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인 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
서비스 기획자이자 PM으로 일하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생각'이 아닌 '정리'와 '추적'이다.
우리는 상세 기획서를 쓰고, 유저 플로우를 그리고, 정책을 정의한다. 누군가에게 기획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와이어프레임을 그리고, 그 옆에 구글 시트의 셀을 하나하나 연동하는 '디지털 노가다'를 반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들여 만든 문서는 시간이 지나면 '레거시(Legacy)'라는 이름의 미궁이 된다.
"이 버튼 누르면 어떻게 되나요?" 라는 개발자의 질문에 "잠시만요, 기획서 좀 찾아볼게요"라고 답하며 수십 개의 시트를 뒤적이는 나를 발견할 때, 나는 기획자인가, 아니면 과거의 기록을 찾아주는 검색 엔진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곤 했다.
최근 회사에서는 AI 활용을 적극 권장하다 못해, 비개발 직군도 AI로 직접 개발을 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AI로 코드를 짜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하지만 기획자로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기획자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직접 코드를 짜는 능력'일까? 아니면 '제품의 정합성을 지키고 기획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일까?
나는 후자를 증명하고 싶었다. 단순히 개발 리소스를 아끼기 위해 코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의 본질인 '정책 설계'와 '데이터 관리'를 AI를 통해 자동화하고 자산화하는 것이야말로 기획자가 AI를 활용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기획자의 생산성이다.
시간의 효율: 초안 작성과 시트 연동에 드는 시간을 줄여, 더 중요한 사용자 경험(UX) 고민에 집중한다.
정보의 무결성: 식별값(ID) 중심의 관리를 통해 문서 간 충돌을 방지하고 서비스의 히스토리를 완벽하게 보존한다.
협업의 가속화: "잠시만요"라는 대답 대신 "AI 챗봇(RAG)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이 야심 찬 계획의 첫 단추로, 나는 가장 먼저 나를 괴롭히던 '문서화 노가다'를 해결할 초안 에이전트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기획서 작성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언제나 '백지'를 마주할 때다. 머릿속엔 이미 와이어프레임과 청사진이 가득하고, 말로 설명하면 5분이면 끝날 일인데 이를 문서화하는 데는 몇 시간이 꼬박 걸린다. 나는 이 간극을 AI로 메우고 싶었다.
"자연어로 툭 던지면, 규격화된 문서로 툭 나오는 시스템"
슬랙(Slack), 메이크(Make.com), 제미나이(Gemini)를 연결해 나만의 '초안 에이전트'를 구축했다. 프로세스는 단순하다.
(1) 자연어 입력: 슬랙에 두서없이 기획 아이디어를 적는다.
(2) AI의 판단: 제미나이가 내 의도를 분석한다. 미리 정의해둔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능 그룹'을 분류하고, 작업의 무게에 따라 수준(High/Medium/Low)을 나눈다.
High: 데이터 구조까지 설계가 필요한 핵심 기능
Medium: UI와 기능 정의가 필요한 일반 기능
Low: 단순 문구 수정이나 정적 페이지
식별자(ID) 부여: 이 과정에서 AI는 시트의 마지막 번호를 찾아 GR-F-024 같은 식별값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각 문서(기능/UI/Data)를 ID로 촘촘하게 연결한다.
(3) 프리뷰와 확정: AI가 내놓은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한다. 아무리 AI가 똑똑해도 100% 완벽할 순 없지만,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70% 완성된 초안을 수정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빠르다.
(4) 자동 적재: 내가 "확정"을 누르면, 구글 시트의 각 탭에 내용이 자동으로 추가된다.
비개발자인 기획자에게 AI로 개발을 하라는 요구는 처음엔 당혹스러운 숙제였다. 하지만 그 숙제를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며 깨달은 것이 있다. PM의 진정한 가치는 코드를 한 줄 더 짜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디자인, 개발 사이의 끊어진 맥락을 시스템으로 연결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실험인 '초안 에이전트'는 기존 기획서 양식을 개선할 방법으로 고안해냈으나, 하다보니 양식 자체를 수정해야할 것 같아 방향성을 바꾸게 되었다. 우선은 자동화 봇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현이 되는지 검증을 하는데에 목표로 뒀고, 실제로 작동하는 것 까지는 확인을 할 수 있었다.
다음 편 예고:
[2]편: 시트를 넘어 'AI-Ready' 마크다운으로 (지식 자산화의 비밀)
[3]편: 피그마와 명세를 잇는 마지막 연결 고리 (플러그인 개발 도전기)
나의 에이전트가 기획의 뼈대를 세우면 이를 디자인과 개발로 즉시 이어지는 형식으로 저장하고, 피그마 플러그인을 통해 그 지식을 현장으로 배달하는 플로우. 이 일련의 과정을 실제 업무 환경에서 검증하며 하나씩 기록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