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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Oct 21. 2019

차 맛이 가장 좋을 때

[마음을 담은 편지] #11

오래전 땅끝 마을 해남에 갔습니다. '미황사'라는 절에서 템플 스테이를 했어요. 한 번은 해보고 싶었습니다. 회사 스트레스가 턱밑까지 차올라 여름휴가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고 싶었죠. 홀로 여행은 처음이라 2박 3일 동안 겪었던 모두가 신기하고 낯설었습니다.


늦잠 좀 잘까 싶었지만, 새벽 4시에 눈떠야 했어요. 스님이 숙소 밖에서 일어나라고 어찌나 종을 쳐대시는지 게으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어휴~ 쾡한 눈으로 법당에 나가 새벽 예불을 드렸죠. 마치 군대 점호하듯 일반인 모두가 참석해야 됐습니다. 첫 날엔 108배 하고 종일 허리와 허벅지, 무릎이 뻐근했어요.


예불 후엔 이른 아침부터 '울력'이라고 작은 노동을 했습니다. 주로 절 내에 있는 쓰레기들을 치웠죠. 돈내고 먼 곳으로 여행와 일했습니다. 그리곤 아침 공양이라고 밥을 먹었죠. 이후엔 모두 자유시간입니다. 절에서 하는 '명상' 프로그램 같은 건 일부러 신청하지 않았어요.



미황사 전경



절 뒤에 있는 달마산은 높고나 험하지 않아 산책하는 맛이 좋았습니다. 숙소에서 낮잠을 즐겼고, 볕 좋은 오후엔 야외에서 느긋이 책을 들고 읽는둥 마는둥 졸기 일쑤였습니다. 저녁밥까지 먹으니 이윽고 다담시간이 있었어요. 차를 마시며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땡기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도 녹차는 텁텁해서 일절 마시지 않거든요. 하지만, 해보지 않았던 경험에 '언제 해보겠냐'며 호기심이 일어 사랑방으로 향했습니다. 저 외에 스테이하러 온 일반인들 모두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별말씀없이 차를 우리고 계셨어요.


그 모습은 꽤 정성들여 보여 왠지 모르게 경건해졌습니다. 소주잔(?)보다 작은 찻잔에 우려낸 ‘황차(녹차의 가공방법과 같으나 민황을 첨가한다)’를 입에 댄 순간 혀 끝에 맴도는 은은하고 따뜻하고 깊은 맛에 놀랐어요. 무엇보다 텁텁하지 않았습니다. 


'와~ 이게 뭐야?'


이제껏 맛본 적 없던 차맛에 단번에 반했어요. 더 마시라는 권유에 몇 잔이고 계속 마셨습니다. 차그릇이 작기도 했죠. 결국 그날 밤 자던 와중 화장실에 가야 할 정도로 많이 마셨습니다. 내방객들이 평소 품었던 질문들에 대한 스님의 말씀은 보너스였어요.


다른 분들도 '차맛이 좋다'는 칭찬에 스님은 차가 가장 맛있을 때를 알려줬습니다. 문짝이 떨어져나갈 정도의 비바람과 몸은 한기를 느낄 정도의 날씨에 누각 같은 곳에서 마실 때 일품이라고 하네요. 거짓말같이 이틀 후 이른 시간부터 폭풍우같은 날씨가 찾아왔습니다.


아침부터 주지스님과 자하루(미황사의 누각)에서 차담시간을 가졌어요. 세찬 비바람에 연신 창문이 흔들리고 문짝은 덜컹거렸습니다. 한기로 몸과 마음마저 한껏 움츠러들었어요. 그때 찻잔이 주어졌습니다. 이미 따뜻하게 예열해놓은 잔의 열기가 은근하게 몸으로 퍼졌어요.



어두워진 미황사 경내



알 수 없는 안온함을 느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목을 타고 배와 사지로 뜨듯한 기운이 흘러 몸을 덥혔어요. 왜 날씨가 맹렬할 때 그것도 새어 들어오는 누각에서 마시는 차가 가장 맛있다고 했는지 알 거 같았습니다.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몰아치는 비바람에 흔들리던 마음마저 평온해졌습니다.


겉돌던 주지스님의 말씀도 가슴으로 들어왔어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는 질문에 거창한 생각보다 '지금 어떠한 마음을 내어 살고 있는가'에 집중하는게 필요하다고 하셨죠. 이 순간 기쁨과 슬픔, 고요함과 성냄, 설렘과 두려움 등 어디에 힘을 얹어줄 것인가를 물어보라고 하시더군요.


아침부터 세찬 바람이 가져온 추위에 비로 질퍽거리는 경내를 가로질러, 누각에 오르는 건 귀찮았습니다. 따뜻한 방에서 나오려니 마음도 어지러이 휘몰렸어요. 한기를 느끼며 오른 자하루였습니다. 따뜻한 차 한잔이 갔다준 평온한 기운, 조금 전과 다른 사람이 됐어요.




비바람이 가신 후 달마산에 낀 구름들과 미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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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왕마담 드림

https://brunch.co.kr/@jisang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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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일기같은 기록을 펴보니 딱 10년 전입니다. 여행을 혼자 간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저는, 서울 특히 회사와 가장 먼 곳으로 생각해서 간게 해남이었죠. KTX와 고속버스를 번갈아 타고 해남에 도착해 다시 시내버스 마지막엔 택시까지 타고 나서야 미황사로 들어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멀긴 멀더군요. 가끔 TV에 나오는 템플 스테이가 궁금했었습니다. 사실 대흥사라는 큰 절도 있었습니다만, 사람이 많은 곳보단 아담한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또한, 일반인이 참가해야 할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별다른 걸 많이 하지 않았어요. 단지, 차 맛이 얼마나 좋을 수 있는지 경험했습니다. 스님들의 좋은 말씀은 보너스가 됐었죠.



책들고 졸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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