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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Nov 29. 2020

낙엽의 효용성에 관해

11월이 갖는 관대함

계절을 받아들이는 의식이 있다. 봄에는 성냥을 사고, 여름에는 눈썹 위로 머리를 깎는 일. 가을에는 버스를 보내고 음악과 함께 거니는 산책, 겨울에는 마구잡이로 홍차를 마시는 일이 그것이다. 되지도 않는 청승이냐며, 나무랄 수도 있지만 정말이다. 신기하리만치 봄이 다가오면 빼곡했던 성냥은 바닥을 보이고, 겨울이 되면 나의 식도는 거칠게 알싸함을 갈구한다. 그러면 나는 ‘으음, 벌써 계절이 바뀌는군.’ 하고 홀로 독백하고 만다. 오늘은 발길이 닫는 데까지 어디든 걸어갔다. 플레이리스트 목록이 최신 가요에서 변진섭으로 넘어가는 지점이었고, 나는 가을임을 직감했다.


  처음 맞는 계절이 아님에도, 가을은 매해 비슷한 감정으로 건너왔다. 이맘때가 되면 마음 밑바닥에 건조한 모래가 오 센티쯤 쌓인 것 같다. 상념과 추억은 더욱 깊어지고, 가방에는 시집이 두어 권쯤 들어있다. 그렇기에 이성보다는 감성에 가까운 문장을 쓰는 계절이다. 호르몬의 변화다 뭐다 하지만, 정확한 근원을 알 수가 없는데 “경제 대공황의 원인은 말이죠…” 하고 말하듯, 누군가 나타나 분명한 문장으로 설명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근원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을과 관련된 얘기라면 몇 마디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년 전 이맘때(그러니까 16년 가을), 나는 시를 쓰며 나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는 글쓰기와 절연(切緣)에 가까운 상태로 지내왔다. 글이란 학교에서 독서 감상문을 쓰는 것이 전부였고, 자발적 글쓰기는 영상을 찍기 위한 시나리오 몇 줄에 그쳤다. 물론, 이것은 글쓰기 자체에 국한되었을 뿐, 글 자체를 멀리했다는 말은 아니다.


  책을 가까이 두고 읽는 습관은 예로부터 있었기에, 좋은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항상 작가라는 사람에게 막연한 동경심을 품곤 했다. 특히 내 마음을 대변하는 시를 읽고 나면, 이런 마음은 절정에 치달았다. 절대자가 나타나 ‘좋은 시를 쓰는 능력과 10억 중 단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전자를 선택하겠노라.’라는 굳은 신념으로 청소년기를 건너왔다. 지금이야 이런 질문을 묻노라면, 일말의 고민 없이 후자를 선택하겠지만(우리는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 이 질문을 가을에 한다면 오 분쯤 더 고민해볼지도 모르겠다.


  절대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출판계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점차 물오르는 물욕이 괘씸했었나 보다. 그나마도 없던 시 쓰기 능력을 가차 없이 빼앗아가셨다(10억은 주고 가져가시라고요!). 메말라버린 시상(詩想)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시답잖은 유머를 툴툴대는 에세이를 한가득 적고 있는 작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계절을 핑계로 상념과 추억에 깊게 들어가 보면, 한때 엄청난 열정으로 시를 적었던 당시가 떠오른다. 어쩌면 쏟아냈다가 더 부합한 동사일지도 모른다. 가을이니까. 당시 남겼던 수많은 시의 문학적 가치를 매기자면, 형편없겠지만 추억이 투박한 단어 구석구석에 담겨있기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있다.


  오늘 교외를 지나며 바라본 작은 논밭은 노란 이불을 덮고 있었다. 그 옆에 나무는 형형색색의 나뭇잎을 피워 초록의 흔적을 차츰 감추었고,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채도를 잃어 낙엽이 될 것이다. 해서 이맘쯤이 되면 트렌치코트를 입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가을은 모두에게 공평한 계절이다. 지구조차 가을이 되면 낙엽을 떨어뜨려, 다크 브라운 컬러의 트렌치코트를 입지 않는가.


  가을만이 이런 것은 아니다. 모든 계절은 덮여있는 계절이다. 한 세월을 덮어야만 다음 세월을 맞이할 수 있다. 연분홍빛 벚꽃 잎들은 봄을. 세상을 한층 짙게 하는 장마는 여름을. 안쓰러운 낙엽과 하얀 눈은 가을과 겨울을 순차적으로 덮는다. 시를 쓰던 계절은, 에세이를 쓰는 계절로 덮고 있다. 내년에는 소설을 쓰는 계절로 덮어보고 싶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으로 덮으면 될 뿐이다. 가을이니까. 낙엽의 효용성은 이토록 관대하다.


  계절은 시간의 경과가 아닌 마음의 경과가 이루어질 때 찾아온다. 매 계절을 받아들이는 의식이 있는 것도 그것이다. 겨울에 먹는 홍차는 따듯한 음료를 찾는 끝에 들어섰기 때문이고, 봄에 사는 성냥은 다른 계절에도 꽃향기를 맡고 싶어서다. 덥수룩한 앞머리가 여름에는 거슬리기에, 눈썹 위로 바싹 이발을 한다. 외로움과 사색이 매서운 바람이나 뜨거운 열기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가을에는 버스보다는 걷기를 택하는 것이다. 누군가 “가을은 왜 그렇게 외롭고 감성적으로 변하는 걸까요?” 하고 묻는다면 넌지시 이렇게 대답할 것만 같다.


  “덮기 위함이랍니다.”


  가을은 소위 독서의 계절, 남자의 계절이라고 불린다. 이 말에 누군가는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고, 옆구리에는 시집을 두어 권씩 끼고 다녀야 할 것만 같은 책무를 느낄 것이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계절의 변화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이일 것이다. 성냥을 좋아하고, 변진섭의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 더불어 무척이나 가을을 타서 눅눅한 에세이를 쓰는 사람. 글쎄요. 이렇게 말해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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