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집에 오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다음 주 부터 기말고사입니다. 말 그대로 지금은 시험기간이지요. 아침에 나가면서 큰 아이에게 동생의 저녁을 챙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큰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저녁 후 일정을 잡는 데 많이 고민했을 겁니다.
세미나 중간에 아이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몇 시에 올 수 있냐고 말이지요. 언니와 같이 있으면서, 또 집에서만 일하는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투정을 부립니다. 시험 기간에는 더 신경 써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종강 시기와 맞물리면서 이래저래 모임이 많은 시기라 어쩔 수 없습니다.
비슷한 또래의 지인들은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여유를 부립니다. 식구들의 저녁과, 늦은 귀가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아직도 학부형인 저만 동동거리고 있네요. 밖에 나가면 집안일을 잊고 일에 더 집중하자 생각합니다. 그러나 배달음식으로 떼우고 있을 아이들이 신경 쓰입니다. 사실 배달음식이 엄마가 해 준 것보다 더 맛있는데도 말이지요.
늦게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첫 아이를 낳고 8년이 지나 둘째를 낳았습니다. 작은 아이가 2006년생이고 석사 논문을 2007년에 썼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평생교육원과 문화센타 강의를 했고, 논문 쓰기에 매달렸습니다. 아마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공부하는 것이 징그럽기도 했겠네요.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습니다. 모든 워킹맘들이 그렇듯 아이를 떼어놓고 나갈 때면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공부하는 엄마는, 함께 있을 때도 제대로 엄마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제 세미나 내용은 (지금 시각은 12월 6일 오전 5:36분) 마사 누스바움의 《감정의 격동》중에서 ‘유아기 감정’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성인이 된 인간의 감정은 유아기와 아동기의 내력(역사)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감정은 그 시기에 주 양육자와의 대상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봅니다. 자신의 욕구가 잘 해결되지 않을 경우 ‘불신감, 수치심, 분노, 혐오감’과 같은 부정적 정서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유아는 엄마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 주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은 모든 유아에게 고통스럽고 끔찍한 위기입니다. 마사 누스바움은 이를 ‘애증병존적 위기’라고 합니다. 그런 엄마에 대한 사랑과 분노가 양가적으로 병존하고 있다는 말이겠지요.
대상관계 심리학자인 위니콧(Donald Woods Winnicott, 1896.4.7 – 1971.1.25)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안아주기holding’를 강조하면서 '충분히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좋은 엄마는 아이의 불안을 받아주고 견뎌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의 마음속에 있을지 모르는 분노와 불안을 없애고, 신뢰와 독립심을 형성하기 위해서 충분히 좋은 엄마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다행인 것은 굳이 ‘엄마’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부모가 아니더라도 주 양육자의 따뜻하고 지속적인 양육이 중요합니다. 만약 유아가 자신을 돌보아주는 단일한 엄마만 요구하도록 행동 양식이 굳어졌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다행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굳이 엄마가 아니어도 되고, 아이도 자신을 돌봐 주는 주체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엄마(주 양육자)의 ‘충분히 안아주기(holding)’가 수반 되어야 합니다.
18개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놀이처럼 알파벳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세 살 무렵 어느 날인가는 한글을 읽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천재를 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모든 부모가 그랬을 겁니다. 사실 지금도 그 머리로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충분히 잘 할 텐데 아쉬워합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어설픈 학부모 놀이가 시작된 것이 말이지요. 전업 주부는 아니었기에 일하고 공부하는 짬짬이 학교 행사나 모임에 참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초등학교는 엄마의 관심이 아이의 성적과 비례한다는 말을 듣고 신경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기대나 관심이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조금 내려놓고 있습니다.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도 이유겠지요.
성인이 된 큰아이도 이른 나이에 놀이방, 어린이집, 유치원을 전전했습니다. 분명 엄마의 빈자리를 경험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주변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충분히 좋은 엄마’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을 조금은 내려놓습니다.
오늘도 저녁 모임이 있습니다. 잔소리 폭탄을 듣고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크니 오히려 제가 잔소리를 듣고 주의를 받는 입장으로 바뀌었네요. 이번 주는 건강검진이 있어 특히 조심해야 하는데 약속을 잡았다면서 절대 술은 안 된다고 다시 주의를 줍니다. 기분 좋은 잔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