역할의 행동과 철학을 꾹꾹 눌러담아 농밀한 연기를 펼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김용건 배우로부터 물려받은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걷기' 덕분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하정우 씨는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을 비워내기도 합니다. 특히 그가 스스로의 연기를 곱씹고, 자신이 연출한 영화를 복기하는 과정은 스크린 속 하정우의 연기의 질이 밀도 높게 구현되는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개봉 후 스코어를 받아들면 언제나 촬영 현장에서의 나를 복기하는 습관이 있다. 복기할 때마다 생각한다. 관객수는 우리가 섣불리 예측할 수도, 장담할 수도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개봉 후엔 무슨 수를 써도 다신 돌아갈 수 없는 촬영장에서 힘껏 내 몫을 해내는 것뿐임을.
-116p-


저도 항상 제 뉴스를 YTN 홈페이지 다시보기를 통해 복기합니다. '그땐 이런 질문을 던졌어야 했는데', '이런 그래픽을 하나 더 만들었으면 시청자가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속보를 처리하거나 대담을 구성해야 할 때 당시 미처 알지 못했던 부족함을 복기하면서 더 나은 뉴스 전달을 준비합니다. 가끔은 너무 뒤를 돌아봐 미련이 남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뒤를 돌아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하정우 씨와 걷기 친구들, 대부분 배우들이다. 출처: 책 본문 202p

느낌있게 꾸준하게


친구의 멀쩡한 이름을 자음과 모음을 변형해 별명처럼 부르거나, 자정 전엔 꼭 집에 돌아가 붙은 '신데렐라'라는 제 학창시절 별명까지 똑같은 하 배우의 이야기를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매일 같은 순서로 하루를 시작하며 부지런히 걷고 먹고 곱씹는 그가 꼭 성실한 농부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우직하거 뚜벅뚜벅 걸어가는 건강한 예술가가 되어주길. 팬으로서 기원하고, 또 응원합니다.


내게 주어진 재능에 겸손하고, 이뤄낸 성과에 감사하자. 걸으며, 밥을 먹으며, 기도하며 나는 다짐해본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2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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