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이 슬픈 건 남겨진 이들의 입장만이 아니다. 장례식 어디에도 죽은 나는 없다. 영정사진만이 간신히 몇 번 방이 누군지 알려준다. 정작 몸뚱이는 차가운 스테인리스로 무장한 영안실에 있다. 어디를 보고 절을 하며 헌화를 놓는 걸까.
장례식장은 가는 길도 몰랐던 곳이다. 가족들은 평소에 입지도 않는 검은 옷을 입어야 한다. 웬 처음 보는 상조회사 직원들이 손님을 맞는다. 손님에게 내어놓는 음식은 내가 즐겨 먹던 메뉴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내려 찾았을 텐데. 억지로 붙들려 앉아서 초면과 악수하려 벌떡벌떡 일어나는 불편한 표정들은 또 뭐람.
나의 장례식에는 내가 없다. 단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나의 죽음 기념 전시회를 열고 싶은 내 생각은, 해괴할지언정 논리적이다. 나의 마지막이 불편한 교통과 근조화환에 달린 초록색 스펀지, 다 식어 질겅질겅 편육인 건 너무 슬프다. 내가 마시던 커피 향이 풍겼으면 좋겠고, N차 관람한 영화가 틀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