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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Oct 07. 2019

산티아고 가는 길, 그 끝의 아쉬움

[마음을 담은 편지] #9

아침 9시가 넘어 호스텔을 나왔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났지만, 어제의 가슴떨리던 기억에 쫄았죠. 골목을 지나 대로에 나오니 햇살이 따뜻했어요. 속에 입었던 파카를 벗었습니다. 그 빛은 어제도 비췄을텐데 오늘은 달랐어요. 추위 뿐 아니라 얼어붙은 마음도 녹았습니다.


무리하지 않았어요. 계획한 마을이 아니더라도 오후 4시가 넘으면 도착한 곳에서 짐을 풀었습니다. 샤워하고 빨래하고 동네 산책을 했어요. 카페나 바에서 식사와 와인 그리고 맥주를 즐겼습니다. 그제야 서울에서 챙겼던 얇은 시집도 펼칠 수 있었죠.


시큰했던 무릎 통증도 견딜 만했습니다. 무거워 짓누르던 배낭도 짊어질 만했어요. 아름답고 이국적인 풍광을 만나면 감탄하고, 지루할 땐 노래를 불렀어요. 듣고 질색할 사람도 없었죠. 신나면 몸짓에 가까운 춤도 추고 무작정 소리를 질러보고, 그냥 깔깔깔 웃어도 보고 또 눈물짓기도 했습니다.


푯대만 보고 걷는 습관을 버리자, 길 위에서 행복했습니다.



메세타 평원을 지나며 차츰 다른 순례자들을 만났어요. 유쾌한 스페인 친구들, 반가운 우리나라 사람들, 지인이 살고 있어 정이 갔던 브라질 친구(브라질 여행 때 꼭 연락해서 만나기로 했어요), 수다스럽고 정신없던 영국인 친구(결국 핸드폰을 잃어버렸답니다) 등, 같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 친해졌어요.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 만나 함께 왁자지껄 밥먹고 술마셨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아 바디랭귀지로 얘기해야 했지만,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어요. 처음 만나는 부담과 반가움이 공존했습니다. 헤어질 땐 혼자라는 자유로움과 외로움을 맛보았어요.


새벽에 걸으며 맞이한 일출, 폭우를 뚫고 도착한 바의 따뜻한 커피, 홀로 고즈넉하고 자유롭게 혹은 함께 유쾌하게 걸었던 길들, 종일 걷다가 만난 낯선 마을의 맥주 한잔, 그리고 알 수 없는 느낌들. 하지만, 막바지에 들수록 걷고 숙소를 찾아 머물고 먹고 싸고 자는 게 일상이 됐어요.


뜻하지 않게 찾아온 특별한 순간들 외엔, 스쳐 걸었습니다.


초짜 순례자인 어리버리한 나를 이끌어준 친구들



마침내 도착한 산티아고는 기대보다 담담했죠. 비행기 시간과 마드리드 관광 5~6일을 빼고 부르고스에서 산티아고까지 24~25일 동안 500Km 넘는 도보길이었습니다. 큰 도시였던 레옹, 시에라, 산티아고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 매일 평균 25Km 정도 걸었어요.


원없이 걸었지만, 아쉬웠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사진들을 보며 느꼈어요. 왜 더 감탄하고 감동하지 못했을까? 왜 순례자 친구들과 더 신나게 놀지 못했을까? 왜 그리도 무심히 걸었을까? 그저 '걸었던' 순간만 기억에 남는 일상이 된 여행이 더없이 아쉬웠습니다.


삶을 여행에 많이 빗대잖아요? 정말 그렇다면, 이 길의 끝에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궁금했습니다. 혹시 '아쉬운 순간들'이 아닐까요? '산티아고 가는 길' 여행은 무심히 걷기에만 바빴던 일상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 순간이 모든 일상인데 말이죠.



Don't 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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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왕마담 드림

http://www.wangmad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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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벌써 7년 전에 다녀온 '산티아고 가는 길'이 많이 생각나던 요즘입니다. 푯대만 보며 일상을 무심히 걷고 있더라구요. 특별한 순간이 아니면 무심히 보내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이게 아닌데...' 싶었죠. 3편의 순례길 편지를 쓰면서 그때 추억을 많이 떠올렸어요. 시간이 갈수록 흐릿하지만 특별한 여행으로 남고 있습니다. 그저 걷는 거 자체로 행복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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