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하나 듣는 것을 목표로 삼고

-다시 낯선 땅에 선 딸에게

by 김산

빛은 사물의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나게 하지 않나? 빛이 없으면 모두가 검게 보여서 물건의 모습을 알 수 없고, 이곳과 저곳의 경계도 보이지 않아. 그래서 어떤 이는 사물은 본래 색이 없다고도 말해.


네가 세를 든 집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던 그때, 가구는 물론 전등 하나도 없는 상황을 어떻게 맞았을까. 얼마나 당황하였을까. 그냥 생각이 무너져 울음만 나왔을 그때를 상상한다.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그런 상황에도 잠깐 당황하고, 전등을 사서는 쓱싹 해결하였을 텐데. 그랬다면 너도 기뻐하였을 텐데. 그러지 못한 우리는, 국경을 넘어오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는, 안타까워도 어쩌나 소리만 반복하는, 무력했어 우리는.


그러나 또 생각한다. 너는 가게로 달려가서는 스탠드를 사고, 이불을 사고, 물을 사고, 침대를 사고, 친구를 맞고, 그러다가 천장에 달진 못해도 스탠드로 한층 밝아진 방을 보고, 조금은 안심했는데, 옷장을 들인 날, 혼자서 꿈적하기도 힘들어 어쩌지 못하고 여기저기 알아보아도 되는 일이 없고, 반품하자니 물어낼 돈이 억울하고,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해서 듣는, 그래서 왜 이리도 되는 일이 없는지 하였는데, 옛 친구를 만나서 3시간을 씨름한 뒤 떡하니 세운 옷장을 바라보던 시간, 친구랑 한식을 함께 먹는 시간, 그때의 너를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보니, 스무 살 설렘이 사라지고, 나보다 어린애들이 동급생이고, 하던 공부를 다시 하는 듯하고, 이역만리 떠나온 현실과 아득한 앞날이 교차하고, 책을 보아도 흥미가 솟지는 않고, 그렇게 지난 1주일은 한 달이 넘는 듯하고.


그러나, 다시 돌이켜 보렴. 너는 불가할 것 같던 상황을 헤쳤고, 옷장이 있고, 물을 식힐 냉장고가 있고, 무서울 것 같던 마을에 조금씩 적응하였고, 수업을 시작하고 있지 않나? 살 수 없을 듯하던 집 주변에 너보다 어린애들도 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함께 강의를 듣는 그 아이들이 모두 각자의 애환을 안고 있지 않을까? 다들 집을 떠나 공부하는 사연 하나쯤은 안고 있지 않을까? 그 궁금함으로 손을 내밀면 네 손을 잡는 이가 있지 않을까? 네가 손 내밀기를 기다리던 벗이 있지 않을까?


두려움은 새로운 두려움을 낳지만,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면 ‘나’는 고민하던 데서 이미 떠나서 있고, 새로운 사태를 만나게 되지 않던가? 그 새로운 사태는 대체로는 전과는 좀 나아진, 그때의 두려움은 사라진, 그래도 새로운 두려움이 생기는, 그렇게 적당히 긴장되는 삶이 아닐까? 너에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언니가 있고, 엄마가 있고, 아빠도 있어. 우리는 네가 어떤 모습을 하여도 품어줄 지지자이니까.


하루하루 늘 흥분이 넘치는 신나는 삶은 없을 거야, 길이 너무 멀다 싶으면 눈을 내려서 가까운 곳을 봐. 지금 눈앞에 일만 하는 거지. 그러다 여유가 생기면 고개 들어서 멀리도 보고. 어느 날엔 빵 하나와 버터를 얻는 것을 목표로 삼고, 어떤 날은 책 속의 진리를 궁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어떤 날은 좋은 노래 하나 듣는 것을 목표로 삼고, 어떤 날은 처음 보는 이와 점심을 먹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러다가 1년을 살고, 또 1년을 살고.

아빠는 이렇게 편지 쓰는 것을 재미 삼아 보련다.

잘 지내렴.

암스테르담대학교.jpg

암스테르담대학교 경영대학

작가의 이전글아침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