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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Jan 01. 2019

스물, 잔치는 끝났다

21.1세의 참회록

나의 스무 살은 가히 문학적으로 흘러갔다. 문학적이라고 해서 황순원의 『소나기』처럼 애틋한 연애를 경험했다던가,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처럼 남미의 어느 섬에 눌러앉아 파란만장한  여름날을 보낸 것은 아니다. 박준의 시처럼 낭만적이지도 않고 마광수의 소설처럼 관능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말 그대로 문학의 해였다. 가볍게 책을 구입하고, 여러 작가의 문장에 경탄하며, 쌓인 눈을 밟는 심정으로 순백의 노트를 메꿨다.


묵묵함의 연속성이 이런 일 년을 만들었다. 올해 나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고 두 번의 전시를 진행했다. 한 번의 캠페인에 참여했으며 학교 선배가 만든 웹진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더불어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작가로 덜컥 선정돼, 그동안 처치곤란이던 산문을 하나둘 게시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언젠가 문필업에 종사하고자 꿈꾸니 이것도 실리적인 경험이었다. 나름 두 편의 단편영화도 연출했으니, 본업인 영화학도로서의 역할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그렇죠?).


나열된 한 해의 기록들을 털어놓으면 많은 이들이 놀라지만, 실은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나를 비롯해 타자를 탐구하고, 그 내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일. 타자도 그것을 수용하고 젊은 생애를 느낄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 말이 복잡한가요? 무얼 상상하신지 모르겠지만, 바로 연애다. 연애!


사랑을 소재로 한 서적과 드라마가 범람하고, 연말의 시내에는 사랑의 가사가 냉기 저변에 울려 퍼진다. 이곳저곳에선 계절을 핑계로 맞붙은 연인들이 “오빠 너무 추워.”말하고,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들어봤나 인간 손난로라고? 호호.”하곤 대답한다. 도시 한가운데서 깨가 수백 킬로그램은 떨어지는 이 시국에 스테들러 연필이나 꼭 쥐며, ‘음, 오늘은 스무 살에 대해서 적어 볼까나.’하고 있으니 실로 절망스러운 풍경이다(카페에 거울이 없는 게 다행이다). 게다가 나는 눈빛만 맞아도 사랑에 빠지는 스무 살 아닌가, 스무 살!


청소년기에 생각했던 스무 살이란 본디 비포장도로와 같았다. 김연수 작가의 표현을 빌려, 스무 살 이후로 나아가는 데에는 앳된 덜컹거림이 많으리라 예상했다. 어쩌면 기대였을 지도 모른다. 사랑이든 꿈이든 청춘과 어울리는 단어들과 말이다. 그런데 웬걸. 12월의 끝자락에서 뒤돌아본 스무 살은 열기가 남아있는 아스팔트 도로처럼 매끈했다. 1월 1일의 시작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 자전거는(면허가 없으니 자전거라고 비유하겠다) 몹시 안정적이게, 마치 미끄러지듯 한 해를 건넜다. 기껏해야 과속방지턱 정도 있었을 것이다. 삶의 한 번뿐인 스무 살이 가벼운 연애조차 한 번 없이 슬프게 흘러갔다.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되겠다. 어찌 가벼운 연애조차 없는 해가 올해뿐이겠는가? 올해를 슬픈 해로 치부하면 앞으로 많은 년도가 슬픈 해가 될 것이다. 이내 그들이 차곡차곡 모이면 슬픈 인생이 돼버리고 만다. 그것이야 말로 정말 슬픈 일이다.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능수능란한 연애 솜씨를 가졌다. 루이스 캐럴 같은 성(性)적 취향을 갖지 않는 이상 대부분 말이다. 이렇든 저렇든, 나는 위대한 필자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이처럼 글을 쓰거나 세계문학전집을 정독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적당한 비유나 묘사 같은 게 있으면 좋겠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뭐가 됐든 대부분의 작가들이 나보다 근사한 스무 살을 보내지 않았을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불투명한 확신 같은 게 몰려온다.


살면서 가장 곤란한 순간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눈치챘겠지만― 연애고 다른 한 가지는 고민상담이다. 둘 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앞서 농담조로 위대한 필자가 되기는 힘들 것이라 얘기했는데, 이렇게 적고 보니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작가와 감독 또한 대중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던지는 사람들이니까. 무엇이 됐든, 어떤 솔루션이 필요하다.


그래서, 올해에는 조금 더 보통의 것들을 즐기려 한다. 전시회를 한다거나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이십 대에만 통용되는 일들을 말이다. 가령,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긴다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주저하지 않으리라. 주변에서 마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해보리라. 친구와 세상이 무너질 듯 사소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내일을 걱정하느라 소주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무 살에만 이렇게 일 년을 보낸 게 아니었다.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이와 비슷하게 다짐의 세월을 건넜다. “그럼 그때는 이런 생각을 안 해보았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물론 아니다.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다짐들만 타이핑해도 성경책 분량의 책이야 금세 적어낼 것이다.


생각과 말은 연소되기 쉽다. 성질이 그렇다. 성경책 분량의 다짐들도 쉽사리 사라지고 만다. 유치원 시절 즐겁게 갖고 놀던 그 장난감들처럼, 정신을 추슬렀더니 감쪽같이 없어져버렸다. 이렇게 글을 적는 것은 일종의 포부다. 위 다짐들의 10분에 1이라도 지켜졌으면 하는 포부. 한 해가 또 저물었으니 말이다.


어찌 됐든 

스물, 잔치는 끝났다.


몹시 쓸쓸해 보이는 문장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읽었을, 혹은 읽어야 할 문장이기도 하다. 이럴 땐 그저 피크닉에 왔다고 생각하자. 생애의 가장 화려한 피크닉. 신나게 놀다가 손에서 공을 놓친다.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공을 주우려고 냅다 뛰었더니, 어느새 돗자리가 보이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 그게 바로 지금 내가 바라본 스무 살이다. 그러니 잔치야 끝나든 말든 더 이상 상관없다. 그저 그렇게 되어버린 거니까. 하기야 나는 원래 시끌벅적한 잔치보다 가볍게 책을 읽고, 문장에 경탄하며, 흰 종이를 메꾸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것도 그런대로 즐거운 삶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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