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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Aug 19. 2019

떠나기 어려워진 여행

[마음을 담은 편지] #3

취소할까? 막상 떠나려니 짐 챙기는 게 귀찮았습니다. 2박 3일 올레길 트레킹을 떠나려 했어요. 멍하게 걷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벌써 몇 개월째 이어졌지만, 아직 늦겨울 추위를 떨쳐낼 정도로 마음이 여물지 않았나 봅니다.


일찍 일어나 챙기자는 마음에 그냥 잤어요. 한 번 귀찮아지면 어떤 자극이 와도 움직이기 어려운 요즘입니다. 눈뜨니 예보대로 비가 왔죠. 이럴땐 틀리지도 않네요. 하필 가는 날 궂은 날씨가 또 찾아오다니. 작년에도 여행가는 날, 태풍이 와서 취소했거든요.


그때처럼 늦잠자고 카페가서 책이나 읽고 싶었습니다. 비나 구경하면서. 바람도 세찬게 제주도는 이미 강풍에 바짝 움츠렸다는 소식입니다. 온갖 변명이 생기더라요. '이렇게 비바람이 세찬건 가지 말라는 의미 아니냐?', '비행기 사고라도 나면?', '목도 아픈데 무리해봤자 감기만 걸리는 거 아닐까?'


핑계거리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죠.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다녀온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 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였습니다. 안되겠다 싶더군요. 이러다 또 못갈 거 같았습니다. 일단, 손에 잡히는 데로 대충 짐을 싸고 가방을 짊어매고 나섰습니다.


수서에서 김포공항까지 지도상 멀었지만, 9호선 급행 지하철을 탔더니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어요. 셀프 체크인을 하고 잠깐 기다리니 금방 탑승하더군요. 앞 사람은 탑승권 없이 모바일 QR코드로 타는 걸 보고 다음엔 저렇게 타야지 싶었습니다.


비바람이 꽤 세찼지만 비행기는 거침없이 이륙했어요. 제주에 다가갈수록 기체의 흔들림도 커졌습니다. 착륙 전 몇 번이나 급강하하는 바람에 머리가 주뼛 서고 가슴이 울렁거렸어요. 비행기에서 처음 손잡이를 움켜 잡게 되더군요. 토할 수 있을 거 같아 얼른 봉투도 찾아놨습니다.


'사고나는 거 아니야' 불안했어요. 악천후를 알리며, 안전벨트를 꼭 매고 아기는 안전하게 품에 안아 달라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은 다급했습니다. 시끄럽던 비행기는 순식간에 고요해졌어요. 긴장한 침묵이 흐르며 떨어지듯 강하할 땐 여기저기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번의 롤러코스터 경험을 하고 이윽고 활주로에 바퀴가 거칠게 닿자 안도했어요. 기내 공기도 가벼워졌습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나 봐요. 그러나, 공항 밖으로 나와 세차게 내리는 비와 을씨년스러운 바람을 맞으니 또 움츠러 들었습니다.


여행 안내소에서 '올레길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고 가야 되요?' 물었더니 위험하다며 정색하고 말리더군요. '성산에 먼저 가려고요' 그제야 번호를 알려줍니다. 예전엔 터미널에서 갈아타야 했는데, 직행 버스가 생겼더군요.


버스를 타자 잠시 긴장이 풀렸어요. 곧 해안도로에 나뒹구는 나뭇잎과 가지들을 보고 비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짐작케했습니다. '걸을 수 있을까?' 싶더군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람이 싸다귀 갈기듯 몸 속을 파고 드네요.


이 바람에 걷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페에 들려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니, 이제야 말랑해져 여행온 게 실감났습니다. 별안간 실소가 났어요. 여행, 그것도 국내여행 오면서 이리도 긴장하며 온게 웃겼나봐요. '어쨌든 왔잖아~'.


숙소부터 잡았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세차 짐을 가벼이 하고 오름은 위험할테니 1번길을 반대로 걸었어요. 뻥 뚫린 해변길입니다. 바람에 날라가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을 거 같았죠. 그리고 길 중간에 해물 파스타가 기가 막힌 곳이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가려고 했어요.



성산일출봉에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곧 '긴급재난문자'가 뜨네요. '제주지역 풍랑경보'였습니다. 또 웃음이 터졌습니다. 대차게 걸렸구나 싶었어요. 해안가를 나가니 세찬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주변에 사람도 없어 미친 놈처럼 냅다 소리를 마구마구 질렀어요.


후련했습니다. 아침부터 갈팡질팡 헤맸던 마음이 날라갔어요. 우렁찬 파도소리, 미끄러지는 구름, 머리가 띵할 정도로 부딪히는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자 뭐랄까 억눌린 그 무엇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노래같은 소리를 지르고 뛰고 혼자 신났습니다.


파스타(그 사이 주인이 바껴 옛날 맛이 나지 않더군요)까지 먹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어요. 지랄하며 걸었더니 힘없어 버스타고 왔죠. 오는 길에 만난 돌풍은 몸마저 날려버릴 듯 했어요. 호텔로 들어왔더니 아늑했습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캔맥주 한 캔하는데, 별안간 어두워졌어요.


'뭐야 이건 또?' 하며 커튼을 열어 보니 성산 부근 모든 전기가 꺼진 듯 했습니다. 오늘 바람이 태풍에 맞먹다는 말이 맞나봐요. 바람때문에 동네 전체가 정전이라니. '우와~ 끝까지?' 한숨이 나왔지만, 곧 너무나 적요한 걸 느꼈습니다.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달빛과 파도 소리 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완벽하게 적막했어요. 이상하게 평온해졌습니다. '귀찮아 떠나지 않았으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머뭄이 익숙해진 요즘이었어요. 떠남을 동경하지만, 막상 귀찮습니다. 그리고 세찬 비바람이 겁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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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왕마담 드림

http://www.wangmad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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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018년 2월 말에 다녀온 여행이었습니다. 악천후로 인해 참 다이나믹했어요. 당시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최근 [마음을 담은 편지]는 블로그(http://www.wangmadam.net)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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