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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돌스토리 Oct 24. 2022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

[행사 사회 & 스피치 후기] 경험의 힘

 날이 매우 더운 여름날.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선풍기가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수업이 한창이다. 선생님은 다리가 아팠는지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고 자리에 앉아 대답을 기다린다. '이건 못 풀겠지?' 하는 표정의 선생님을 보며 한 학생이 연신 땀을 흘리고 있다. 더워서가 아니다. 답을 알기 때문이다. 샤이 관종*인 그 아이는 손을 들어 답을 말하고 친구들 앞에서 우쭐대고 싶지만, 수십 명이 바라본다는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손을 들지 못했다.

*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 성향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남들로부터 관심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높은 사람


그로부터 10년 후 그 초등학생은 수백 명이 바라보는 학교 축제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있다.

다시 10년 후 그 고등학생은 회사 행사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내 이야기이다.






 성인이 된 이후의 나만 아는 사람들은 절대 부정하겠지만, 나는 굉장히 내성적인 아이였다.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고 작은 발표 하나 나서서 해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낯가리기를 더해 조용한 사람 중에서도 조용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 안 깊숙한 곳에는 모두가 나를 봐줬으면 하는 관종의 끼가 숨어있었지만 나약한 심장과 성공에 대한 기억이 없던 뇌는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여전히 내부에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두 번 작은 경험이 쌓이고 성공한 기억들이 생기면서 자신감이라는 것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목소리를 혼자만 듣고 실현하지 못했던 이유를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자신감의 부족의 문제였던 것 같다. 나를 알고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부터 점점 바뀌기 시작했으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무대에 서게 되었다. 공연을 하기도 하고 사회를 보기도 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는 무대는 놀러 온 사람들과 함께 즐기면 되기에 부담이 없었다. 실수도 웃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에서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경험을 쌓으며 시간이 보내다 보니 어느덧 회사라는 공간에서도 앞에 서는 사람이 되었다. 100명 내외의 인원 앞에 서는 것은 큰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경험은 조금 달랐다. 임원을 포함한 수백 명이 참석한 자리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마음에 큰 부담 없이 자원했지만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월요일 잠자리에서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을 대비해 진행을 도와주실 아나운서 한 분을 미리 섭외해두었기에 문제없을 것이라 믿고 연습이나 잘하자 생각하며 잠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이크를 통해 들어가는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기를 기다린다. [출처 - Unsplash]



 행사 시작 전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한 노래가 나오고 있다. 이제 잠시 후면 행사가 시작된다.


잠시 후 행사가 시작된다는 한마디의 안내를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온 나는 심장이 뛰었다. 앞자리에 계신 임원분들을 포함해 500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은 그 스케일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더해 정확히 몇 명인지 알 수도 없는 온라인으로 지켜보고 있을 사람들이 떠오른 나는 대본의 첫 줄을 연습한 대로 읽지 못했다. ‘잠시 후 시작하니 착석해달라’는 간단한 멘트였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연습했던 문구와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척 의미 전달만 잘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막상 시작하면 잘 떨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렇게 행사는 잘 마무리되었다. 진행이 매끄러웠다는 후기들을 보며 뿌듯했지만 그렇게 보일 수 있게 도와준 아나운서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대 위에서는 청중의 시선에서는 안 보이는 긴박함이 있다. 시간 관리가 그중 하나이고 시스템적인 돌발 사고와 경품 추첨같이 미리 맞춰볼 수 없는 영역의 진행이 그러했다. 그날도 중간중간 위기가 있었지만 아나운서의 리드와 대처로 우리와 마주 보고 있는 청중들에게는 그 순간들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경험


 속된 말로 짬바라고 하는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오랜만에 실감했다. 세상은 계획하고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리허설과 대본은 하나의 예상이다. 그대로만 상황이 흘러간다면 수백 명의 시선에 적응하는 것 외에는 걱정거리가 없을 것이다. 아나운서 분과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눠보니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행사를 진행해왔다고 했다. 그간의 행사에도 수많은 돌발 상황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상황과 잘된 대처/못된 대처가 그분의 경험 속에는 데이터처럼 쌓여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자잘한 사고들은 오히려 청중들에게 작은 웃음을 주며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당장 다음 주에 나는 또 무대에 선다. 이번엔 공연도 사회도 아닌 스피치를 위해서다. 내 이야기를 풀어내는 첫 번째 자리인 셈이다. 스케일은 무대에 서본 중 가장 크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행사인데 2,000명 가까이 되는 청중에 대표이사님을 비롯한 임원들도 참석하신다고 한다. 흥분되면서 동시에 조금은 부담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스널 브랜딩을 고민하는 나에게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스피치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작은 교실에서 발표도 못하던 아이가 수천 명 앞에서 신나게 떠들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수만 명 앞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당분간은 이 스피치에 몰두해보려 한다.






위의 글과 아래 글 사이에는 2주 정도의 시차가 존재한다. 이미 스피치는 마무리되었다.


 지나치게 스피치에 몰두했던 것 같다. 애초 계획은 위 글을 먼저 마무리 짓고 스피치 이후에 별도의 후기를  남기려 했는데, 모든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글을 마무리짓지 못해 결국은 하나의 글이 올라가게 되었다.



준비한 모든 것은 '계획대로' 성공적이었다. 여유 있는 척 내 이야기를 잘 풀어나갔고 그 안에는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 서보는' 무대 환경은 역시 경험 부족에 의한 아쉬움을 많이 남게 했다. 돌출형 T자 무대는 사방에 관중을 만들어 시선처리를 어렵게 했고, 볼에 붙어있는 핀 마이크는 음량 조절의 어려움과 어색한 손동작을 남겼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 그로 인해 준비조차 하지 못한 것들은 낯설었고 어려웠다.


도전과 경험이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실패가 없는 삶을 사려면 도전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도전을 해야만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은 더 넓은 범위에서 실패가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가보지 않은 길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다음 도전은 지금보다 조금 더 멋질 것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 하는 것은 경험의 깊이가 다르다. [출처 - Unsplash]



+ 바쁘단 핑계로 미뤄두고 있던 이직기를 빠르게 적어나가야 할 것 같다. 이직기를 통한 방문과 조회수가 꾸준히 높게 나타나는데 알고리즘이 내 글을 버리기 전에 노를 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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