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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헤두안나 Mar 15. 2024

세 모녀의 고군분투 생존기

19화  좋은 날 - 조성(shaping)

연구계획서를 접수하고, 세미나 원고를 끝낸 후 무심히 창밖을 봤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참 예쁘게 느껴집니다. 어느 작가가 이런 말을 한 기억이 납니다. 춥고 흐린 날도 좋은데 왜 맑은 날만 좋은 날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것도 횡포라고 말이지요. 맞다 생각합니다. 분명 좋은 날은 각자 다를 텐데 말이지요. 


개강을 하고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연구재단 계획서에 집중하느라 글쓰기를 잠시 미루었습니다. 절대 멀티가 안 되는 뇌구조를 타고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상황으로 집중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이번 학기는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교필 과목과 국어국문창작학과 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기표현 글쓰기’ 전공 선택 수업을 진행합니다. 늘 해오던 수업이지만 시대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다 보니 수업 콘텐츠도 계속 고민해야 합니다. 


글쓰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수업하면서 학생들에게 강조했던 것은 꾸준함이었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의 일〉이라는 산문을 통해 새벽 4시에 일어나 2시간, 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 매일 6시간씩 글쓰기를 한다고 합니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글쓰기 과정과 방법을 배우고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조성(shaping) 혹은 계기적 근사법(successive approximation)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기교를 부리는 행동을 수행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쉬운 행동부터 학습하여 세련된 기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서툴고 투박한 행동에서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학습하여 정교한 기술을 갖는 절차가 바로 조성입니다. 



학생들이 지금은 글쓰기에 대한 저항과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과정과 방법을 단계적으로 배우고 반복하다 보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겠지요. 


작은 아이도 지난주 개학을 하고,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야자를 하고 있습니다. 밤 10시까지 진행되는 과정이 버거울 수 있어 걱정했는데 나름대로 씩씩합니다.  1~2학년 동안 학교에 남아 자습을 하지 않은 아이가 과연 적응할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습니다. 다행입니다. 학원과 과외 스케줄을 주말로 조정하고 평일에는 학교 야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좋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입시 상담에 진심이셔야 하고 잘하셔야 합니다. 이 분야에 혜안이 있으신 분을 만나야 합니다. 다행히 정말 적격이신 분을 만났네요. 굳이 컨설팅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아이가 매우 만족스러워합니다. 


큰 아이 때가 생각납니다. 좋은 분이긴 했지만 경험이 없는 초임 선생님은 아이의 입시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본인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지요. 당시 원하는 대로 수시를 썼더라면 아마 재수로 고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총 세 번의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네요. 1차 상담 후 아이는 많이 우울해했습니다. 수시가 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아이에게 학종으로 써볼 수는 있으나 장담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가족은 또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했습니다. 우선 아직 남아 있는 1학기 내신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3월 모의고사 성적을 보고 방향을 정하자고 말이지요. 


일단 수시는 학종 3개와 논술 3개를 쓰기로 했습니다. 큰 아이는 본인보다 동생의 상황이 낫다고 말합니다. 우선 내신이 논술 전형에서는 높은 편이고, 모의고사 성적을 봐도 최저는 무난히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지요. 본인이 논술로 갔기 때문에 더 자신 있게 권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논술에 조금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계셨습니다. 물론 압니다. 큰 아이 때도 무모한 도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전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에게 글 쓰는 능력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아이도 한 번 도전해보려 합니다. 입시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전략과 운도 따라 주어야 하니까요. 그냥 믿고 가렵니다. 불안해하면서 학교로 향하는 아이에게 오늘도 웃으면서 파이팅을 외칩니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아침 루틴입니다.


큰아이는 시험 일정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현재 우리 집 시계는 큰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더욱 불안한 모양입니다. 많이 긴장을 하면 문제가 잘 보이지 않는다면서 인생 처음으로 우황청심환을 먹겠다고 합니다. 몸도 마음도 모든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예민하게 신경 쓰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안쓰럽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겠지요? 


시험결과를 떠나서 끝나면 힘껏 안아주려 합니다.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는지 다 지켜본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야 아이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믿어주고 지지해 주는 부모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조금 덜 힘들어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지요. 


개강 첫 주가 지나고 둘째 주는 많이 피곤합니다. 이번 주 일이 몰려 있기도 했고,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한 모양입니다. 학교에서 만난 강사들은 이번 학기도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축하합니다. 매년 겪어내야 하는 일을 한탄하고 함께 하지 못한 동료 교수들의 빈자리를 허전해합니다. 가르치는 것이 좋고 행복해서 이 직업을 선택했지만, 앞으로 얼마나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불안이 오늘도 새벽기상을 재촉합니다. 본격적으로 다시 글쓰기에 집중합니다. 그동안 읽은 책 서평도 마무리해야 하고, 본격적으로 글쓰기 콘텐츠로 블로그도 연재하려 합니다. 또 이상심리학 서평과 영화 드라마 분석도 지속해야 합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시간 안에서 계획된 일정표대로 나름대로 진행하고 있는 스스로를 칭찬합니다. 


오늘은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동료교수와 점심을 먹었습니다. 아이 진로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그녀를 이렇게라도 위로해 주고 공감해 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도 그 과정을 지나왔고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마음이 잘 통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말해줍니다. 맛있는 밥과 커피 그리고 짧은 수다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받은 상처를 위로합니다. 


오늘도 모두에게 좋은 날이 되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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