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오다

by 지라르

싱클레어.

멀리서 스친 얼굴일 뿐, 더 이상 감정은 일지 않았다.
이젠 내 기억 속에서 지워도 괜찮은 존재였다.


어젯밤 그를 만난 뒤,
삶의 감각이 송두리째 뒤틀려 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짧은 만남이었는데, 그의 말은 오래 남았다.

어른들이 비슷한 말을 건넨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온갖 바르고 좋은 말을 했지만,

나를 통제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달빛 아래 울린 목소리,
그 목소리에 실려온 밤공기,
흔들림 없는 눈빛과
무심히 다가오는 발걸음.

모든 것이 환상 같았다.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수업 시간마다 시체처럼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선생의 말은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칠판에 적힌 글자는 나와 연결되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리 더 배워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확실해지니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집도 나왔다.


굳이 그의 그늘에서 맘 졸이며 지낼 필요가 없었다.
매일 밤 음식과 술을 바치듯 내어놓으며,
내 생명력이 그의 생명력으로 흘러 들어가는 듯했다.


차라리 춥고 배고플지언정,
그 힘을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 옳았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나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대책은 없다.


나오긴 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곱씹었다.
글을 쓰는 것도, 책을 외우는 것도 내 몫이 아니었다.


역시 남은 건 몸뿐이었다.

맞으며 자라며 배운 건 버티는 법,
아무리 얻어맞아도 다시 일어서는 법뿐이었다.


나는 또래보다 큰 덩치와 힘을 가졌다.
그 힘이 어디서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피가 내 안에 흐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거리 위를 서성이다 보니,
삶의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어른들이 모여 있는 곳,
삽질과 망치 소리가 가득한 공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칠고 무질서해 보였지만,

결국 무언가를 만드는 곳이다.


그러나 아직 소년 티가 묻어 있는 얼굴 탓이었을까.
사람들은 나를 흘끗 보고는


'가서 공부나 해라'라며 손사래를 쳤다.


몇 번이고 거절을 당했다.


그러다 한 곳에서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야, 꼬마. 이름이 뭐야?
아직 학교 다닐 나이 같은데,
무슨 사연이 있어서 이러냐?”


그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측은함이 함께 얹혀 있었다.


“크로머입니다. 학교는 나왔습니다.”


“왜? 학교를 왜 안 가? 부모님은?”
“부모님은... 없습니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학교... 거긴 왜 안 가는 건데?"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제가 아는 현실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었습니다."


그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배울 게 많단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공사장.

아직 골조만 남은 곳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하지만 학교에 간다면,

여기 사람들의 삶을 배울 수는 없겠죠."


"여기 사람들의 삶을 배우려고 온 거냐?"


"그건 아닙니다.

먹고살려고 온 겁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진짜 사람들의 삶을 배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모두 먹고살려고 하는 짓 아닙니까?"


그가 피식 웃으며 담배를 꺼내 쥐었다.


“진짜 사람들의 삶을
배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사람들의 삶은 관심받지 못하고,
때로는 정의나 도덕 같은 것에 속할 수가 없어.
아이들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학교 가는 것이 나을 거야.”


“여기 사람들은 적어도 학교를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꿈은 그런 사람들이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완성되면 아이들은
그곳에서 책을 펴고,
선생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미래를 그릴 것이다.


나는 그런 꿈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쌓은 벽돌과 바른 시멘트는
그 속에 남아,
누군가의 삶을 떠받치는 바닥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공사판까지 오게 된 거냐?"

"예. 돈이 필요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입니다.

힘은 자신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내 단호한 눈빛이 통했는지

그는 잠시 망설이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그래봐야 하루 이틀 버티겠지.

일단 한번 시켜보자고."


.


그렇게 시작된 일은 상상 이상으로 혹독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현장에 도착하면,
아직 굳지 않은 흙바닥 위를 밟고
무거운 벽돌을 실은 손수레를 끌었다.
돌이 튀고 땅이 꺼질 때마다
무릎이 휘청거렸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작업도
반복하다 보면 손바닥 살이 벗겨져
피가 배어 나왔다.


하루가 끝날 무렵엔
손이 부어 쥘 수도 없었고,
온몸은 먼지와 땀에 젖어
발가락 사이엔 피딱지가 생기곤 했다.


다음 날, 다시 현장에 서면
쓰러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어른들은 그런 나를 보며 비웃었다.


“야, 꼬마! 벌써 힘들다고?
집에 가서 엄마 품에 안기지 그래?”


그 조롱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들려왔다.
때로는 일부러 가장 무거운 자재를 맡기고,
끝난 줄 알았던 일을 다시 시키기도 했다.
그것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그 덕분에 먹고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

돈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받았다.
작고도 소중한 돈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다.


아픈 몸을 달래는 약을 사거나,

하루 종일 벽돌을 나르고 손수레를 끌다 보니

녹초가 된 팔다리를 겨우 붙잡아 두는 약이었다.


또는 “잠깐 쉬자, 뭐 좀 사와라”라는 어른들의 말에

간식거리를 사 오는 데 쓰였다.


내가 땀 흘리며 번 돈인데도
끝내 내 몫이 되지 못했다.


남의 심부름으로 흘러가고,
내 고생은 그저 웃음거리로 소비될 뿐이었다.


세상은 이렇게 더럽고,
힘없는 자의 노동은 늘 가장 값싸게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언젠가는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과
저 지랄 맞은 어른들조차
결국은 나처럼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를 조롱하고 이용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묘한 감정이 일었다.


피곤이 내려앉은 눈 밑 주름,
습관처럼 굳은 손놀림,
말없이 일하다 퇴근길에
담배 한 대를 물고 하늘을 바라보는 뒷모습.


누구도 대단하지 않았고,
누구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들의 비루함은 오히려 이상한 위로가 되었다.


물론 몇몇은 비겁했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며

꿈도 희망도 없는 얼굴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런 모습마저

이 세상의 한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을 버텨내는 법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법은 조금씩 나에게도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나는 열여덟이 되었다.


이제 내 모습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어떤 어른보다 듬직했고,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예전에는 나를 조롱하며 부려먹던 자들이
이제는 감히 나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나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그리고 그때부터,
내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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