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도 사랑할 수 있는가.
[일러두기:본 소설은 실화에 근거를 둔 허구입니다. 창작 소유권은 황정미에게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에는 건강과 힘이 있네요.
-모태 신앙이라 근근이 이어갈 뿐인데요...
비밀 번호를 알고, 아무 시간에나 불쑥 찾아올 여자, 오렌지 빛깔을 띄고 있는 책장에 꽂힌 책들이 명암에 따라 정렬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생명력이 없는 조화 꽃이 여자의 손길을 탔을 거라고 추측하는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는 그의 엄마였다.
-신은 영원한 휴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끔은 내가 헌금을 낸 만큼 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지갑 두둑이 챙겨간 현찰을 헌금 봉투에 넣을 때마다 내 이름을 아주 정성스럽게 썼다.
현금이 헌금이 되는 그 순간, 내 이름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벌 대신 복을 주리라 기대하는 어린아이 신앙일 뿐인데,
그의 엄마는 이 세상에 별로 애착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적 신앙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독일을, 그리고 독일 신학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중심에는 슈프레 강이 있어요. 그 북쪽 끝에는 박물관 섬이 위치해 있죠.
그녀 역시 사람을 향해 내뱉는 언어의 호흡에 온기가 없다.
-박물관 섬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루스트 광장이 있어요. 한눈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거대하고 웅장해요.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 같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아... 그곳, 루스트... 그 루스트 광장에 독일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어요 베를리너 돔.
교회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졌다. 익숙한 입꼬리다. 그녀의 아들도 웃고 있는 건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 입술에 힘을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짓는데, 그것이 입꼬리에만 반응하는데, 그녀의 입꼬리도 비틀어져 있었다.
-그 교회가 베를린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크 건축 양식 때문이에요. 아... 바로크 양식이 좋아요.
단 숨에 들이켰던 커피의 잔해가 몸속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온기 따위 없는 건조한 그녀의 언어는 나를 졸리게 했다.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났다. 감았던 눈을 뜨고 상체를 구부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려 할 때, 그녀의 긴 드레스가 의자에 걸렸다. 의자를 끌고 자세를 바르게 하는 움직임은 둔탁한 소리를 물러가게 할 만큼 빨랐다.
그녀는 알았을까. 졸린 눈으로 내 마음의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나에게 비틀어진 입꼬리를 가까이 보여주면서 말했다.
-그곳을 간다면 반드시 터키석 빛깔의 돔 바로 밑까지 올라가야 해요. 반드시요. 그래야 베를린 시내가 다 보여요.
그 순간 샤워를 하는 그의 콧노래가 더 커지고 있었다.
'아... 빨리 나와야 하는데...'
-아, 독일 가면 꼭 가볼게요. 꼭 가볼게요.
늦은 밤 갑자기 찾아온 그의 엄마는 나에게 경계가 없었다.
이미 나를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엄마도 그 처럼 알고 있는 지식을 나열하며, 주입식 교육을 하는 선생의 말에 어느새 세뇌가 되어버려 선생의 말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게 되는 그 말투만을 사용했다.
-신의 휴식이 아니라면 나는 눈을 감을 거예요.
메시지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은 불안을 의미한다. 그녀의 눈빛은 풀려 있었고, 독일을 동경하고 있는 나에게 더 이상 독일의 풍경을 말해주지 않았다.
-베를리너 돔 중앙 상단에는 아픈 사람을 위로하는 예수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어요. 그리고 그 옆으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있어요.
그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말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남편이 신학을 했어요.
-베를리너 돔에서요?
대꾸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나.
나의 질문이 공중에 분해되었다. 나의 존재는 그녀의 풀린 눈동자만큼 의미 없이 떠돌고 있었다.
-미국보다 학비가 싸고 입학이 쉬운 라이프치히에서 신학을 했어요.
-엄마, 독일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여자와 자고 싶은 남자는 무려 1시간이나 씻었다. 안경을 벗은 그의 눈동자는 생명력이 없어서 더 진해 보이는 동공만이 퉁퉁 불어 있었다.
-너도 이리 와서 앉아라.
여자 친구를 소개하고, 낯선 분위기를 회복하고.. 그래야 맞다. 아니 적어도 늦은 시간 불쑥 방문한 엄마에게 예우를 다할 것을 종용해야 맞다.
그는 이끌리듯 내 옆이 아닌 엄마의 옆에 앉았다. 무채색 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의 엄마 옆에는 그와 그의 고양이 태오가 함께 했다. 잠이 화들짝 다 깼다.
손때 묻은 오렌지 책장에서 그의 엄마가 오래된 책 한 권을 빼왔다. 그 책을 펼치면서 그녀는 말했다.
-이 책은 남편이 독일에서 공부했던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라는 책이죠.
아... 그곳에서 보았다. 중요 문장이 가득했는지 연두색 형광의 빛깔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도서관 서가에서 연두색 형광 펜을 떨어뜨리지 않고 그가 외우고 있는 그 책 위에 연두색 형광의 빛깔을 물들이고 있을 때, 나는 그가 오물거리고 있는 입을 보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연두색 형광 펜이 그도 있어서 운명처럼 그만 쳐다봤는데, 이제는 그의 아버지가 남긴 연두 빛만이 보인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궁금했다.
다시, 그의 엄마는 눈을 감았다.
-남편이 신학을 공부했던 라이프치히 남쪽으로 드레스덴이 있어요. 우리는 엘베강 좌안에 위치한 구시가에 살았어요. 아, 구시가와 신시가를 가로지르는 교량이 일곱 개나 됩니다. 독일의 피렌체라고 불리는 드레스덴은 예술의 도시라고 불려요. 그곳에서는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요.
남편이 공부하러 나가면 아들과 골목길을 따라 음악이 흐르는 근원지를 찾아다녔어요. 독일 사람들은 게을렀어요. 골목이 조용했어요. 사람이 없었어요. 일곱 개의 교량을 의식처럼 매일 건넜어요. 그래야 밤새 우울했던 감정을 날려 보낼 수 있었고, 그래야 내 몸에 물든 파란 멍이 흐려졌어요.
아버지가 언급이 될 때마다. 그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고, 태오는 그의 고양이 태오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아주 편안하게 쌔근대고 있었다.
이제 나는 태오가 소름 끼치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의 가족이 궁금해졌다.
-골목길 끝에 작은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에서 눈물로 기도하면 아들이 내 눈물을 닦아줬어요.
-아... 엄마, 그만...
그와 그녀의 목소리에 온기가 들어갔다.
나는 어느새 그녀와 그가 머물렀던 독일 골목길에 들어가고 있었다.