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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생명력을 간직하기

이명애 그림책 <휴가>, 모래알, 2021

by 두부먹는호랑이

마음이 서늘하면 몸도 차가워진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저명하고 신뢰성 높은 연구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몇 년 전의 제가 그랬습니다. 그해 여름, 매년 그렇듯이 폭염은 찾아왔고. 매일같이 차가운 에어컨 바람 밑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지내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이면 제 온몸에서 푸쉬쉬 하고 냉기가 빠져나오는 것 같았어요. 그 잠시의 온기만으로는 차갑게 얼어붙은 무언가가 다 녹아나지 않아서 밤이면 미처 녹지 않은 왼발을 비비며 잠에 들곤 했습니다.


그런 여름을 지내고 시월 중순쯤, 가족 친척들과 홍콩에서 모이기로 되어 그제서야 미뤄두었던 여름 휴가를 떠났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쭉 추웠기 때문에 경량 패딩을 입고 떠났어요. 홍콩 공항에 도착해 겨우 꿈척, 패딩을 벗어 팔에 걸쳤습니다. 이 그림책 <휴가>의 주인공도 그래요. 마치 그때의 저처럼 일하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고, 하늘을 향해 무거운 한숨을 내 쉬죠.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그 여행 동안 저는 주로 해변가에 있었습니다. 사촌오빠의 집이 해변을 낀 아파트여서 가능한 일이었죠. 아침에 눈을 뜨면 수건 한 장과 맥주 한 캔, 폰과 책을 챙겨 들고 모자도 파라솔도 없이 뜨거운 모래속에 몸을 쑤셔 넣고 햇빛을 받아들였어요. 매일매일 작열하는 태양 아래 속절없이 푸쉬쉬 푸쉬쉬 새어 나오는 냉기. 사흘쯤 되니 내보내는 냉기보다 안으로 스미는 온기를 더 느낄 수 있었어요. 조금씩 건강하게 태워지는 나의 살갗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채워지고 있었나 봅니다. 비로소 저는 햇빛에 몸을 덥히고, 바다에 몸을 담그고 푸하 자맥질을 하며 누구보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저로 돌아와 있었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패딩을 입지 않았고. 떠나기 전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한국의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 시간이 채워 준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듯했어요. 이 책 <휴가>를 읽었을 때, 마치 그 해의 제 모습을 담아놓은 거 같아 눈으로 쫓고 또 쫓았습니다. 마치 내 얘기 같았단 것은 나 아닌 누군가도 이런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겠죠?


익사이팅한 활동들로 화려하게 채운 휴가는 아니었지만, 뜨거운 열기 속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나와 온전히 지내는 휴식이 제게 마침 필요했고, 의미 있었다고 느껴요. 혹시 일을 하다 말고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시나요? 어딘가 지치고 서늘한 기분이 드시나요? 어딘가 모르게 헛헛하신가요? 이 책의 주인공처럼 그냥 한번 떠나보세요. 탁 트인 바다를, 뜨거운 태양을 그저 받아들여 보시기 바라요. 이 무더운 여름의 쓸모란 그런 것일 지도요. 서늘한 몸과 마음에 뜨거운 생명의 열기를 충전해 놓을 수 있는 한때 같은 거요.


아 참, 이 책은 표지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커버를 감상한 뒤 벗겨 내고 앞표지부터 읽어보시길! 제가 가진 것은 리커버판이고, 곧 다시 초판본 디자인으로 나온다고 하니 그 책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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