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복근을 보는 유교걸의 마음.
헬스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헬빠죄아!)
바디 프로필이 유행이다.
먹는 걸 사랑하고, 운동을 혐오하는 나로서는 먼 나라 얘기
(내 마지막 100미터 달리기 기록이 25초다. 즉 꼴찌.)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술도 끊고, 떡볶이도 끊고, 닭찌찌만 먹으며 근육 탄탄한 몸매를 달성한 사람들이 진심으로 매우 존경스럽다.
여기까지 들으면 헬스장 카운터 아르바이트 체험기인가 하겠지만
수학 학원 보조 강사 체험기다. (반전)
나는 수포자였다. (반전의 반전!!)
한 번은 수학 문제를 풀다가 울면서 멀쩡한 샤프를 부러뜨린 적이 있다.
그래서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쿨하게 포기했다. (맨 마지막에 제일 어려운 문제는 맞혔다. 그림 그려서.)
하지만 나름 머리를 잘 쓴 수포자였다.
나의 전략은 비교적 쉬운 2점, 3점짜리 문제를 다 맞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문과 수험생 절반은 수학 시간에 자는 것을 아는가?
정말로 2점과 3점짜리만 다 맞아도 3등급은 나왔다.
대학에 합격하고 얼마 안가 동내 수학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었다.
중등 + 고등 문과반 선생님이었다. 효율적으로 수포해서 다행이었다.
그때의 제자들은 지금도 특별하다.
기껏해야 3-4살 차이가 나는 건데도 무척이나 귀여웠다.
교복 입고 오밀조밀 모여서 속닥대면서 공부하는 것도 기특하고
서로 애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다른 반 누구누구는 어떻더라 가십거리 얘기하는 것도 이뻤다.
따지고 보면 나도 불과 6개월 전에 그러고 있었던 건데 왜 그렇게 앙증맞았는지 모르겠다.
월급을 받으면 애들 간식거리를 사 가곤 했다.
더불어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그때 내가 취해있던 기분, 바로 내가 어른이라는 그 기분에 흠뻑 취하게 했다.
나는 무려 20살 된 대학생 선생님이라고!!
그때 나는 연애도 한 번도 안 해보고, 가십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만큼 인간관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였지만, 아이들과 얘기할 때는 언제나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어른의 미소를 장착했었다.
그때 원장 선생님도 너무 온화하신 분이었다.
월급날이 주말에 끼면 늘 일찍이 금요일에 급여를 주시고, 떡값도 틈틈이 챙겨주셨다.
무엇보다도 책임감과 성실함이 조금 부족하던 개념 부족 20살 보조강사였는데 차분히 가르쳐주시고 이끌어주셨다.
(어쨌든 법적으로) 성인으로써 존중받는 법과, 일에 대한 책임감을 배웠다.
이게 뭐 별건가 하겠지만, 지금은 안다.
저런 보스는 없다.
무튼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온화한 원장 선생님이 계시는 학원이니, 정말 오래 일했다.
20살부터 22살에 교환학생 가기 전까지 3년을 근무했다. 내 대학생활의 큰 부분이었다.
덕분에 (남친이랑도 헤어지고,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음.) 돈을 모아 배낭여행도 가고 교환학생도 갈 수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은 아니다. 원장 선생님 소식이 궁금한데 이제 연락처도 없다.
다만 아직 사소한 문제가 남았는데,
내가 그때 가르쳤던 몇몇 학생들과 인스타그램 친구라는 것이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K-유교 꼰대걸이 숨어있었는지,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을 보면 너무 당황스러워!!!!!!!!!!!!!!!!!!
나의 사랑스럽고 귀엽고 앙증맞은 애기들이 삼겹살에 소주를 먹다니!
군대를 가다니!!!! 심지어 재대를 해버리다니!!!!!!!!!!!! 몸짱이 되다니!!!!!!!(몸짱 너무 옛날 말인가...?)
그러니까, 사연인즉슨, 당시 내가 가르쳤던 학생 중에 한 명이 엄청난 바디 프로필을 올렸고,
그걸 우연히 봐버린 나는 마치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숙연해졌다는 것이다.
아직도 내 눈엔 교복 입고 수학 문제 풀던 모습이 선한데, 엄청난 상남자가 되어 식스팩이 생기다니.......
너의 복근....... 보면 안 될 것을 봐버린 느낌이었다고...... 흙흙.......
내 안의 K-유교 꼰대걸의 마음을 빨리 지워야겠다.
나중에 우연히라도 만나면 이제 누나라고 부르라고 해야지....... (실제 당시 애들이 "쌤 저희 누나랑 동갑인데! 누나 아니에요?" 이래서 군대 제대하면 누나라 부르고 지금은 무조건 쌤이라고 불러라 했었는데.)
그래.
헬스에 빠진 건 죄가 아니지.
*추신
혹시, 그 친구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불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 할 때 가끔 사춘기 남학생들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싸우거나 너무 짓궂게 굴 때 그 학생이 나서서 정리해 줬다.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엄청 다정하고 리더십이 있는 친구였다. 그냥 마냥 귀엽던 학생들이 커버린 모습을 보는 초보 강사의 마음이 그렇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가 내가 본 바디 프로필 중에 제일 멋졌다!!(정말 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