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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낭만을 베어 물면

<여름이 긴 것은 수박을 많이 먹으라는 뜻이다>

by 두부먹는호랑이

“올해 첫 수박 먹었니? 첫 딸기는? 올해의 겨울 복숭아는?”(192쪽, 과일 인사)


“애초에 과일 인사에는 친밀과 사랑, 그리고 염려가 있다. 과일 잘 먹고 있니. 식사 외에 과일을 챙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니. 계절이 주는 선물을 제철에 누릴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여유가. 계절을 느끼고 있니. 느낄 수 있니.”(191쪽, 과일 인사)


과일 인사를 받아본 적이 있나요? 그 속에 담긴 마음에 동해 이 책을 손에 들었어요. 이 얇은 에세이를 손에 쥐었을 때, ‘후루룩 읽기 좋지 않을까.’ 사흘 안에 읽자 생각했지만 거의 보름이 넘도록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무겁거나 어려워서는 절대 아니고요. 오히려 꽤 신선한 마음으로 일상을, 나의 시선을 곱씹어보는 보름이었습니다.


이 책은 에세이보다 산문집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수필이면서 산문시랄까. 글이면서 그림 같은 지점이 있었습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대상에 대해 새롭게 다시 생각해보거나, 음미하고 싶은 문장이나 표현들이 들어 있었어요. 그리고 유머 코드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미소 짓게 됩니다. 읽어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실 거예요.


무엇보다, 마지막 챕터를 읽고 책장을 덮으며 “여름 낭만이로구나.” 하고 저도 모르게 내뱉었습니다. 수박을 한 입 가득 베어 문 듯 싱그러운 여운이 남았어요. 무겁지도 간지럽지도 않게. 풍성하고 시원한 맛이요. 저는 이 책을 ‘여름 낭만’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작고 귀엽고 둥글어 연약할 것 같지만, 내면엔 태양의 생명력을 가득 채우고 싱그러운 향을 풍기는 과일을, 저도 오랑우탄이 되어 아주 양껏 먹은 느낌이었거든요.


한여름입니다. 태양은 뜨겁다 못해 살갗을 찌르는 듯 파고 들고 매미의 울음 소리는 그치질 않습니다. 이 책은 그런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수박을 한가득 썰어 놓고(혹은 복숭아를) 한 입씩 베어 물며 읽기 좋은 딱 좋은 책이에요. 저는 실제로 그렇게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과일을 먹지 않는 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몰라요.


그나저나, “올해 첫 수박 드셨나요?”

계절이 주는 선물을 제철에 누릴 수 있는 여유가 항상 함께하기를.



당신도 뚜렷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나요?


“수중에 남은 2만 원을 움켜쥐고 나는 마트로 갔다. 그리고 사과 한 봉지와 커다란 양배추 한 통을 샀다. ···(중략)··· 나는 마지막 남은 돈으로 사과를 사는 사람이구나.”(14쪽, 탄생, 오랑우탄)


“혼자 사는 사람에게 수박 한 통은 사치스럽지. 왜냐하면, 수박은 너무 크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그 사치가 좋았으니까. 그 수박은 내 거야.”(25쪽, 여름의 홀케이크)


내가 어떤 대상을 보통 사람보다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공공연하게 자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생활비가 2만 원밖에 남았을 때에도 과일 한 봉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 나 혼자만을 위해 크고 무거운 수박 한 통을 겨우 들고 와 기꺼이 채워두는 정성처럼 나의 소중한 자원을 쏟는 데에서 그것은 드러나는 듯합니다. 저도 최근 비슷한 경험으로 그런 발견을 했는데, 바로 ‘오이’입니다. 평소 제가 오이를 좋아한다는 의식이 없었기에(오이를 굵은 소금으로 씻는 것부터 귀찮아 하는 타입) 저에게 이 깨달음은 꽤 즐거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손수 음식을 해서 자신을 먹여야 하는 경험으로, 오이를 스무 개나 사서 오이지와 오이소박이를 무려 세 번이나 담가 먹은 것이죠. 올해 여름에만 말입니다. 이렇게 어느새 오친자가 되어버린 나를 발견한 저처럼 작가 쩡찌는 ‘오랑우탄’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 과일을 주식처럼 먹는 사람입니다.


이 산문에는 이런 식으로 쩡찌 작가의 시선을 빌려 저의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쌀과 참기름, 과일의 카르텔이라. 그렇다면 나에겐 꿀과 반건조 생선의 카르텔이 있지.’ 하고 떠올려 본다거나. 명태가 생태, 동태, 코다리, 북어, 황태, 노가리처럼 가공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감’을 땅 위의 명태로 여기는 점에서. 내게 명태는 무엇인가 곰곰 떠올려 보는 거죠. 수박을 자르는 형태에 따라 만화 수박, 손님 수박, 파는 수박, 우리집 수박 등으로 분류하면, 거기에 제 추억을 덧붙여 다른 수박으로 이름 붙여 보기도 하고요. 귤을 까 먹으면 나는 소리가 눈 길을 밟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도, 일상의 것을 새롭게 감각해보는 경험을 주는 듯했어요. 이번 겨울엔 저도 ‘귤 꼭지에 엄지를 세워 넣고 천천히 밀’며 소리를 꼭 들어봐야겠다 다짐해 봅니다. 이렇게 그냥 넘어갈 법한 사소한 부분도 애정이 있어야 관찰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소중하게 감춰 놓은 속을 내보일 때면 이 작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상의 많은 것들을 다정스럽게 대하는구나 생각했어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어쩔 수 없이 지나칠 수 없었던 보물 상자를 가져오듯 수박이 담긴 통을 양팔 가득 안고 나타난 친구의 모습을 보고 나는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여름의 보물이구나.”(97쪽, 수박 특집)


“누구보다 사랑이 많은 내가, 사랑을 할 수 없다니. 실망스럽지는 않았는데··· 놀랐다.”(115쪽, 아낌없이 주는 과일 가게)


“방금까지와는 다르지 않은 거리인데 알록달록한 과일의 빛깔처럼 채돡 조금 높아진 느낌이었다. 한순간 이 동네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중략)··· 단지 과일 가게 하나 때문이었다.”(122쪽, 아낌없이 주는 과일 가게)


“누군가를 위한다는 일이, 다 그런 것 같다. 최선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잘 모르면서도, 최대한 차선에 다가가보는 것. 그런 일.”(183쪽, 백화점 청과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이야기)


“너는 수박을 먹을 때면 수박만큼 시원스레 입을 벌리고, 딸기를 먹을 때면 딸기처럼 약간만 뾰족하게 얼굴을 모은다. 그런 표정을 보는 게 왜 재미있는지. 나도 잘 설명하지 못하겠다.”(189쪽, 과일 인사)


돌아보면, 평범한듯 특별한 구석이 있어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몇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데 한 친구가 자꾸 떠올랐어요. 평소 조용하지만 건네는 말에는 다정이 스며 있고, 바라보는 눈빛에 넉넉한 온기가 머물던, 또래보다 조금 성숙하고 세상에 넉넉한 아이요. 이사한 새 동네에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 작가. 하지만 이내 ‘아낌없이 주는 과일 가게’를 발견한 것뿐인데 기다렸다는 듯 ‘지금 사는 곳에의 아낌’을 퍼부어 버리고 맙니다. 언제든 나와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수박을 먹는 친구의 얼굴을 그토록 자세히(심지어 귀엽게) 묘사할 수 있는 건 그 친구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다를 거 없는 일상에서 나를 둘러싼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낭만 아닐까요. 그 친구도 지금도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며 낭만 있는 삶을 살고 있어요. 그 친구 남긴 정서는 제 마음 한 켠에 선명하게 자리잡아 저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 책 또한 그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훔치고 싶은 여름의 문장들


“밤 골목의 소리가 풍성하게 무르익고, 서먹한 냄새를 무심결에 좇지. 어둠에 젖어 검은 잎사귀들. 윤곽은 무성해 바로 옆까지 다가온 것 같아. 어두컴컴한 아스팔트. 낮의 뜨거움이 끈질긴 권유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수박이 맛있어진다.”(26쪽, 여름의 홀케이크)


“언제나처럼 갑자기 울음은 다시 시작하고 그것은 울창한 숲과 닮았다. 매미 소리에 맞추어 녹음이 술렁술렁 부푼다. ···(중략)···매미 소리처럼 터져 나오는, 울창한 숲 같은 웃음, 술렁술렁 부푸는 여름의 웃음이다.” (90쪽, 수박 특집)


“아이스크림에서는 설탕의 맛이 나고 그런 끈적끈적 목구멍에 들러붙는 설탕의 애교도 오로지 단맛을 위하는 순애보도 별로다.”(103쪽, 메로나와 멜론의 상관관계)


“메로나는 처음 느끼는, 그런데 여러 번 겪어본 것 같은 인공적인 향이 났다. 몹시 달고 부드럽고 맛을 보려는 마음보다 빠르게 녹았다··(중략)···그 간극을 세밀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더위에 흐물흐물 무너지는 형광 연두의 네모난 바를 급히 혀로 핥아 세우며” (104쪽, 메로나와 멜론의 상관관계)


“만지면 만져지는 동그라미.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만져지는 생명이 많다.” (155쪽, 한 알 먹는다고 했다가 두 알 먹는다고 해버렸다)


“입안에서 말을 고르고 골랐는데요. 말은 고르고 고를수록 우글우글해지고 구르고 굴러서 못 쓰게 되어버렸어요.”(168쪽, 과일의 위로)


무덥고 끈적한 열대야를 낮의 끈질긴 권유로, 설탕의 들쩍지근한 단 맛을 애교와 순애보로 표현하다니. 이토록 신선하고 적합한 설명이 있다니요. 한낮에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의 속성을, 그리고 그 바를 급히 혀로 핥아 세운다니 ㅋㅋㅋ. 게다가 저 또한 복숭아의 복실한 솜털을, 금방 씻어 건져 올린 탱탱한 과일이 반사해 내는 물방울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것이 ‘만져지는 생명’이었군요. 맞아요. 그럴 때 저는 생명력을 느낍니다. 귤을 굴리며 말을 굴려보는 것. 그 절묘함에 작가가 쏟은 정성과 애정을 느껴요. 그리하여 여러 문장들을 품어 아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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