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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Feb 02. 2019

바람 생각

겨울 녘에 하는 짧은 넋두리

좋아하는 단어가 있으신지?

나는 ‘바람’이라는 단어에는 괜스레 마음이 간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릴 적부터 그랬는데, 처음에는 감명 깊게 보게 보았던 만화영화나 동화의 영향인가 싶었다. 한데, 뉴런 구석구석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그 어느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할 따름이다.


가령,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혹은 트루먼 커포티의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 등장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 같은 문장도 이루 말할 때 없이 근사한 명구다. ‘과연, 글을 쓰겠다면 이런 문장을 써야 하는군.’하는 동경심마저 든다. 어디에도 계절에 관한 얘기는 없지만, 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한껏 느껴지는 문장이다.


추측컨대, 봄이나 가을에 쓰지 않았을까. 여름도 괜찮겠다(얼마나 반가운 바람인가). 하지만 겨울이라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히터가 약한 곳에선 연필만 쥐어도 손가락 마디마디가 시려올 것이 분명하고, 강한 곳에선 얼었던 근육이 이완돼, 바람이고 뭐고 귤에 더 관심이 갈 테니까. 또한 창밖에 나무들은 갈라진 살갗을 추레하게 내놓고 있어, 애일 듯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기엔 힘들 것만 같다.


그래도 혹여나, 겨울에 썼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편집자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영하 14도의 거리에서 냉랭한 바람을 맞는 폴은 ‘바람이 분다…, (정말 죽을 것 같다…) 살아야겠다.’ 같은 시구를 떠올리고,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던 트루먼은 이 순간이 얼른 지나가기를 고대하며 혹독한 한파의 매서운 바람을 떠올리는 것이다. ‘(아… 듣기 싫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각하자. (매서운) 바람을 생각하자.’하는 광경……. 모르긴 몰라도, ‘바람’의 심미적인 어감과는 한참 동떨어지고 만다.


그나저나 실제로 ‘바람’하고 소리 내 발음하면 입 안에선 훅하고 짧은 바람이 인다. 봄날이라도 머금은 것 같다. 그곳엔 무성히 핀 초록의 풀냄새가 있다. 남루한 절대자가 솜사탕 찢듯 던져둔 무질서한 구름과, 까르르하고 웃는 찬연한 꽃잎들과, 지표면을 살갑게 간지럽히는 햇살 생각이 난다. 그런 날에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한가득 스민 흰색 와이셔츠나 얇은 스웨터를 걸치고 싶다. 바람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상태를 만들기 위함이다―적어도 나에게는 만큼은.


완벽한 바람을 즐길 수 있는 곳이 하나 있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집 근처의 한 카페다. 풍경이 아름다운 봄이나 가을이면, 테라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갓 내린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며 경쾌한 에세이를 읽거나 잡답을 떨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테라스 너머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질서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 계절의 변화를 훤히 지켜볼 수 있었다.


해가 저무는 평일 저녁에는 인공적이지 않은 바람이 계절의 냄새와 함께 불어왔다. 그러면 나는 마치 이방의 도시라도 온 듯한 기분에 들뜨곤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살짝 식은 커피와 간질거리는 바람에 책이 몇 장 넘어갔다 되돌아온다. 여전히 ‘바람’이란 단어가 좋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는 흥겨운 바람이 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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