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담은 편지] #8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일주일 정도 됐는데, 여전히 종일 걷는 건 힘들었습니다. 욕심껏 채운 배낭 덕분에 어깨가 짖눌리고, 무릎이 아팠죠. 그나마 순례길 표식을 찾아 걷는 건 익숙했습니다. 헌데, 그날은 메인이 아닌 샛길로 빠졌나봐요. 예정과 달리 Hermanillos 라는 작은 마을로 도착했습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어요. 여기서 묵을지, 약 1시간 정도 6Km를 더 걸어 목표했던 큰 마을로 갈지 고민됐습니다. 거기엔 레스토랑이 있어 제대로 밥을 먹고 맥주도 마실 수 있을 거 같았죠. 작은 마을은 대체로 순례자 숙소나 바에서 간단하게 먹어요. 겨울 비성수기엔 영업하지 않는 곳도 많아 굵기도 합니다.
힘들어 갈등됐지만, 짐을 챙겨 나왔어요. 아스팔트를 잠깐 걷고, 메세타 평원(부르고스에서 레온 대도시까지 약180Km의 고(평)원이 이어져 있습니다)으로 들어선 것이 약 5시였으니 곧 도착하리라 여겼습니다. 시원한 맥주 생각에 절로 신나더군요.
왠걸 오후 6시가 넘어가는데 마을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량한 평원이 끝나지 않았어요. 일몰이 시작하니, 덜컥 겁났어요. 긴장해서 몇 일째 괴롭히던 무릎과 발목도 아프지 않았어요. 되려 걸음이 점점 빨라졌습니다. 멀리 지평선을 타고가는 기차가 고팠어요. 간간이 보이는 순례길 표식을 아무리 따라 걸어도 이미 만나야 할 마을은 기척도 없습니다.
목적지를 잃었어요. 멘붕이지만 걸을 수 밖에 없었죠. 되돌아 가기엔 너무 많이 왔습니다. 해가 완전히 기우니 카미노 표시도 잘 보이지 않았어요. 누가 산티아고 가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했는지 얼굴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멀지만 저 앞에 불빛이 보였어요.
도착하니 고속도로를 밝히는 가로등이더군요. 어지러웠습니다. 시간은 밤 8시 30분. 서울은 초저녁이지만, 어느 곳보다 적막했어요. 잠깐 쉬니까 땀이 식어 추웠습니다. 배낭에서 파카를 꺼내 입고, 초코바와 남은 물 조금 마시니 정신이 들었습니다.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어요. 혹시나 남루한 순례자니까, 불쌍해서 세워주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두 세대 정도 저를 발견하자 더욱 급히 쌩까는 걸 보고 포기했습니다. 사고라도 나면 더 큰일이었죠. 카미노 표시는 다시 메세타 평원을 가리키고 있더군요.
고속도로 밑으로 가야 됐습니다. 밝은 곳을 떠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평원에 다시 들어서는 건 마음마저 깜깜했어요. 자신을 믿어야 된다고 되새겼지만, 얼마나 더 걸어야 될지 모를 불안감에 압도당했습니다.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 걸어야 했어요.
조그만 렌턴으로 노란 화살표나 조개문양을 절실하게 찾았습니다. 잊을만하면 나오나 절박한 순례자에겐 턱없이 부족했어요. 작은 갈림길도 멈춰서 어떤 길이 맞는지 뒤졌습니다. 다리를 건너니 너머에 건물 불빛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호텔이 아니겠습니까!
'살았구나' 싶은 마음에 다리가 풀렸습니다.
하지만 문이 닫혔어요. 벨을 누르고 두들겨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윗 층에선 신나는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죠. 영업은 하지 않은채 성탄전야 파티라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었어요. 힘도 없고 맥도 풀려 땅바닥에 앉아 노숙할까 고민하다가 '조금 더 가보자'는 심정으로 일어났습니다.
약 40분 정도 더 걸어 밤 10시가 훌쩍 넘어 도착한 도시는 Mulas 였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약 25km를 더 걸었어요. 황당한 건 알베르게는 닫혔고, 크리스마스 이브라 호스텔(모텔)도 하지 않더군요.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다 싶어 어느 창고에 슬쩍 들어갔다가 너무 어둡고 냄새나서 나왔습니다.
절망스럽더군요. 길 위에서 노숙하기 직전 불켜진 호스텔을 발견했습니다. 문은 닫혔지만 청소하는 아줌마가 있었어요. 창문을 두들겼습니다. 영업이 끝났다는 시늉을 보이더군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었습니다. 말이 안통했지만, 바디랭귀지 섞어 사정사정 빌었어요.
묵게 해주면 팁도 준다고 했습니다. 불쌍해 보였던지 팁 욕심이 났는지 주인과 통화를 시켜줬어요. 안되는 스패니쉬와 영어를 섞어 '나 순례자야, 잠만 잘게. 달라는 대로 돈 줄게'만 반복했습니다. 못알아 듣겠던지 주인이 달려왔어요. 난방없고 식사안되는 조건에 40유로, 딜했습니다.
사실 비싸야 30유로라 바가지였지만 그마저 어찌나 고맙던지요. 아줌마에겐 5유로를 팁으로 줬어요. 생수 하나 얻어 방으로 올라왔습니다. 미지근한 물이 나오다가 점점 찬물로 변해 얼른 샤워하고, 추워서 침대 위에 침낭을 펼쳤어요. 점심 한 끼 먹고 쫄쫄 굶었는데, 배고프지도 않았습니다.
그만 걷고 잘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어요. 무슨 일이 있던건지 꿈처럼 몽롱했습니다. 넋이 나갔죠. TV를 켰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크리스마스 축제가 한창이더군요. 딴 세상 얘기였지만, 뭔가 연결된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제서야 '살았구나' 싶었어요.
따져보니 아침 9시부터 11시너머 약 60Km 걸었더군요.
좀 빡세게 걸어 이틀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황량한 평원에서 길잃고 밤을 맞이했던 심정... 끝을 알 수 없던 길, 뭐라 설명하기 어렵네요. 아름답던 일몰은 그저 일몰이었고, 하늘에서 뚝 떨어질 거 같던 별은 그냥 별이었습니다. 단지, '혼자'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어요. 평생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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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왕마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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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순례길에 도착해 일주일 만에 크리스마스 이브와 함께 맞이한 위기였습니다. 정말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싶을 정도로 무서웠어요. 그 황량한 평원에선 사람 한 명 만날 수 없었습니다.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있던 초코바와 생수 하나로 버틸 수 밖에 없었죠. 이 먼 곳에 와서 노숙하게 생겼으니, 이게 무슨 개지랄인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이 남은 여정을 완전히 바꿔버렸죠. 다음 편지는 산티아고 가는 길의 마지막 편으로 그게 뭐였는지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