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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Feb 19. 2019

터키일기_첫 번째 날

인천공항에서 베이징까지

  해당 글은 2020년 12월에 발매된 『엎어진 영화, 엎질러진 터키』의 일부 에피소드입니다. 전문은 제목에 연결된 링크를 통해 구입하여 읽으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상이 빗나갈 대로 빗나간 첫 번째 날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했다.

  별다른 이상 없이 포켓 와이파이를 수령하고, 대기 시간 없이 표를 발권해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연휴 직전의 욕조 안처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물론, 아무 일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고심 끝에 산 샤워 키트와 안대를 놓고 오는가 하면, 밀리리터를 착각한 Y는 (오직 여행만을 위해) 새로 산 클렌징 폼과 치약, 그리고 로션을 그대로 압수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출국 10분 전에 두고 온 여권의 행방을 깨닫거나, 로밍이 되지 않는 먼 타지에서 한 명이 사라지는 일에 비하면 이건 50평 아파트에 저질러 놓은 벼룩의 볼일 수준이다.


  면세점에 들어선 우리는 식당부터 모색했다. 장장 12박 14일간에 대륙 대장정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고국의 노스탤지어와 시차로 인해 느껴지는 고독, 이방인이 되어버렸다는 일종의 상실감을 우리는 대비를 해야 했고, 한국의 정취를 한가득 머금고자 도착한 곳은 ‘일본식’ 돈가스집이었다. ‘일본식’ 돈가스로 한국에서의 마지막 정취를 맛본 우리는 ‘서구식’ 커피를 마시며 한국에서의 마지막 여유를 즐겼다. 이내 면세점 이곳저곳을 돌며 목베개를 찾던 나는 '시간도 여유로운데.' 하며 눈에 띄는 안경원에 들어갔다. 뿔테와 무테, 하금테 할 것 없이 수많은 안경이 있었고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 법한 회사의 제품이 벽면 가득히 즐비했다.


  최근 뿔테 안경에 관심을 갖던 나는 G사에 안경을 무심코 걸쳐보았다. 순간, 마치 유기동물 분양소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경은 까만 닥스훈트라도 된 것처럼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당장 통장 잔액은 걱정이었지만 그 눈빛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는 체크카드를 건네었고, XD2FR***(시리얼 넘버)을 직원으로부터 분양받았다. 출국 1시간 전에 일이었다. 구매한 녀석으로 안경을 바꿔 착용한 채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아, 맞다.


  목베개는······.


  당연히 떨어져 앉으리라 생각했는데, 운이 좋게 연석으로 배정받았다. 이것만으로도 '많이' 만족스러웠지만, 대기에 진입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붉은 앞치마를 두른 승무원이 하얀색 상자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기내식으로 제공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였다. 한 시간짜리 비행이라고 너무 기대를 하지 않을 걸까. 이것만으로도 ‘아주 많이’ 만족했지만, 음료를 실은 카트까지 뒤를 이었다. 아쉽지만, 카트 어디에도 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불쑥 Y는 특유의 뻔뻔함으로 와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와인은 없지만 맥주가 있다는 승무원의 말에 우리는 각자 ‘칭다오’를 두 캔씩 들이켰다. 첫출발의 피로가 호박 빛깔로 점차 희석되어갔다. 거참, 마트료시카 같은 항공사이다.


  뭐, 우리는 ‘매우 아주 많이’ 만족할 따름이지만.


  언제나처럼 맥주와 실없는 소리는 시너지를 일으키며 시간의 저편으로 우리를 옮겨주었다. 검기만 했던 창밖으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유리 너머로는 도심의 야경이 오렌지색 조명을 별처럼 새긴 채,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이었다.


  남은 날은 13일, 2019년 2월 17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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