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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Aug 12. 2019

그 놈의 계약직, 미생

[마음을 담은 편지] #2

지난 주 대구 출장을 갔습니다. 고객사에서 나오니 밤이 되었죠. 협력 업체 직원과 늦은 저녁밥을 먹고 근처 모텔에 갔습니다. 숙박업소에 들어오면 TV 채널을 전부 돌려 뭘 하는지 확인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샤워 전 캔맥주를 마시며 특유의 리모컨 돌리기에 들어갔습니다.


바둑채널에서 이미 종영된 <미생>을 방송했어요. 전부터 입소문을 많이 들었고, 원작인 웹툰도 추천받았는데,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던 드라마였습니다. 13~14화 재방송을 하고 있더군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어요.


조금 봤는데 샤워하는 것도 잊고 TV 속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주인공인 계약직 신입사원 장그래가 정규직원들과 다른 대우를 받으며 우울해 하고 있었죠. 설날을 앞두고 각기 다른 선물 세트를 손에 쥐는 장면에선 감정마저 이입됐습니다.


처음 사회에 발을 디뎠을 때 감정들이 고스란히 살아났어요. 첫 직장은 인력 파견 회사로 취업하여 백화점 전산실 파견 근무를 했습니다. 약 1년 정도 근무 후 대기업으로 이직했죠. 그 회사의 사원증을 목에 걸 수 있다니 계약직이라는 게 거리낌 없을 정도로 기뻤습니다.


경력이 차츰 늘어가자, 정규직에 비해 처우가 떨어지는 게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특히, 명절 때 그들만 받던 갈비세트는 어찌나 부럽던지요. 당시 제 손엔 비누세트가 들렸습니다. 그런 날엔 직원들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일부러 늦게 퇴근했어요. 선물세트 마저 비교당할 거 같아서 창피했습니다.


밖에서도 이런 마음이 떠나질 않았어요. 누군가와 업무얘기를 해도 '계약직인데 내가 의견을 말해도 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대기업 다니는 걸 부러워하면 겉으론 웃지만 속으로 '계약직인데...' 싶었죠. 항상 누구를 만나건 어디에 있건 거짓말하는 기분이었어요. 


와중 욕심나던 건 '일' 자체였습니다. 정규직들이 도맡아 하는 네트워크 컨설팅이나 디자인 같이 근사한 업무를 하고 싶었어요. 맡은 일을 하고 사내에 남아 이런 저런 공부를 했습니다. 그 마음을 알았던지 중요한 제품 검증 일을 맡았어요. 특별한 계약직이라도 된 듯 신나게 일했습니다.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일하며 다닌 야간 대학을 졸업하고 다니던 회사의 신입과 경력사원 모집에 입사 서류를 냈습니다. 팀장님이 밀어주고 동료들의 응원에도 두 번이나 서류 전형에 떨어졌어요. 급기야 다른 계약직 동료가 정규직이 된 순간 질투심과 배신감이 몰아쳤습니다. 


4년제 대학에 가지 않은 걸 후회하며, 방통대를 편입하고 학점은행제를 준비했어요. 당시 정규직 되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얼마뒤 팀장님이 바뀌고 또한 팀이 변해가는 걸 봤어요. 정규직 전환에 대한 얘기도 이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힘들겠다고 여겼고, 결국 포기했어요. 여러번 스카웃 제의를 받았던 중소 기업으로 옮겼습니다. 참 커보였던 대기업, 거기에 속한 걸로 뿌듯했던 이름을 버렸어요. 그제서야 다른 곳에서 그토록 바랬던 정규직이 됐습니다. 


얼마 전까지 같은 회사를 나온 분들에게 저도 거기를 나왔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계약직이었다는 걸 말하지 않으면, 왠지 속이는 거 같았습니다. 웃기죠. 같은 곳에서 일했는데도 이런 벽이 무엇인지, 정규직과 계약직 그건 무서운 신분처럼 느껴졌습니다.


못내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식용유 선물 세트를 바라보던 장그래한테 오차장이 말했어요. '욕심 내지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계약직은 욕심도 마음대로 낼 수 없는 건가요? 그저 같이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대사에 맺힌 눈물이 떨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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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왕마담 드림

http://www.wangmadam.net


P.S : 이 편지는 2014년 12월 15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거슬리는 표현은 퇴고하면서 수정했으나, 당시의 내용은 그대로 유지했어요. 최근 [마음을 담은 편지]는 블로그(http://www.wangmadam.net)에 공유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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