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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Dec 07. 2023

꿈을 꿀 것 인가 깨어날 것 인가

외부를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 내면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칼 구스타브 융 (Carl Gustav Jung)


 이 문장을 처음 접한 시기는 십 여년 전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꿈을 꿔왔다. 특정한 직업이 꿈이었던 적도 있었고 혹은 가고싶은 대학교나 회사가 꿈이었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 꿈을 이루는 것과 상관없이 미래지향적인 생각을 할 때 생기는 포부와 자신감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꿈은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소위 '삶의 목적'이 사라지면 내 존재가 자멸의 길을 걷는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 정도로내게 파급력이 컸던 주제였다.


 그런데 내 바람과 달리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간에 쉽지 않았고 쉬울리가 없었다. 그때는 살아가는 법을 몰랐다. 살아가는 데도 방법이 있냐고 묻는다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방법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약간의 기술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그런데 그 방법을 몰랐기에 대부분의 과정에서 서툴렀다. 무언가를 섬세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극단적인 성향이 짙다. 좌절,비참함,분노,우울,슬픔,허망함과 같은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다 '죽음'이라는 주머니에 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비참함을 느끼면 죽으려 했다. 우울함도 마찬가지. 허탈함이나 의미없음을 느껴도 방법은 매번 같았다. 죽음에 대한 반응속도는 날이 갈수록 빨라졌다. 수단역시 더욱 위험한 방식을 사용하게 됐다. 오늘 실패하더라도 언젠가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근데 그게 꼭 절대적으로 나쁜 일만은 아니지않을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이 모든게 섬세하지 못해서 일어난 불찰이었다. 그런 감정에서 깨어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인은 외부가 아닌 내면에 있다는 생각에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 한 것이다.


 깨어나보니 모든 게 허상이었다. 내 마음이 만들어 낸 것들이었다. 사회적인 성공에 집착했던 이유도 주위사람들에 대한 인정욕구때문이었다. 성공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만큼 인정에 허덕였지만 그럴 수록 당당한 삶과는 멀어졌다. 특히,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되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별 것도 아니었다. 진짜 별게 아니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함 앞에서는 그 무엇도 대단하게 될 수 없었다. 죽어가면서 까지 이뤄야 하는 과업같은건 없다. 꿈도 나를 죽이는 꿈이 있고 살아가게 하는 꿈이 있는 데, 나의 경우에는 전자에 초점을 맞추며 살았 던 것 같다.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에 매몰됐고 삶을 진정성있게 살아가기엔 부족했던 처사였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자존심에 목매는 일이 적어졌다. 무시당하는 발언을 듣거나 하면 발작버튼이 눌리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릴테지만 그 때는 왜 그런 것들이 별일이 아니었는지. 물론, 매번 참는게 능사는 아니지만 최소한 '적정 수준'이라는 건 있다. 개개인마다 각자 지닌 특성이 있는데 그게 자신을 힘들게 할 만큼 과하지만 않는다면 살아가는 데 문제는 없으니까. 그 적정수준은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앞에 문장과 일맥상통한다.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하지 않을 만큼'이면 괜찮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의 정체성이 있고,  그게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혹은 단점이 장점이 될 수 도 있는 매우 입체적인 존재이다.


“꿈을 꿀 것 인가 깨어날 것인가.”


나의 결론은 꼭 한 가지만 선택하며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채색을 할 때 여러 물감들을 적절하게 섞어야 풍부한 색감이 나오듯이 우리 인생도 그런게 아닐까싶다.


깨어있으면 시간은 나의 것이다. 이제 그 시간동안 무엇을 꿈꾸며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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