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지금까지 아무 것도 이룬게 없다는 착각
"나무를 베는 데 6시간을 준다면, 4시간은 도끼날을 가는데 쓸것이다" -아브라함 링컨
밀레이트, 그 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필요한 장소이다. 밀레이트로 가는 기차는 무력한 나를 절대 기다려주지 않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시간이 되자 역을 떠나버렸다. 그 곳에 가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아직까지 이룬 게 없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20대는 한 창 씨앗을 심는 시기였다. 그들은 부단한 노력했기 때문에 30대가 되니까 각자의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에 중증도의 우울증을 겪고있었다. 어느 날 회심의 노력으로 나의 밀레이트에 도착했다. 그 곳은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황무지에 가까웠다. 억지로 그들을 따라 무언가를 심으려고도 해봤지만 중간에 말라 비틀어지기 일수였다.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었고 꿈에 비해 현실은 한 없이 초라했다. 덧없이 밝은 미래를 그려보지만, 실제로는 특별하게 하는 일 없이 우울하게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는 사람. 내 자신이 초라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지만 남들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를 소개 할 때 그렇다고 딱히 부풀릴 것 조차 없었다. 애초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로 괜히 우물쭈물 하게 된 것이다.
직장에서 승진을 하거나 사업적으로 성과를 내는 일은 그 가치가 눈에 확 보인다. 하지만 우울함과 싸워 내는 과정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저 정체기로 볼 뿐. 20대의 전부를 내 안에 괴물과 싸우느라 외부세계의 성취에 있어서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요즘 뭐하고 지내?’, ‘어떤 일 하세요?’, ‘전공이 무엇 인가요?’와 같은 질문은 초라함을 가져다 줬다. 왜냐면 안정적인 직장도 없었고 나는 대학교도 30대가 넘어서야 들어간 지각생이었기 때문이다. 20대에는 그저 하루하루 이 우울함과 싸우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었다. 매일 처방 받은 약을 챙겨 먹고 매주마다 상담사에게 카운셀링을 받으러 가는 일. 일상의 대부분이 내부세계에 치중 되어있었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일련의 과정의 반복으로 나름대로 이 황무지를 개간하려 노력했고, 마침내 밀레이트를 옥토로 만들 수 있었다.
무언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저 태어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어떤 현상에 대하여 결과론적인 입장을 끊임없이 부여한다. 가령 살아가면서 특정한 과업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듯이. 운명적인 과업을 찾고 싶었다. 꽤 많은 시간을 가만히 앉아서 그 일을 찾는데 치중하며 살아갔다. 그렇게 20대를 전부를 태워버렸다. 지금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두 개의 톱니바퀴가 맞닿아 돌아가듯이 그저 상황과 환경이 맞아떨어졌던 것 뿐인데. 앞으로 이 땅에 무엇을 심을지에 대해서 과도하게 의미만 부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틀에 갇혀 있던 까닭은 의외로 분명하다. 첫 번째로 직업과 나를 동일시 했던 탓이고, 두번째는 직업으로 반드시 자아실현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직업은 나라는 사람의 일부이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 했기 때문에 늘 선택에 있어 두려움에 떨었다. 너무 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점심메뉴 고르듯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이기 때문에 다소 신중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씨를 뿌릴지 고민만 하면서 십 여년을 가만히 보낼 것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뿌려 댔어야 했다. 심지어 그게 씨앗이 아니라 의미 없는 모래알에 불과하더라도 일단은 심어야 했다. 초점은 ‘씨앗’이 아니라 ‘뿌리는 것’의 행위자체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렇게 행동이라도 했으면 단서라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경험은 쌓일 것이고 그게 또 다른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괜히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는게 아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기반에는 직업이 곧 내 자신에 귀결된다는 안일함이 있었다. 최소한 나의 밀레이트는 사람들에게 화려하게 보여지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기에는 어려운 질문이다. 나라는 사람은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파편들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자아실현이라는 것도 그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이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재료들이 필요한 일이다. 직업이나 경제활동을 제외하고도 가령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든지 여가나 취미생활 혹은 인간관계 이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나의 삶을 이룬다. 그런데 이렇게 행복이라는 큰 틀에 모든 것을 직업이나 과업으로만 채우려다 보니까 늘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나 보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의 행복은 밀레이트에 얼마나 다양한 작물을 심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세월은 늘 그렇듯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관계없이 내 인생은 그 자체로 빛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최소한 내 자신은 안다. 아무것도 심지 못했지만 나의 밀레이트를 비옥한 땅으로 만들었던 고생스러운 기억들을. 마침내 얻은 그 뿌듯함을. 나라도 알고 있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문제는 다른 누군가가 알아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내 자신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질책해왔던 지난날들 이라는 것을. 내 주머니 속에는 아직 씨앗 몇 가지가 남아있고 기차역까지 걸어갈 튼튼한 다리도 있다. 행여 지금 기차가 떠났다고 해서 너무 슬퍼하지는 말자. 그럴 때는 다음 열차를 타면 그만인 것이다. 또한, 밀레이트에 아무것도 심지 못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자. 지금 부터라도 씨앗을 뿌리면 되니까.
이 땅의 이름이 왜 ‘밀레이트’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그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이름이 지어진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게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 처럼. 그저 어느 날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고, 사람들에게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 뿐이다. 이름의 뜻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 밀레이트 땅을 어떻게 가꾸느냐 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