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기버 Dec 07. 2020

엄마! 화장실에서 빨간 물이 나와요!

우리가 몰랐던 3층 어머님의 이야기

평온한 주말 아침, 약간은 쌀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거실에서 아이들과 TV를 보고 있었는데 이제 스스로 소변을 볼 수 있는 아들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잠시 뒤, 화장실로 향한 아들에게서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왜?"

"화장실에서 빨간 물이 나와요!"


뜬금없이 화장실에서 빨간색 물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잘 못 봤거니 생각했다.


"무슨 빨간 물? 괜찮아~ 쉬하고 와."

"엄마! 엄마! 진짜 빨간색이에요!"


아이의 부름에 귀찮았지만 하도 다급하게 부르기에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사건이 있기 전, 우리 집 화장실

그런데 "무슨 빨간색이라는 거야?"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내 눈을 의심하는 광경을 마주했다.


"어, 어....!"

"오빠!!!!!!!!!"


다급하게 방에 있던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귀찮은 듯 화장실로 왔지만 눈 앞에 있는 관경을 보고는 얼음이 되었다. 일단 나는 놀란 아들을 진정시키고 아이 소변기를 꺼내 소변을 뉘었다. 아이가 소변을 보는 그 짧은 시간 내 머리는 복잡했다.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화장실 변기에서 정체 모를 빨간 물이 넘쳐 나온다니! 그때, 화장실을 살펴보던 남편이 말했다.


"김치... 같은데?"


아니, 왜, 화장실에, 김치가?! 나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어디서 이 문제가 생겼는지 빨리 판단해야 했다. 남편은 일단 아랫집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러 갔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로 위층 할머니 댁으로 갔다. 할머니는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셨는데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할머니 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 이 집에서는 변기에 땅콩 반찬이 있었다. 땅콩 반찬이라니!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황.


화가 났다. '도대체, 누가, 음식물을 변기에 버린단 말인가?' 그것도 김치, 땅콩, 갖가지 반찬을 말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한 층씩 올라가다 보니 꼭대기, 3층 어머님께 다다랐다.


띵동. 띵동.


"누구세요?"

"1층이에요."


"무슨 일?"

"혹시 어머님 화장실은 괜찮으세요?"


"응?"

"저희 집에서 지금 변기가 막히고 음식물이 나오고 있어서요..."


"어머나!! 아이고 이를 어째!!"


어머님은 우리 집으로 내려오셨고 변기에 차 있는 김치를 빼내시려고 했다.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머니는 화장실을 나오시면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미안해요. 얼마 전에 남편을 보냈는데... 상 치른 음식이 너무 많아서 조금씩 버린 다는 게 그만..."


고개를 푹 숙이신 어머님의 어깨 위로 남편을 손을 얹고 말했다.


"아... 아닙니다 어머니, 저희가 그런 일이 있으셨는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조금 전까지 가졌던 화난 감정이 쑥 사라지고 어머님의 사정을 알지 못했던 사실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사부님을 여의시고 혼자 남으신 어머님. 빈 집에서 혼자 음식을 버리실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들이 훅 다가왔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어머님은 부리나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사님들을 부르셨고, 생각보다 심각하게 막힌 관을 뚫기 위해 공사는 하루 종일도 부족해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B층, 1층, 2층까지 너무도 단단히 막힌 관. 3층 어머님의 마음 같았다. 안 그래도 속상하신데 우리에게 미안함까지 가지신 어머님의 마음, 그리고 내 맘 같았다. 이런 상황을 안겨드린 것 같은 미안한 마음과 나도 언젠간 맞이하게 될 남편과의 이별을 생각하니 말이다. 하루 종일 먹먹했다.


그런데 참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도 눈치 없이 수시로 찾아오는 신호다. 때가 되면 화장실을 가야 하는 생리현상에 우리 가족은 동네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는 둘째를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주말 내내 이어진 대대적인 공사는 잘 마무리되었고 새로운 한 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어머니께 안부를 묻고 도와드릴 수 있는, 좀 더 가까운 이웃이 되었다.




잊을 수 없는 그때 그 주말. 막혔던 변기가 마치 어머님의 꽉 막힌 슬픔과 같았던 그 날, 막힌 관이 뚫리기 까지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함께 할 수 있었던 우리. 3층 어머님에 대해 알게 되었던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이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아픔까지 다 보듬을 수는 없지만
작은 관심이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 소금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